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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줄무덤두 곳에 얼룩진 성거산 성지


 

 제1 줄무덤-2 (3).jpg

                                                                                         <1 줄무덤>


 

병인박해 등으로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들이 비좁게 잠들어 있는 성거산(聖居山)

그 이름에서 부터 신앙 선조들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 같다.

 

이 산은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입장면, 동남구 북면에 걸쳐 있으며

높이는 579m로 그리 높지 않으나,

천안시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감제고지(瞰制高地)

고려 때부터 중요한 군사 요충지(要衝地)였다.

 

산 서쪽 직산(稷山-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에 수헐원(愁歇院)이 있었다.

길 가는 객이 쉬면서(- 쉴 헐) 근심(- 근심 수)을 잊으라고

()을 설치해 놓았다고 한다.

 

고려 태조가 수헐원에 들렀다가 동쪽 산을 바라보니

오색이 영롱한데 산세는 아름답고 영험해 보여서

성스러움이 깃든() 산이니 성거산(聖居山)이라 부르고

산제를 지내도록 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 때도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천안시 홈페이지>

 

 

성거산에서 보이는 천안시.JPG

                                                            <성거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천안시>



 

박해시기에 많은 신자들이 성거산 골짜기로 숨어들어와

서덕골(서덜골, 서들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

7개의 교우촌을 이루었다.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 사목 방문 시 거쳐 가는 경로였다.

이곳에서는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백부 최영열(崔榮說)

셋째 아우 최선정(崔善鼎) 안드레아가 잠시 살았고 최양업 신부도 자주 들렀었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 페롱(F´eron, , 1827~1903,

스타니슬라오)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와

조안노(Joanno, , 1832~1863, 베드로) 신부,

칼레(Calais, , 1833~1884, 알퐁소) 신부 등이 사목 방문 및 활동을 하였다.


 

 제2 줄무덤 (3).JPG

                                                                                        <2 줄무덤>


 

1866년 병인박해 때 소학골과 서덕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포졸들이 덮쳐 신자 23명이 목천현과 공주감영에서 교수형을 당해

소학골에 묻혔는데, 내포지방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과 함께

무덤을 만들어, 줄무덤을 이루었다.

줄묘라고도 불리는 줄무덤에는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이 묻히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성거산 이외에도 여러 곳에 줄무덤이 있다.

 

성거산성지에는 두 곳의 줄무덤이 있는데

1 줄무덤에는 38, 2 줄무덤은 36기의 묘봉이 있지만

실제로는 시신들이 겹쳐 묻혀 있어서, 잠들어있는 순교자들은 훨씬 많을 것이다.

<성거산성지 홈페이지>


 

  정상으로 가는 군용 도로.JPG

                                                        <성거산 정상으로 가는 군용 도로>


 

순교자들의 무덤이 처음 있던 곳은 사리목 마을 서쪽의 궁형지(북면 납안리 방향)였으나

1959년 미군 기지를 위한 도로가 개설되면서

도로 아래의 동쪽(북면 납안리 산46-1)으로 옮겨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때 이장에 참여했던 여섯 명은 당시 묘봉의 숫자가 107기였다고 증언했다.

<대전 교구 등.>

 

 

묻힌 분들 중 신원이 알려진 사람은 극히 드물다.

1 줄무덤에서 확인된 분들은 다섯 분이다.

 

최천여 베드로

소학골에 살며 묵상, 염경기도(念經祈禱 - 마음속으로 뜻을 생각하며 입으로 외는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등)에 열심하고 치명 원의를 자주 말하더니

병인년 1010일 체포되어, 배교한 교우들에게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를 살기 위하여 배반을 하느냐"

눈물을 흘렸고 한다.

십일월 초파일에 치명, 나이 55세였다.

 

최종여 라자로

최천여 베드로의 아우로 형과 함께 목천 포교 붙잡혀 갇혔다가

공주 진영으로 옮겨져 형제가 함께 순교했다. 당시 42.


 

  성모 동산.JPG

                                                                                            <성모 동산>


 

배문호 베드로와 고의진 요셉

병인년 10월 초파일 두 사람이 함께 잡혀 배주 배교를 강요받았다.

배문호가 십계명을 풀어 이야기하니

"누구에게 배웠으며,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

"부모에게 배웠으나 믿음은 다하지 못했나이다."고 대답했다.

공주 진영에 압송되어 11월 초파일에 처형당했다.

배문호 베드로는 24, 고의진 요셉은 26세로 둘은 절친이었다.

 

최천여 며느리

치명일기에 '채 서방 며느리'로 나와 있는데 최근 최천여의 며느리로 밝혀졌다.

다만 "배문호와 한가지로 치명하였다 하더라"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들 다섯 분의 시신은 청주 절골에 살던 강치운씨가

이곳 소학골에 묻었다.

<병인 치명사적 - 성지 안내문>


 

 성모 광장.JPG

                                                                                   <성모 광장>


 

천주교 대전 교구에서는 19971026

북면 납안리 산 46-1번지에 위치한 무덤 38(1 줄무덤)

36(2 줄무덤)의 봉분을 확인하고 묘역을 조성하였다.

1998321일 제2 줄무덤 뒤의 무덤 7기를 발굴,

네 번째 무덤에서 묵주, 십자고상과 청동 십자가를 발견했고

1998722성거산 순교자 성지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