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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고성(古城)의 안뜰 같은 황새바위 성지

    

황새바위 성지.jpg


 

황새바위 성지는 충남 공주시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금강과 합류하는

제민천(濟民川)이 왕릉로와 만나는 서쪽 구릉 위에

고성(古城)의 안뜰 같은 모양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제민천 쪽 정문으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십자가의 길이 벋어나 있고

중앙 돌계단을 올라가면 낮고 좁은 돌문이 나타난다.

머리를 숙이고 웅크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이 문은

믿음의 선배 순교자들을 기리는 마음 자세를 바로잡아 준다.


    

돌문.jpg       순교탑.jpg

                                  <돌문>                                                                         <순교탑>


 

순교자광장 왼편에는 칼날 두 개를 맞대놓은 형상의 순교탑이 우뚝 솟아있다.

칼날 아래 목숨을 바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간 순교자들의 처연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광장 정면에는 깨끗한 화강암의 소박한 무덤경당이 서 있다.

죽음과 부활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예수님의 돌무덤을 형상화 한 건물로

내부는 기도와 묵상을 하도록 꾸며졌으며

벽에는 248위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두 건축물은 김 헌의 설계로 1985년에 건립되었다.

<위키 백과. 성지 홈페이지>

  

무덤경당.jpg       열두개의 빛돌.jpg

                           <무덤 경당>                                                              <열두 개의 빛돌 >


 

광장 북쪽에는 열두 개의 빛돌이 세워져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채 놓여 있는 이 돌기둥은

열 두 사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증거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거칠고 모난 돌이지만,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성모광장에는 아담한 부활성당이 있다.

겸손하게 고개 숙인 성모상 뒤,

산비탈에 묻힌 순백의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화려한 도자기와 도자 평판으로 삼면이 꽉 찬

아름다운 성전이 숨 막히게 다가온다.

뜨거운 불을 지나 흙에서 도자로 변모한 모습에서

부활의 영광을 본다.

    

부활성당.jpg    부활성당 성전.jpg         

                   <부활 성당>                                                            <부활성당 성전>

 


산 정상에는 수백 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야외 성당 황새바위광장이 펼쳐져 있고

제단을 감싸고 서 있는 열두 비석 뒷면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산성을 마주보며 마지막 숨이 끊어진 그 자리가

수많은 후배들이 참배하는 영광의 자리로 거듭 난 것이다.


    

야외성당.jpg

                                                        <황새바위 광장 야외 성당>


 

두 곳의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치 오래된 산성의 안 마당을 거닌 것 같은 느낌이다.

    

 

충청도는 초기 천주교의 전파과정에서 천주교세가 가장 왕성하여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는데, 공주 지역에서 특히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유는 충청감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공주에는 1603년 충청도감영이 설치되어,

감영의 관찰사(감사)가 행정 이외의 군사권과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공주를 포함한 충청도 여러 지역에서 체포된 신도들을

공주 감영 혹은 우영(右營)의 옥에 투옥하였다.

투옥된 신자들은 극열한 문초와 갖은 형벌을 받게 되고,

배교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형에 처해졌다.

 

특히 황새바위는 공개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순교자들의 매장지로도 이용되었다.

    

성모 동산.jpg

                                                                 <성모 동산>


 

1801년 신유박해 때 내포의 사도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49일 처음으로 참수형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보름 후 청주에서 체포되어 온 이종국이 참수되었고,

5월경에는 문윤진, 7월경에는 이국승 바오로가 참수 당하였다.

이후 1812년 공주에서 장대원 마티아와 황 바오로가 참수된 기록이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공주에는 또다시 내포 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도 북부와 충청북도, 경기도 일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어 끌려왔다.

기록상 공주 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866109, 186756,

186812, 1869년 이후 16명 등 총 193명으로,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공주, 해미, 홍주) 순교자 334명의

57.8%를 차지하는 아주 높은 비율이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이존창과 10여 명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불과 10살밖에 안 되었고,

최 연장자는 남상교(南尙敎, 1783~1866, 아우구스티노)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 계층도 다양하였다.

<대전교구 홈페이지>

 

남종삼 성인의 양아버지 남상교는

충북 제천군 백운면 화당리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충청목사, 돈령부사(敦寧府使)를 역임했다.

<가톨릭사전>

 

1827(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아들이 순교하자 고향에서 잡혀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84세 고령으로 아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후에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 순교하여

확인된 순교자만 229명이며,

미확인자까지 합치면 일천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공주시청 홈페이지>


 

  황새바위 성지 - 01.jpg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혹은 목에 항쇄(項鎖)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 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황새바위 성지 조성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8012월 공주 중동본당에서 대전교구의 후원으로

현재의 부지 6.6116m² 을 매입하면서였다.

19843월 황새바위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다음해 117일에는 순교탑과 경당이 완공되었으며,

이어 12사도 석조 기둥 건립, 성모자상 안치, 십자가의 길 조성 사업,

피정의 집 겸 성당 건립 등이 이루어졌다.

황새바위 순교지(공주시 왕릉로 118. 교동 산 1-3)

20081월 독립 성지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