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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의 숲()에 세워진 용소막성당 성지

 

 용소막성당-01 (2).JPG

                                         <용소막성당-01>


 

1915년 가을 원주 용소막(龍召幕)에 아름다운 성당이 준공되었다.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 原城郡 神林面 龍岩里 7192 - 용소막성당 성지)

창문과 문, 아케이드에 로마식 반원형 아치를 많이 사용하고

굵은 기둥과 창문이 거의 없는 두꺼운 벽이 특징인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1백 평짜리 벽돌 양옥이었다.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용소막성당 3대 주임 시잘레 신부

(Chizallet, Pierre 1882~1970 한국명 지사원 池士元) 이다.

 

성당 신축은 원래 19104월에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기요 신부(J. Guillot )가 계획했으나,

공사를 시작하려던 19147, 1차 세계대전 발발로

기요 신부가 8월에 본국 프랑스 군대에 소집되어 귀국함으로서 중단된 것이다.

기요 신부는 애석하게도 19165월에 전사하고 말았다.

 

시잘레 신부는 1914년 가을, 성당 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묘재공소 이사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

1년 만에 완공시켰다.

 

처음에는 신림역 뒤쪽에 지으려고 했는데 어느 날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앞으로 30년 후에는 이 곳에 철마(鐵馬)가 지나갈 터이니

  저쪽 산 밑에 지으시오" 라고 말하여서

  현재의 성당 위치에서 1백 미터 떨어진 곳에 지었다가 지금 자리로 옮긴 것인데

<성당 안내판>

과연 194171일 중앙선 철로가 개통되고 신림역이 생겨났다.

 

성당이 위치한 신림면 성남리에는 성황림이 있어

()적인 숲이라는 믿음으로 신림(神林)이라 불리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성당이 들어섰으니 참으로 오묘한 일이 아닌가.

    


 시잘레 신부-02-야후에서.jpg

     <시잘레 신부 - Yahoo 에서 전재>

    

 

프랑스의 론느(Rhone)에서 출생한 시잘레 신부는

론느의 알릭스(Alix)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02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905629일 사제로 서품됨과 동시에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해 1010일 한국에 입국했다.

1905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자연과학과 수학을 가르쳤으며

이해 6월 원주본당 주임신부로 전임되어 2년간 사목,

1908년부터 1914년까지는 다시 신학교 교수로 재직.

1914년 용소막본당 3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12년 동안 사목.

1926년 서울 백동(栢洞 현 혜화동) 본당 창설 신부로 전임,

1927년부터는 소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36년 신병치료차 프랑스로 귀국,

이듬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신학교 교수, 학장을 역임.

1948년 대전교구가 설정되자 공주본당 주임, 1952년 대전교구 경리부장,

1957년 대전교구청 관리자를 역임한 후 197019일 선종,

대전교구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가톨릭 사전>

 

1930년 명동성당의 축소판으로 건립된 감곡매괴성당(甘谷 玫瑰)을 설계했고

1897년에 준공된 인천답동성당(畓洞)1937년 증축할 때

설계를 담당하는 등 성당 건축에 크게 공헌했다.

 

  용소막성당-02 (2).jpg


용소막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병인박해 무렵부터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그 일부가 용소막에서 멀지 않은 황둔을 거쳐서

충북 제천시 송학면 오미에 살다가 용소막에 정착했다.

 

 

용소막성당 개척자는 제천(堤川) 사람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이었다.

그는 1848년에 태어나 18세 때 병인박해를 겪고,

1893년 풍수원본당의 르메르(L. Le Merre 이유사 李類斯)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에 임명되어 각처를 다니며 전교하다가 1898년 용소막에 정착,

56명 교우들과 작은 경당을 짓고 원주본당 소속 공소를 개설하였다.

    

성모동산-01.JPG     성체조배실.JPG

                              <성모 동산>                                                                 <성체조배실>



19044월 용소막공소는 원주본당에서 분리되어

프와오(Vedastus Poyaud 표광동 表光東) 신부가 부임, 용소막본당으로 발족하였다.

강원도에서는 풍수원(豊水院),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설정된 교회이다.

당시 관할지역은 원주 평창 영월 제천 단양 등 5개 군에 공소는 17개로,

본당을 중심으로 사방 300리의 광활한 지역이었으며, 신자 수는 864명이었다.

10여 간 초가 성당에서 시작한 성당은 프와오 신부와

최도철,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회장 등의 노력으로

수년 후에는 교세가 1천명을 넘었고, 1910년 프와요 신부가 서울로 전임 될 때는

교세 2,000명의 큰 본당으로 비약적 발전을 하였다.

<가톨릭 사전. 원주교구 홈페이지>


    

 선종완 신부 유물관 (1).JPG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03.jpg

     <선종완신부 유물관. 코로나 사태로 참관이 금지되어             <선종완 라우렌시오>

       내부는 볼 기회가 없었다.>

 

성당에는 이곳 출신 사제로 198811월 성모영보수녀회(聖母領報修女會)를 설립하고

성경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긴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1915~1976)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이 성모영보수녀회의 도움으로 설립돼 있다.

 

 

부유한 집안의 3대 독자로 태어난 선 신부는

대를 이어주길 간절히 원했던 부친의 애원을 물리치고 사제의 길에 오른다.

신학생 때 교수 신부로부터 한국교회는 성서학의 불모지라는 말씀을 듣고

성경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는 히브리어와 같은 고전어를 아무 데서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책을 구입해서 온전히 독학으로 공부했다.

학부를 마칠 즈음에는

구약성경 연구에 필요한 고전어를 마스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됐다.

 

1942214일 선 라우렌시오는 사제품을 받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유학해 경제학과 법학을 전공한 후 귀국,

모교에서 잠시 성경을 가르쳤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이어서 19526월까지 예루살렘 성서연구소에서 성서고고학을 연구하고

귀국해, 다시 모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선 라우렌시오 유물관’의 내부-가톨릭 신문.jpg          선 신부가 한국 최초로 단독 번역 발행한 구약성경-02-가톨릭신문에서.jpg

     <유물관 내부 - 가톨릭신문에서>                        <선 신부가 한국 최초로 번역 발행한

                                                                                구약성경 - 가톨릭신문에서 >


      

선 신부는 19553월부터 1963년까지 구약성경을 나누어 번역했고,

1968년부터 8년간 신구약성경 공동 번역의 가톨릭 전문 위원으로

성경 번역 사업에 힘을 쏟아,

1976년 병상에서 원고 교정을 모두 마친 다음날 선종했다.

<원주교구 홈페이지. 가톨릭신문>

 

  용소막 성당 성전-01-01-두산백과에서.jpg

                                         <용소막성당 성전>

 

 

1960353명의 수녀 지원자로

경기도 소래에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였다.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 수녀회이자 반 봉쇄 수녀회로서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빈곤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것이 창립 정신이다.

 

회헌과 회칙은 물론이고 회헌 노래 및 수도회 배지까지 손수 만들었다.

배지는 성경을 펼쳐놓은 모양으로서 하느님 말씀을 상징한다.

 

19676월 경기도 과천 산골짜기로 그 터전을 이전하여

흙벽돌을 찍어 새 수도원을 건립하고 1969년에는 피정의 집을 지었다.

수도회는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실천이라는 정신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며 충실한 말씀의 증거자로 정진하고 있다.

원내에는 선 라우렌시오 창립자의 유택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