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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묘재성지와 최경환 후손 묘소

 

  묘재 남 성인 댁 대문에서-01.jpg

                                                         <묘재 남 성인 댁 대문에서>

 

배론성지에서 나와 2.7Km를 달리면 제원로와 만나고

좌회전해서 5.1Km를 가면 우측에 묘재성지(충북 제천시 봉양읍 제원로1015-7

- 학산리 326-1) 입구가 나온다.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요한(南鍾三) 성인이 살던 집이다.

 

남 성인의 백부이자 양부(養父)인 남상교(南尙敎 1783~1866 아우구스티노)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사했다.

 

남 성인이 1866년 정월 21(양력 37)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자 남상교도 잡혀 공주 감옥에 갇히었다가

아사하여 순교했다.

장남 남규희(南揆熙) 또한 잡혀간 전주 진영에서 순교하였다.

처 이소사(李召史 또는 이조이), 차남 남명희(南明熙)와 두 딸은

응좌죄인(應坐罪人)으로 경남 창녕에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다가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남종삼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자가 되었다.

<가톨릭대사전>

    

앞 뜰에 세워진 남종삼 성인 흉상-01.jpg     남 성인이 살던 집-01.jpg

       <앞뜰의 남종삼 성인 흉상>                      <남 성인이 살던 집>           

 

묘재(못재 또는 산척-山尺)성지의 성역화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다.

남 성인의 흉상과 고향집이 전부다.

앞으로 추진될 사업이 기대된다.

부디, 야단스러운 장식물들이 둘러싼 급조 성지가 아닌

자그마하고 소탈한,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성소가 탄생하기를...

 

 

최양업 신부의 동생들과 후손들의 묘역

    

 최 성인 후손 묘역-001.jpg

                                              <최경환 성인 후손 묘역>

 

풍수원 성당 입구 삼거리에서 횡성 방면으로 가면 느루개고개에 이른다.

느릅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를 넘어 약 2.5km를 가면 오른쪽에 옥스필드CC 골프장 입구

표지판이 보이고 그 건너편에 조그만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정류장 뒤편으로 붙은 언덕에 최경환 성인 후손 가족 묘지가 있다.

정류장 오른편 언덕길을 오르면 바로 왼쪽에 허름하고 평평한 잡초밭이 나오는데,

여긴 길이 아니겠지하고 지나쳐 올라가

보이는 왼쪽 길마다 들어갔다 허탕 치기를 몇 번 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다.

내려오면서 또 오른쪽 길마다 탐험하다 보면 도로 한길이다.

 

여기가 아닌가벼하고 큰길로 좀 더 가면 나오는 파출소에서 물어도

최경환? 모른다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안내 책자를 원망하며 포기하지 말 일이다.

그러니까 정류장 언덕을 오르다, 길은 없으나 차가 갈 수 있는

첫 번째 왼쪽 풀밭으로 무조건 들어가,

끝에 세우고 넘어다보면 묘소가 보인다.

(조그만 표지목 말뚝 한 개만 세워 놓으면 얼마나 좋아?)

최양업 신부의 첫째, 셋째, 넷째 동생 내외와 후손들의 묘다.


최경환 성인 후손 묘역-02-01.jpg

                                                     <최 성인 후손 묘역 - 02>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崔京煥 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정구(鼎九 최양업 신부), 희정(羲鼎 최 성인 순교 때 15),

선정(善鼎 12), 우정(禹鼎 9), 신정(信鼎 6),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 스테파노였다.

<원주교구 홈페이지>

<가톨릭신문에는 스테파노가 두 살 때 옥사했다고 기재됨.

- 1966. 11. 3일자>

 

최경환 성인의 조부 최한일(崔漢馹)은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인이 되었는데

아들 최인주(崔仁柱)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부인 이씨(이존창의 누이)

아들 인주를 데리고 세거(世居)하던 서울을 떠나 청양 다락골에 정착했다.

 

최인주가 결혼해서 낳은 최영렬, 최영겸, 최영눌(崔永訥) 세 아들 중

최영눌이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다.

삼 형제는 나중에 서울에 살다가 박해로 도피하여,

첫째 영렬은 목천 서덕골, 둘째 영겸은 용인 한덕골을 거쳐 골배마실,

최경환은 여러 지방을 거쳐 과천 수리산 교우촌으로 헤어졌다.

 

183615살의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떠났고

3년 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최경환, 이성례 부부는 체포되어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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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희정과 이 마리아>

 

최경환의 차남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목천 서덕골 큰아버지(최영렬) 댁과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최영겸) 댁에 나누어 맡기고

둘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진천 동골의 친척집에 의탁했다.

 

1849년 귀국한 최양업은 한덕골 작은아버지 집에서 동생 사 형제를 만났다.

몇 년 후 최 신부는 교우 송구현 도미니코(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를 두 동생과 결혼시켰다.

 

최희정 야고보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막내아들 최유종의 손자가 원주교구 출신 최기식 신부다.

 

최양업의 둘째 동생 최선정 안드레아는 딸만 둘 남기고

경기도 광주군 시어골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최우정과 송 막달레나-01.jpg      최신정과 송 아가다-01.jpg

            <최우정과 송 막달레나>                               <최신정과 송 아가다>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송 막달레나와 결혼한 후

수년을 진천 동골에서 살다가,

박해로 피해 다니며 묵주와 상본을 만들어 팔고

송 막달레나는 바느질로 어렵게 살았다.

위로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아나타시아)에게서 박우철 신부를 배출하였고,

장남 최상종 빈첸시오가 1939년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

희정, 선정, 우정, 신정의 후일담을 수기(手記)로 남겼다.

 

막내 동생 최신정 델레신포로는 송 아가타와 결혼 후

최 신부를 모시고 광주 소리울에서 살다가

몇 해 후 안양의 담뱃골 옛 고향으로 이사했다.

구걸하면서 유랑 생활을 하고, 빚을 내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고,

어느 날 읍내 저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30세를 넘은 젊은 송 아가다는 3남매를 데리고

객지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봉욕을 피하며 살아야했다.

송 아가다는 노년에 풍수원 성당 아랫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박해를 피할 때 산중의 눈 속에서 강보로 싸 길렀던 작은 딸이

김씨 집안에 출가해서 낳은 아들(김휘중 요셉 신부)

사제로 서품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송 아가다는 1930424일 향년 92세로 선종,

횡성 '느루개 마을' 양지바른 언덕에 홀로 잠들어 계시며

바로 곁에 친언니 송 막달레나 와 형부 최우정 바시리오의 합장 묘가 있다.

이곳이 바로 최경환 성인 후손 가족 묘역이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書院面 楡峴里)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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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형제들의 행적을 기록한 최상종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