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360 추천 수 0 댓글 0

 

55. 청양 줄무덤 – 다락골성지 - 최양업 생가

 

다락골성지 성당 (3)-01.jpg

                                                                          <다락골성지 성당>

 

충남 청양 다락골 뒷산에 줄무덤성지가 있다.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 산 63-1. 靑陽郡 化城面 花江里)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자들이 묻힌 곳이다.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묻었다고 해서

줄무덤이라는 이름이 되었고, 줄묘라고도 부른다.

 

줄무덤길 - 십자가의 길 (2)-01.jpg

                                                       <줄무덤 오르는 십자가의 길>

 

무덤의 주인은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처형당한 순교자들이라는 설이 있다.

 

교회사학가 오기선 요셉 신부(吳基先 1907. 11. 5 ~ 1990. 7. 30.)는

1952년, 박해를 목격하였던 최영천 노인을 만나 증언을 들었고

또, 1920년대 공주에 사시던 송 아오스딩 노인께서

"청양 고개 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 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250여 명의 교우가 치명하셨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 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느라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오요셉 신부의 회고록인 '곡예사 같은 인생'에 기록된 내용이다.

오 신부는 1964년 현지를 답사, 순교자들의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였다.

 

1980년 청양성당 주임으로 부임한 방윤석(方潤錫 베르나르도 1950~2012) 신부는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1, 2, 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 1 줄무덤 (3)-01.jpg

                                                              <제 1 줄무덤과 무명순교자 묘비>

 

제1 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의 기록에는 17기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임자 없는 무덤이라 하여 3기를 이장하는 바람에 14기가 된 것이다.

 

제 2 줄무덤-01.jpg

                         <제 2 줄무덤>>

 

제1 줄무덤 서남쪽 아래 20m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 줄무덤이 있다.

제3 줄무덤은 제1 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로, 13기가 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되지만,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무덤에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대전교구 : 청양 다락골 성지 홈페이지>

 

청양성당에서는 이곳에 무명순교자 묘비를 세우고

1982년 11월 23일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줄무덤 - 무명순교자 (3)-01.jpg       줄무덤 - 무명순교자상 (4)-1.jpg

                      <무명 순교자>                                             <무명 순교자>

  

 

이 무덤이 있는 산은 경주 최씨(최양업 신부 집안)의 문중 산으로,

이름이 밝혀진 6명의 다락골 출신 순교자 중 4명,

즉 최신덕(1805), 최봉한(1815), 최해성(1839), 최대종(1840)이

최씨 성을 가졌다는 점이, 이곳이 최씨 묘역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토지의 현 소유자도 최양업 집안의 최씨이다.

<청양 다락골성지>

 

다락골성지 성당-01 (1)-01.jpg          최양업 기념괌 (3)-2.jpg

                        <다락골성지 대성전>                               <다락골성당 - 최양업 기념관>

 

 

 

청양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신해박해(1791년) 직후였으며,

그 주인공은 최양업 신부의 집안이었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崔仁柱)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1600년대 초반부터 경주 최씨들이 살고 있던 마을이었다.

 

다락골은 위치상 나라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박해 중 한국 교회 간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다락골 교우촌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큰 신앙공동체들의 왕래에 편리해 전교의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또, 비교적 안전했기 때문에 교회 재건 운동에도 크게 쓰였다.

1805년 순교한 최신덕 바오로는 신태보 베드로 등과 더불어

신유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결집하는 데 공헌했으며

기해박해(1839) 중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피난 와서

마지막 편지와 사목 서한을 남기고, 최후의 미사를 집전한 장소가 되었다.

<다락골 자료집 2009.12. –내포 교회사 연구소>

 

최양업 신부 생가 터 (1)-01.jpg

                                                            <최경환 성인, 최양업 신부 생가 터>

 

 

최경환 성인 일가가 떠난 후에도 교우촌으로 계속 남아 있던 다락골은

병인박해(1866) 이후 소멸하였다.

포졸들에 의해 발각된 교우촌은 ‘동네를 전부 불 질렀다’ 고 전해졌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소멸하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성지 개발과 고증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락골의 본래 지명은 ‘다래골’이다.

간혹 ‘다리골’로 불리기도 했으나 교회 기록에는 줄곧 다래골로 표기되었다.

1944년 유영근 신부가 답사한 글에서 다락골(樓洞)이란 말이 처음 나온다.

다래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다래골’이었다는 말이 있고,

마을의 형태가 다락(樓) 모양이어서 다락골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의 위치는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2 (농암리 651-1 農岩里)이다.

 

새터성지-01.jpg          최양업 신부 생가 터 - 길 떠나는 최 신부.jpg

              <최 성인, 최 가경자 - 새터성지>                      <생가에서 길 떠나는 최양업 신부>

 

 

서울에서 세거하던 집안의 최인주는 다락골로 낙향하여

장성한 뒤 이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주,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다.

그 뒤 이웃이 점점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新垈)’로 불렸다.

(농암리 394-1)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는 여기에서 태어나 살다가

1827년께 마을을 떠나, 박해를 피해 서울 강원도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의 수리산(修理山)으로 이주했다.

 

1985년 최 성인 부자의 탄생지인 새터를 구입하기 시작,

성지화를 위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진입로를 개설하고 주차장을 마련하였으며

생가 복원 공사가 본격화되어 현재 진행 중,

2023년 성역화가 완성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