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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범 선생님과의 인연  [한국 음운론학회 게시용]

이상억

보통은 부고를 받고 바로 뒤에, 그 떠난 분께 드릴 글을 곧 쓰게 되질 않지만, 전상범 선생님께는 돌이켜 보고 싶은 많은 날들의 추억이 수북이 떠올라 뭐든 적어 봐야 할 것 같다.

처음 뵈었던 때는 꼭 60년전 경기고 불어반 불어 선생님으로 등장하신 깔끔한 인상의 선생님이셨다. 5.16 직후 군에 급히 입대하시게 된 원래의 불어 선생님 빈 자리를 영어 교사가 당당히 자원해서 담당하신 것이다. 평양에서 로어도 공부하시다 오셨다는 소문이 들렸고, 칠판 글씨가 너무도 가지런한 명필이라 우리는 역시 반듯하게 잘 따르며 배웠다. 또 교사들도 출동하는 운동회에서는 늘 큰 키의 청년 배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셨다. 당시 경기고는 교수 후보 대기소라 할 만해서 이기문, 안병희, 이병건, 이어령, 신동욱 등의 쟁쟁한 서울대 졸업생들이 교무실을 채우고 계셨었다.

학부를 다닐 동안은 서울대 문리대와 사범대 교정이 달라 별로 뵙지를 못했지만, 대학원생이 되면서 당시 서울대 어학연구소 조교로 근무할 동안 언어학 관계 학회의 많은 모임에서 간간이 뵌 일이 있다. 그러다 73년 인디아나 대학에서 좀 늦은 박사과정을 끝내 가실 때, 나는 플부라이트 장학생 초기 오리엔테이션을 그 캠퍼스에서 받으러 가서 여름 두 달을 함께 보냈다. 이 때 학위를 끝내시고 서울대로 오신 이병건, 양동휘, 이정민 선생님들도 거기 몰려 계셨었다.

하버드, 일리노이 대학을 거쳐 79년 귀국을 하니 서울대가 관악으로 통합되어 이전해 있었고, 나는 고려대에서 첫 번 교수직을 잘 시작했다가 모교라고 오라는 바람에 82년 서울대로 옮겨 그 뒤 전선생님을 교내에서도 쉽게 뵈었다. 83년 2월에는 한국언어학회 산하에 세분된 전공분야 학회를 두어야겠다는 부탁에 따라 현 음음론학회의 전신 음운론연구회를 창립하였다. 통사론 분야 다음 번으로 조직하면서, 처음에는 작년에 작고하신 은사 이기문 교수님 등 국어학자들도 다수 참여하여 토대를 닦아 주셨다.

85년 훔볼트 팰로우로 독일에 갔다가 돌아와 바로 본부 교무부처장을 맡게 되면서 음운론학회를 계속 못 나오고 있었는데 90년대부터 다시 나오니, 전선생님께서 한영희 교수님과 함께 기둥 역할을 해 주고 계셨었다. 비록 중간에 사정상 장기 결석은 했지만 초창기 학회 창립자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원로 분들이 그지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매번 강독에서 가장 적절한 커멘트를 해 주셨고 그런 공부하는 학자의 자세를 우리는 보고 배우며 자란 것이다. 전선생님은 일 처리를 반듯하게 하시는 평판에 수능 학력고사 출제위원장도 몇 해씩 맡으셨다. 그 때의 젊은 교수들이 함께 애쓰며 합숙한 기억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특히 교무부처장으로서 연중 한 달간 합숙하며 출제 채점을 총괄하는 책임자였기에 이렇게 긴장과 엄정을 기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는데, 아무 탈 없이 매끈하게 위원장 일을 여러 번 즐거이 해내신 것을 감탄할 뿐이다. 

전선생님은 모르는 사이 꽤 두꺼운 책들을 집필하거나 번역해 내셔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는 분이셨다. 이런 일도 아무나 흉내 내지 못할 수준과 분량의 업적이었다. 또 나는 국어학자로서 전선생님 박사논문을 바로 참고하면서 내 논문을 79년에 마쳤던 기억이 있고, 그 뒤에도 국어에 대한 고견을 많이 내주신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요즘은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배운 이론을 국어에 적용해 보는 노력을 덜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선배님들의 족적을 살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전선생님께서 이제는 좀 편히 쉬시면서 해 놓으신 많은 연구 업적을 책장에 놓고 바라보시며 미소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인 박희진 교수님도 제 처의 이화여고 영어 선생님을 하셨었다니 겹으로 제자가 된 처지라 이렇게 글이라도 올려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좋은 인연을 영원히 간직하며 지내겠습니다. (202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