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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 이곳에 잠들다 
글쓴이 이민우


외우 최민이 떠난 지 3년이 되었다.
지난 5월 26일이 3주기다.


조각가인 부인(현금원)은 최민(종합예술대학교 교수)이 애장했던 2만 3천여 권의 방대한 서적과 2백여 점의 국내외 작가 그림을 그의 사후 서울시에 기증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내년 8월 평창동에 건립되는 서울시립미술관 개관에 맞춰 최민 아카이브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외에 출판사 열화당에서는 내년 7월 시, 평론 등으로 구성된 3천매 분량의 최민전집을 발간한다.

 

최민은 60년대 말 세종문화회관에서 추상화 전시회를 가졌으나 어쩐 일인지 자작그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리 동문 중에는 권용현과 내가(이민우) 한 점씩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을 떠날 때 거의 없앴던 것 같다.

큐레이터인 내 딸이 최민과 최경환 선생님의 그림을 비교하더니 최민 것을 더 높이 평가했다.

 

최민과 나는 남산국민학교 시절 절친이었으나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가는 길?이 달라 소원했었다. 그러나 최민이 암으로 투병 중 죽기 1년 전부터 자주 만났다.

 

최민과 관련된 몇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중학교 1학년 첫 미술시간에 최경환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서 앞으로 고흐, 고갱같은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는 학생이 입학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금방 초등학교 때 전국사생대회에서 1, 2등을 도맡아 했던 최민임을 금새 알아차렸다.

나는 지금도 최민이 인류고고학-미학 등을 전공하지 않고 미술대학으로 진학했더라면 거장으로 빛을 냈을 것이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진보좌파인 최민(실제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 남영동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이 죽기 보름 전 “니 애들 세상이 됐는데 오래 살아야지”라는 내 얘기에 “민우야! 큰일났다. 내가 얘네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공부는 차치하고 책 한 권 변변히 안 읽은 엉터리들이 집권세력이니 나라 결딴나게 생겼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요사이 나라꼴을 보면 최민의 예상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또 조중행은 최민이 죽기 열흘 전쯤 최민과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 어렵사리 중국집에서 부인과 함께 만났다.

조중행은 최민이 선사한 자작시집에 사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짜장면이 먹고 싶다던 민이는 한 젓가락을 먹는둥 마는둥 해서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암시했다.

최민이 죽자 “천재는 일찌 가는구나”라는 조 박사의 탄식이 울림을 주었다.

조 박사는 고교 때 최민과 시화전을 같이 연 인연이 있다.

 

당시 59동창회는 김포수목장에 와비석을 설치해 주었다.

와비석에는 조중행이 조문시를 새겼다.

조중행은 심장병의사로도 유명하지만 서예, 그림, 시 등에도 상당한 수준을 가진 다재다능한 동문임을 그 때 알았다.

 

다음은 와비석에 새겨진 조중행의 추억시다.

 

최민 이곳에 잠들다.

해후
처음 만난 그 날의 안녕과 
이 여름날의 안녕 사이
이만 이천 육백 몇 번의 낮과 밤
몇 번 스쳤을까? 우리의 삶.
지난 밤 세찬 비바람 소리에 
젖고 있을 보도 위에 꽃 이파리 하나
언젠가 형형한 불꽃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