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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이광재 신부의 넋이 담긴 양양성당 성지

양양성당 (1) - 01.jpg

                                                                  <양양성당>

 

 

----- 단 한 명의 신자를 위해서도

사제는 희생할 의무가 있다며

스스로 피 흘려 제물이 되신 신부님

 

‘교회의 앞날을 위해

 나보다 더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를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고

그들의 월남길을 돕는 길잡이로

온갖 고초를 겪으시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신 분

 

--------- 총을 맞고 숨져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보다 이웃을 더 많이 생각했던

당신은 진정 또 하나의 예수였습니다.

<사랑의 길이 되어 떠나신 분 –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께 -

                       1996. 6. 양양성당에서 수녀 이해인 클라우디아>

 

 

온갖 고난으로 엮어진 양양성당은 자유를 향한 탈출의 마지막 출구이며

믿음을 위해 한 몸을 기꺼이 내던진 많은 희생자의 넋이 깃든 곳이다.

순교자 중 가장 상징적 인물이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이고

후배들이 이 신부의 희생을 기려 이곳을 성지로 만들었다.

 

양양성당(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청길 17. 성내리 8-1)은

38선에서 북쪽으로 불과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정학적 관계로

여러 권력 아래에서 끊임없이 고초를 겪어 왔다.

 

옛 양양성당.jpg-02.jpg

 

 

 

♱ 교우촌과 공소, 그리고 양양성당

 

백두대간으로 막혀 외진 땅 영동 지방에는 복음이 꽤 늦게 전파되었다.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했던 병인박해(1866년) 때

더 숨을 곳이 없던 경기도와 충청도 신자들이

양양의 범뱅이골(현 양양읍 화일리 襄陽邑 禾日里)이나

속초의 싸리재(현 속초시 도문동의 상도문 束草市 道門洞) 등지로 이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1882년부터 1902년까지 명지골(양양군 현북면 명지리 縣北面 明池里) 등

9개 지역에 공소가 설정되었다.

이 공소들은 1883년 4월 설립된 섭가지성당

(현 미수복 강원도 이천군 산내면 용포리 伊川郡)에 속했다가

함경도의 원산, 안변, 내평 성당 차례로 소속이 바뀌었다.

 

1921년 5월 5일 연로한 뮈텔(G. Mutel, 閔德孝 아우구스티노) 주교 대신

서울대목구의 사목을 관장하던 드브레(E. Devred, 兪世竣 에밀리오) 보좌 주교는

양양성당을 설립하면서 간도 조양하성당(朝陽河)에 재임하던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했다.

다음 해 2월 17일 최 신부는 양양읍 서문리에 마련한 가옥으로 이전한 뒤

인근 부지를 추가로 매입, 12월 22일에 새 성당을 완공시켰다.

1927년에 부임한 2대 주임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는

1936년의 수해로 서문리 성당이 침수되자

이전 계획을 세우고 현재의 성내리 부지를 사들였다.

 

1939년 7월 부임한 3대 주임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신부는

새 성당 공사를 시작, 1940년 2월 28일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북한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양양성당은 몰수되었고,

이 신부는 공산군에게 총살되고 양양성당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성전 (5) - 01.jpg     십자가의 길 (1) -01.jpg

                      <성전>                                                           <십자가의 길>

 

♱ 일제와 소련군, 북한 정권의 계속된 탄압

 

양양성당의 파란은 일제(日帝)의 폭거로부터 시작되었다.

2차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광분한 일제는 1944년 양양성당을 몰수했다.

이광재 주임신부는 성당 곁에 붙어있는 조그만 방에서 미사를 계속했다.

 

해방이 되고 감격과 기쁨도 잠시,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높은 지대에 위치한 성당을 군사 목적으로 쓰기 위해 일방적으로 차지해 버렸다.

 

소련군이 물러간 뒤에는 인민군이 들어와 성당과 부속 건물을 접수했다.

이 신부는 한 적산가옥으로 쫓겨나 공산당 감시 속에 미사를 드리며 신자들을 돌봐야 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북한 교회는 공산당 탄압으로 점차 붕괴해 갔다.

교회가 파괴되고 신자들은 탄압받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살해되기도 했다.

연길, 함흥, 원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성직자들은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38선과 가장 가까운 양양성당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 신부는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이들을 안전하게 숨겨주었다가

본당 교우들을 통해 무사히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따랐지만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월남을 성공시켰다.

“나보다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를 하나라도 더 남으로 보내

자유의 땅에서 하느님 영광을 한껏 드러내도록 하려는”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

<춘천교구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순교각 - 이광재 기념관 - 01-02.jpg  이광재 기념관 (5)-이 신부의 도움으로 탈출한 수녀들 - 01-01.jpg

                                       <순교각>                                        <이 신부의 도움으로 월남한 수녀들>


 

♱ 원산 형무소 수감과 방공호에서의 최후

 

1949년 4월 평강(平康) 본

당 주임 백응만 다마소 신부가 공산당에 체포된 후

이 신부는 그해 8월부터 평강 본당까지 맡아

양양과 평강을 오가며 신자들을 사목하고 있었다.

(백응만 신부는 1950년 1월 고문과 굶주림으로 옥사했다).

당시 사목자들은 1년에 절반은 공소 순방에 할애하곤 했는데 이 신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환자를 방문해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임종을 지켜주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1950년 4월 부활 대축일을 지낸 6월, 이 신부는 신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평강과 원산 지역 신자들을 위해 북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6.25가 일어나던 주일 새벽에 체포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됐다.

 

10월 8일 밤 이 신부는 다른 일행과 함께 감방에서 끌려 나왔다.

모두 팔을 뒤로 돌려 결박당했고, 4명씩 엮여 바깥 산으로 내몰렸다.

산 중턱을 지나자 웅덩이처럼 움푹 팬 큰 방공호가 있었다.

거기에는 이미 총살로 죽은 시신들이 쌓여 있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속으로 밀려 떨어진 일행에게 총탄이 쏟아졌다.

이 신부보다 먼저 잡혀 온 연길 베네딕도회 소속 김봉식 마오로 신부가

그 자리에서 숨졌으나, 이 신부는 총알을 맞고도 그 밤을 버텨냈다.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한준명 목사와 권혁기 라파엘 씨가 생생한 증언을 남겨 놓았다.

“총을 맞고 즉사한 사람도 있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물… 물 좀…’, ‘아이고… 나 좀 살려줘…’ 하는

신음 소리,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한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내가 물을 떠다 주지.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 하는 소리였다.

이광재 신부였다.

스무 번이 넘도록 되풀이하던 이 신부의 목소리도

점차 기력을 잃더니 마침내 조용해졌다.

1950년 10월 9일 새벽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한 ‘착한 목자’의 죽음이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성지/사적지 목록>

 

이광재신부_367992_1.0_titleImage_1.jpg        이광재 신부상 = 01.jpg

                    <이광재 신부>                                        <이 디모테오 신부 상>

 

 

♱ 가난하지만 독실한 신자였던 부모 아래에서

 

‘착한 목자’ 예수를 따르고자 사제가 된 이광재 신부는

1909년 6월 9일 가난한 농부 이만현 가브리엘과 김 수산나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은 북녘땅이 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냉골이 출생지다.

 

부모는 깊은 신앙심으로 2남 1녀를 키웠다.

냉골에서 포내 본당까지는 20리를 걸어야 했지만

어린 광재는 한 번도 미사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부이수 주임신부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제성소에 관심을 두게 됐을 것이다.

사제성소의 꿈을 키워준 또 다른 한 사람은 당시 신학생이었던 노기남 대주교였다.

신학생 노기남은 방학 때, 시골 소년 이광재와

훗날 '예수 성심의 사도'로 불리게 되는 이재현(요셉 1909~50?) 신부를 만나

신앙을 이끌고, 신학교에 들어가도록 영향을 미쳤다.

 

14살 때인 1923년 9월 14일 이광재와 이재현은 용산 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생 이광재는 모범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하도 열심이어서 '8품 신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문품과 강경품(독서직), 구마품, 시종품(시종직),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등

사제가 되기 위한 7품을 넘어서는 인격과 신앙심을 갖췄다는 의미의 별명이었다.

 

이광재 기념관 (2) - 01.jpg     이광재 기념관 - 01 사제복과 유품들-01.jpg

                  <이광재 기념관>                                                     <사제복과 유품들>

      

 

♱ ‘착한 목자’ - 사제의 길 14년

 

1936년 3월 28일 이광재는 종현(현 명동)성당에서

당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원형근)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첫 임직은 정규하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풍수원 본당 보좌였다.

3년여의 초임 기간 중, 이 신부는 겸손하고 열성적인 사목 활동으로

착한 목자로서의 사제상을 신자들에게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순교자 이광재 신부 순교에 관한 고증록’ 에는 ;

가난한 학생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학비를 내주었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날

어떤 거지가 성당 마당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주었으며,

멀리 떨어진 산골에서 병자성사나 고해성사를 청하면

밤늦게라도 길을 나섰고,

모내기 철에는 신자들이 참예할 수 있도록 새벽 3시에 미사를 드려주었다 등등,

수없이 많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야외 성전 - 01.jpg     이광재 신부 가묘 - 02.jpg

                               <야외 성전>                                              <춘천 죽림성당의 이 신부 가묘>

 

 

♱ 양양성당에서의 마지막 봉사

 

1939년 7월 양양 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 신부는

우선, 붉은 벽돌조 성당과 사제관 부속 건물을 완공했다.

관할 구역 외에도 영서 지방인 인제, 양구, 화천 지역의 공소들을

걸어서 순방하며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돌봤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유를 찾아 남하하려는

사제와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이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이 신부는 본당 신자 김봉만(보니파시오)을 안내인으로

15차례에 걸쳐 그들을 월남시켰다.

그 후부터 피살될 때까지의 참상은 이 글 도입부에 상술하였다.

 

북상하여 원산에 진주한 국군은 이 신부 유해를 발견했다.

성 골롬반 외방전교회원인 미 해병대 군종 사제 머피 신부가

장례미사를 봉헌한 뒤 원산 본당 사제관 뒷산 성직자묘역에 안장했다.

<가톨릭신문 순교자 열전>

 

 

춘천교구는 주교좌성당인 춘천 죽림동성당 뒷마당에

순교한 성직자들의 묘역을 조성했고

여기에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의 의묘도 모셨다.

이 묘역은 2017년 9월 17일 성지로 선포되었다.

 

역대 양양성당 본당 신부 가운데 유재옥 신부와 이광재 신부는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이 추진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명수 가브리엘 주임신부 - 01.jpg    성모동산 (3) - 02.jpg

               <박명수 가브리엘 주임신부와>                                           <성모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