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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성역화를 기다리는 덕산 관아 터

 

덕산초교 -01.jpg

                               <덕산관아터에 자리잡은 덕산초등학교>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에 해당하는 지역에,

조선 시대에는 예산, 덕산, 대흥, 세 곳에 관아(官衙)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중에 덕산 관아는 손자선 토마스가 모진 형벌을 받았고

하느님의 종 정산필 베드로가 참수형을 당하는 등

많은 천주교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땅이다.

 

 

성 손자선 토마스

 

손자선 토마스-01.jpg

                  <성 손자선 토마스>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본 ‘성지순례기 6 신리성지, 2017. 2. 23.’에 기술한 바 있다.

 

손 토마스는 덕산 관아에서 거꾸로 매달려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고,

포졸들은 그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부으면서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무엇이 좋으냐?” 하고 되물었다.

손자선은 “며칠 세수를 못 했는데 여러분이 내 얼굴을 씻어 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성인 목록>

 

그 후 손자선은 해미를 거쳐 공주로 압송되었고,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날은 1866년 3월 31일(가톨릭대사전), 또는 3월 30일(가톨릭 성인 자료실),

5월 18일(‘103위 성인 약전’ - 김옥희. 위키백과)로 자료 간에 차이가 있으니.

철저히 고증하여 정확한 날짜가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그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 그의 아우는 형의 유해를 거두려 나섰다.

공주읍 밖의 수풀 속에 시체가 잔뜩 쌓여있어 찾을 길이 막연하던 중,

손 등이 물어뜯기고 목을 조른 흔적이 있는 시신을 발견했다.

해미에서 관장이 ‘배교를 안 하려면 네 손의 살가죽을 물어뜯어라’

하는 명령에 손자선은 거침없이 자기 손등을 물어뜯었던 것이다.

이로써 형의 시신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103위 성인 약전’ - 김옥희>

 

다른 전언에 의하면 그의 장례가 열흘 뒤에 치러졌는데,

그의 시신이 썩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위키백과>

 

밝혀지지 않은 그의 이름, 순교한 날짜 등 여러 기록이

좀 더 세밀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의 종 정산필 베드로 복자

 

복자 정산필 베드로-01.jpg

                  <정산필 베드로>

 

정산필 베드로(鄭山弼)는 덕산 고을의 양민 출신이었다.

성격이 격렬한 데다가 힘까지 세어 모두가 그를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한 뒤에는 겸손하고 친절해져서

모두가 그를 칭찬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호서 지방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주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당시 주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관청에서는 물론, 대부분의 신자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을 때였다.

 

정 베드로는 얼마 되지 않아 내포 교회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기도와 신심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전력을 다해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 다블뤼 주교>

 

1797년 한용화가 충청도관찰사로 공주에 부임하자

도내 모든 수령에게 명을 내려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였다.

1799년까지 3년 가까이 100여 명이 체포돼 순교했으며

내포교회 공동체는 와해하다시피 했다.

이 박해가 이른바 '정사박해(丁巳迫害)'다.

 

1798년 정산필도 체포되어 덕산관아로 끌려갔다.

(1799년이라는 주장도 있음)

 

정 베드로는 많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용감하게 천주를 증거했으며, 조금도 동요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고,

함께 갇혀있는 동료들을 격려하였다.

사형당하기 전, 최후의 음식을 먹으면서는

“천주께서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음식이니 감사 기도를 드리며 먹어야 하오.

 그런 다음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거요” 라고 하였다.

식사를 마친 그는 형장으로 나아가 참수형을 받고

(‘사학징의’ 에는 매를 맞고 죽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밝혀지지 않고, 50살 내지 60살이었다고 전해온다.

 

정산필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차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덕산관아터 성지 홈페이지. 성인 목록>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와 복자 원시보 야고보

 

김사집 프란치스코-01.jpg         원시보 야고보-02.jpg

               <김사집 프란치스코>               <원시보 야고보 - 주문모 신부에게서

                                                                축첩을 한 자는 성사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첩을 내보내고 있다.>

 

충남 당진군 합덕읍 출신 김사집 프란치스코(1744-1802년)도

덕산 관아에서 온갖 유혹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는 과거 공부를 하다가 천주교를 알게 되어,

시험을 포기하고 세속과 단절하였으며 신앙 실천에 열심하였다.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보급하였고,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체포된 신자들이 갖고 있던

필사본 때문에 이름이 알려져, 붙잡혀 덕산 관아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너희들의 생을 정직하게 영위하도록 애써라.

그리고 나를 다시 보려는 생각을 더 이상 갖지 마라.”는 편지를

자식들에게 보냈다.

그해 10월 해미로 이송되었다가 두 달 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엄동설한에 사흘간 180리 길을 걸어 청주에 수감되었고,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 청주시 남주동 장터에서

곤장 80대를 맞고 순교했다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 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인

원시보 야고보는 60세가 다 된 1788-1789년 무렵,

사촌 동생 원시장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했다.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한 야고보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고, 금요일마다 금식을 지켰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68세 때인 1798년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아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 원 병영(兵營)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어

온갖 혹형을 못 이기고 4월 17일(음력 3월 13일)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50 가족 가량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성인 목록>

 

 

그 외의 순교자들

인언민 마르티노-01.jpg       이보현 프란치스코-01.jpg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정사박해 때 내포교회 신자 100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과 행적은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기록을 통해 확인된 순교자는 복자 이도기 바오로(1743~1798),

박취득 라우렌시오(?~1799) 등 8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정산필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1799),

1800년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다.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하느님의 종

 

평소 성덕이 뛰어난 신자가 선종하면

그의 추종자들이 해당 교구청이나 수도회, 신심 단체에 시성을 청원한다.

교구청에서 청원을 받아들여 조사한 뒤 교황청 시성성에 문서로 제출한다.

이런 과정의 후보자를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르며,

시성성에서 심사하여 받아들이면 해당 인물은 공식적으로 '가경자'라고 불린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 등 125위의 '하느님의 종'이 있다.

 

 

흔적조차 없는 덕산 관아

 

덕산 관아 터-01.jpg        덕산 옥 터-02.jpg

                       <덕산 관아 터>                                     <덕산 감옥 터>

 

덕산군(德山郡)은 덕산면을 중심으로 현재 예산군 서부의 옛 행정구역이다.

덕산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 덕풍현(德豊縣)과

이산현(伊山縣)이 합쳐서 생긴 지명이다.

덕산 관아 터(예산군 덕산면 봉운로 70-9. 읍내리 365-4)는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감옥 터에는 읍내1리 마을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흥선대원군 부친 남연군 묘

 

남연군 묘소-02.jpg     남연군 묘소-묘비-01.jpg

                                 <남연군묘>                                                  <묘비>

 

1868년 5월 10일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구만포에 상륙하여

덕산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로 직행하여 발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이로 인해 쇄국 양이 정책이 강화하고, 천주교 금압령이 내려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본 연재 54-해미읍성 편에 기술돼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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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연군 묘소와 가야산>

 

문제의 남연군 이 구(南延君 李 球 1788~1836)의 묘가

덕산관아터 부근 가야산 기슭에 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

야망이 넘치던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1898)은

한 풍수가에게 명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풍수가는 이 자리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로 지목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무덤 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는데,

1844년(헌종 10) 이하응은 가야사를 불 지르고 탑을 부순 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장(移葬)했다.

그리고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道文)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했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는데,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 남연군의 묘, 두산백과>

 

명산(名山) 가야산을 등지고 앞이 훠언히 뚫린 이 묘소는

풍수가의 눈이 아니더라도, 좋은 땅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지금은 묘소 주위로, 가야사 유적지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