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179 추천 수 0 댓글 0

청와대 탐방기

history_img01.png

□ 우리 나이에 “다음에”는 없다!

아내: 우리 평생에 청와대 구경할 줄을 꿈에라도 상상해 보았나?

천곡: 개방 초기에는 번잡할 터이니 "다음에" 한가해 지면 가 보자~~~

아내: 우리 나이에 "다음에"는 없다!

며칠 전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돌려 주겠다는 TV 뉴스를 보며 아내와 주고 받은 대화이다. 옆에서 이 대화를 엿듣던 딸 아이가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조금 후에 "엄마 청와대 관람 신청했어! 내일 당첨여부 알려준데..."

다음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첨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청와대 탐방이 이루어진 것이다. 2022년 5월 19일(목)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청와대에 들어 갈 수 있는 Bar Code가 도달했다.

□ 청와대 약사

탐방 전에 청와대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사전에 알고 가는 것과 무작정 탐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번 청와대, 국민 품으로 라는 홈페이지로 들어 갔다. 그 곳에서 제공하는 여러 정보와 자료를 살펴 본다.

청와대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이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시청과 종로·을지로 등 도심 사무실 밀집지역의 북쪽에 있다. 청와대의 주소는 일제 강점기인 1911년 12월 20일 ‘광화문 1번지’로 정해졌었는데,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1월 1일부터 일본식 주소가 한국식으로 바뀌면서 ‘세종로 1번지’가 되었다.

고려시대

이궁(離宮)이 있던 자리

청와대 부근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무렵 고려의 이궁이 이 곳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도읍이었던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의 세 곳을 삼경으로 두었는데 숙종 때 동경 대신 이곳에 이궁을 설치하고 남경으로 삼았다. 남경이란 ‘남쪽의 서울’ 이란 뜻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터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태조 이성계는1394년 새로운 서울을 세우기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찾아보게 했는데 고려 숙종 때의 이궁 자리는 너무 좁아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다.                                                            태조는 그 해 12월 정도전으로 하여금 궁궐 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했고, 이듬해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9월에 궁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궁이 바로 경복궁이다.

경복궁이 완성된 뒤 세종 8년인 14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의 후원(뒤뜰)이 조성되었다. 이때 후원에는 서현정, 연무장, 과거 시험장이 만들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복궁과 이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경복궁과 그 후원인 지금의 청와대 근처는 27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 2년인 1865년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다시 지어졌다. 이 당시에 함께 건축되어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경무대도 지어졌는데,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 ‘으로서 기능을 이어갔다.

경복궁은 고종 33, 건양 1년(1896) 소위 아관파천으로 고종 황제가 경운궁으로 떠나자 정궁으로서 위상이 급속히 추락했다. 고종이 이어(移御)한 경운궁은 대한제국 황궁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해 증축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청와대 자리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이 곳의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이후 조선 총독의 관사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다.

IMG_6612 옛 청와대.png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에서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다. 경무대는 제4대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 라는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푸른 기와의 청와대로 불리고 있다.   -출처 대통령 기록관-

□ 설레는 마음을 안고 청와대 탐방길에 나서다.

2022년 5월 19일(목), 날씨는 쾌청하나 약간 구름이 낀 나들이하기엔 무척 좋은 날씨였다. 아내와 그리고 딸 아이와 함께 분당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 3-1 출구로 나왔다. 평일인 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이쪽 서촌지역도 북촌지역과 같이 최근에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효자동 버스정류장에 하차했다. 이제부터는 도보로 이동한다. 예전 경기중학교 다니던 시절 천곡은 가끔 청운동에서 내려오는 이 성군과 함께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만나 경무대 앞 길을 걸어서 삼청동으로 내려가 다시 화동을 거쳐 경기중학교로 등교하곤 했다. 청와대 앞 커다란 분수대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영빈관 정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청와대에 도착했다.

IMG_6614 안내도.jpg

 

안내도에는 칠궁부터 관람하도록 되어 있으나 이미 영빈관 정문에 도착한 터라 바로 청와대 안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 영빈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열었던 건물이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 행사장으로 이용되거나 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됐다.

IMG_6615 영빈관.jpg

1978년 1월에 착공해 그해 12월 준공됐으며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형태로 내부에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 월계수, 태극무늬가 형상화돼 있다. 1층과 2층에는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외국 국빈의 접견행사를 치르는 곳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대규모 오찬 및 만찬 행사를 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했다.

IMG_6616.jpg

영빈관의 현재 모습이다. 코로나 시대임을 알리는 마스크를 쓰고 아내와 한 컷 했다.

청와대 본관

조선시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정남향에 자리 잡고 있는 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된 중심 건물이다.

IMG_6625 본관.jpg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이 거주하던 곳을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한다는 것이 대내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1991년 9월 4일 신축됐다. 전통 목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총 15만여 개의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 2층 본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단층의 별채를 배치했다.

역시 본관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본채 앞 대정원에는 모 방송국이 청와대 개방 기념으로 ‘열림 음악회’ 방송 준비로 여러 가지 방송 장비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방송국으로서는 매우 큰 행사이므로 나름대로 완전한 준비를 위한 일이기는 해도 모처럼 기대를 안고 찾은 탐방객들에게는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풍광을 헤치는 가설 철물들이 여기 저기 흐트러져 있는 모습은 이곳이 과연 청와대였나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시민들은 비교적 질서를 잘 지켜 관람하고 있었고 눈에 띄는 불쾌한 장면은 없었다.

IMG_6627.jpg

청와대 본관을 배경으로 한 컷 찍었다. 언제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폼 잡을 수 있겠나?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청와대 본관 앞에 청와대의 약사를 세긴 석조 안내문이 있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靑瓦臺의 이 터전은 高麗朝의 離宮으로, 朝鮮朝 景福宮의 後園으로 千年에 걸친 歷史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日帝가 우리의 옛 建物들을 헐고 이 곳에 지은 總督의 집을 國家元首가 建國 이후 이제껏 써왔다. 盧泰愚 大統領은 1988년 12월17일 民族文化의 傳統을 잇고 드높아진 나라의 位相에 어울리는 靑瓦臺를 新築하도록 하였다. 官邸가 1990년 10월 25일 完工되고 本館이 1991년 9월4일 竣工되니 天下에 으뜸가는 福地 위에 겨레의 앞날을 무한히 밝혀 줄 靑瓦臺가 새로 지어졌다.

 

대통령 관저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건립됐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가 배치돼 있고 앞마당에는 우리나라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대문은 전통 한옥의 분위기에 맞는 삼문으로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목조 구조로서 궁궐 건축양식인 팔작(八作)지붕의 겹 처마에 한식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IMG_6636.jpg

대통령 관저 입구에 도착하니 긴 줄이 우리를 맞이한다. 관저 안으로 들어가는 인수문(仁壽門)에는 청와대 관계자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특별히 드러나지 않게 줄서기를 지도하는 사람, 입장자들을 감시하는 사람 등이 눈에 보였다. 입구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기념식수가 관람자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하직한 대통령이 심어 논 나무라서 그런지 쓸쓸해 보였다. 우리도 줄을 섰다. 관저 안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관저의 건물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본채, 별채, 사랑채 3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당은 잔디가 깔려 있었다. 잔디 사이로 목조 보도가 있었으며 목조 건물에 특수 니스칠을 한 것처럼 보였다.

 

IMG_6637.jpg

대통령 관저의 내부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별채, 우측이 본채이며 사랑채는 대문 옆에 있다.

 

□ 상춘재(常春齋)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귀빈들에게 우리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 비공식회의 장소 등으로 사용됐다. 현재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관사 별관인 매화실(梅花室)이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 시절 상춘실(常春室)로 그 이름을 개칭해 사용해 왔으며, 1978년 3월 천연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로 개축했다.IMG_6650 상춘재.jpg

이후 상춘재(常春齋)로 이름을 명명하고 1983년 4월 연면적 417.96㎡의 전통적인 한옥식 가옥으로 신축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대통령 관저에서 상춘재로 내려가는 길은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다소곳한 숲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 가면 침류각으로 가는 길이다. 대통령 관저와 상춘재는 커다란 철제 출입문으로 구분되어 있다. 아마도 평소에는 닫아 둘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대통령의 주거 공간과 일반적인 행정구역을 구분하여 관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문에 대통령 문장이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문장이 달린 문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하느라 분주하다. 천곡도 한 컷 했다.

IMG_6649.jpg

 

□ 녹지원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 종의 나무와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으로 문·무의 과거를 보는 장소로 이용됐으며, 이후 정원이 되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의 부지로 사용됐다.

IMG_6651 녹지원.jpg

야외행사장으로도 이용됐으며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150여 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IMG_6652.jpg

상춘재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 녹지원이다. 이날은 문화재청에서 마련한 국악연주가 있었다. 국악연주를 하기 위해 녹지원 한 구석에 하얀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각 종 방송 기기들을 조작하고 있었다. 푸른 녹지원 공간에 하얀 텐트와 각종 조명기구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전기선들이 눈에 거슬린다.  방법은 없다. 지하에 시설을 하지 않는 한 지상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급작스럽게 청와대를 개방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준비가 미흡해 보인다. 문화재청 직원들이 청와대 개방에 따른 각종 문화행사를 급조한 정황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행사를 위한 행사를 하는 성의 없는 그들 만의 특유의 방법이 엿 보이는 것이다. 성의가 없고 준비된 내용들이 너무 허술하고 촌 스럽다.

녹지원 인근 숲속에서 집에서 마련해 온 간식을 먹기로 했다. 녹지원에서 수궁터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그마한 휴식공간이 눈에 들어 왔다. 자리하고 간식과 음료수를 들었다. 시원한 바람에 간식이 입맛에 딱 맞아 기분이 상쾌했다. 간식을 하며 주변을 살펴 보니 잘 꾸며진 정원이었다. 조그만 연못도 보이고 앙증맞은 사이즈의 돌다리도 운치를 더해 준다. 이렇게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과 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 같다. 많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 지기 시작했다. 면적은 넓고 심어 논 나무들은 모두 값진 나무들이고 잔디와 각종 시설물들... 1년에 1,000억 원이 든다는 소리가 과장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대통령 관저에서 상춘재로 내려오며 지나쳤던 침류각과 대통령 관저 뒤에 있는 오운정(五雲亭)과 미남불(美男佛)을 보러 가야 한다. 다시 녹지원을 지나 대통령 관저 쪽으로 좌회전을 해야 한다. 녹지원을 지나는데 녹지원 주변으로 청보리를 심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청보리는 우리 문학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 향수 깃든 식물이다. 천곡이 지나칠 리 없다. 청와대 녹지원에서 청보리를 보다니 뜻 밖이다.

IMG_6657.jpg

어느 할머니가 옛 생각이 나셨는지 허리 굽혀 청보리를 감상하려 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할머니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할머니는 멋 적어 하시며 웃음을 터트렸다. 천곡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참느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잔디 밭에 팻말이 하나 보인다. 자세히 보니 문재인 대통령 부부의 기념식수 팻말이다. 여민관(대통령 비서실 건물) 출입구 옆에 서 있는 나무다.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 동기가 재미 있다. 할머니가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천곡도 웃음이 터져 할머니가 미안해 할까 봐 고개를 돌리면서 팻말을 발견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였던 것이다. 언제 식수를 했는지 자세히 보지도 않고 일행이 어디를 갔는지 바로 찾아 나섰다. 청와대 안에는 역대 대통령 기념식수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승만 대통령과 윤보선 대통령은 기념식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기념식수를 할 만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윤보선 대통령은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4.19 혁명과 5.16 군사혁명 격동의 세월을 거치셨기 때문일 것이다.

 

□ 침류각(枕流閣)

녹지원을 지나 춘추관으로 나가는 아스팔트 길에서 좌회전하여 다시 대통령관저로 향하는 길을 올라가다 사거리를 만나 오른쪽 언덕으로 오르면 침류각에 도달한다.

IMG_6665.jpg

침류각은 경복궁 후원에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은 건물로,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침류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이는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의미한다.

枕流閣이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은 이후의 모습을 그린 ˹북궐도형(北闕圖形)˼에 枕流閣이 보이지 않고, 1920년대의 한옥 건축 양식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이 시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원래 위치는 현재보다 서쪽에 있었으나,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이 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중앙에 넓은 마루인 대청을 두고, 앞쪽으로 한 단 더 높게 만든 누마루를 설치하여 한옥 건물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현재 건물의 기단 앞에는 물을 담아 수련 등을 키우는 돌로 만든 연못, 화재를 대비하여 물을 담아 두는 [두멍]이 배치되어 있다. [두멍]은 물을 많이 담아 두고 쓰는 큰 가마나 독을 말한다.

 

□ 오운정(五雲亭)과 미남불(美男佛)

침류각 관람을 마치고 오운정과 미남불을 찾아 나선다. 대통령 관저를 내려 보며 아스팔트로 포장된 오르막 길을 한참 오르는데 도무지 시설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길의 연속이다. 길을 잘못 들었나 의심하며 한 걸음 더 나서니 오운정의 지붕이 살짝 보인다. 철조망 철문을 통과하여 돌 계단을 오르내리니 오운정의 뒤편에 도달한다. 조그마한 정자인데 문을 걸어 잠거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오운각.png

1989년 청와대 대통령 관저 신축 시 이전, 경복궁 후원에 지었던 오운각의 이름을 딴 건물이다.

오운정에서 왼쪽으로 난 조그마한 길로 나서면 바로 미남불(美男佛)이 보존되어 있는 장소에 도달한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 方形臺座 石造如來坐像-보물 제1977호)다.

한국 불교조각 중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석굴암 보존상을 계승하여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 자비로운 얼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 풍부한 양감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미남불’로도 불렸다.

미남불.png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총독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끼고 다녔던 유명한 불상이라고 아내가 귀띔해 준다. 

이제 여민관과 춘추관 관람을 마치면 설레는 마음을 갖고 시작한 청와대 관람은 끝난다. 미남불에서 다시 오운정쪽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오면 대통령 관저로 내려가는 내리막 계단길을 만난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대통령 관저 앞에 이른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여민관과 춘추관을 만난다.

 

□ 대통령 비서실 – 여민관

대통령비서실은 여민1·2·3관으로 이뤄져 있다. 여민은 ‘여민고락(與民苦樂)’에서 따온 이름으로 ‘대통령과 비서진들이 국민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곳’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민1관은 2004년에 완공됐으며 2관(구 신관) 및 3관(구 동 별관)은 각각 1969년, 1972년에 건립됐다. 여민1관에는 대통령 간이집무실 등의 주요시설이 위치했으며 에너지 절약을 위해 외 단열 시스템을 적용해 건립됐다.

여민관은 녹지원과 연결되어 있다. 녹지원 남쪽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특별한 한옥 냄새가 나지 않는 일반적인 상업건물과 같다. 대통령 관저에서 춘추관을 향해 내려오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 3동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일하는 비서관들이 본관이나 상춘재 또는 영빈관으로 가려면 상당한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어떤 교통수단을 사용했을 지 궁금하다. 골프 카트가 가끔 보이는데 혹시???

IMG_6658 여민관.jpg

녹지원과 바로 접한 여민관의 모습이다.  정문 옆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가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심은 기념식수다.

대통령 관저에서 춘추관 쪽으로 내려오다가 대통령 헬기장 못 미쳐 여민관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최규하 전 대통령 부부의 기념식수를 볼 수 있다. 독일 가문비나무인데 1980년 4월 11일에 식수하셨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한달 여 전인데 정국이 불안하던 시절 최규하 대통령 내외분은 어떤 심정으로 이 나무를 심으셨을까 그 때의 대통령 내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IMG_6679.jpg

IMG_6677.jpg

                                                                최규하 전 대통령 내외분의 기념식수 표지석

 

□ 춘추관(春秋館)

1990년에 완공된 춘추관은 대통령의 기자 회견 장소와 출입 기자들의 기사 송고실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 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 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됐다. 춘추관은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게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이 깃들여져 있다.

IMG_6686춘추관.jpg

춘추관 앞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분의 기념식수가 있다. 위 사진의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소나무가 그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는 찾지 못했다. 사전에 공부하고 가지 않아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춘추관을 나와 청와대 앞 길에 서니 예전에 경기중학교 시절 청와대길을 넘어 등교하던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는 경복궁 담이 훨씬 더 높아 보였는데 지금도 높아 보인다. 당시 경무대 철 담장도 어마 무시했다. 길도 더 넓었던 것 같은데 옛날 일이라 아득하다. 길 한복판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IMG_6693.jpg

삼청동 먹자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효자동 쪽으로 걸어서 예전에 살던 집을 보러 가고 싶었는데 아내가 너무 멀다고 삼청동으로 가자고 한다. 삼청동 총리공관 앞에 이르러서 그 유명한 수제비 집 앞을 지나는데 아직 초저녁인데 초만원이다. 삼청동 먹자골목이 예전과 다르다. 음식점들을 찾을 수 없고 카페와 기념품집들이 대부분이다. 예전에 들렸던 집들을 다시 찾아 나섰는데 온데간데 없다. 코로나 사태로 전업하거나 폐업한 모양이다.

음식점을 찾아 삼청동 거리를 헤매다가 ‘54년 만에 국민 품으로 완전개방’한 북악산[백악산] 한양도성 탐방로 입구를 발견했다. 그동안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통제구역인 청와대 뒷길 백악정으로 오르는 입구이다.

IMG_6695.jpg

북악산[백악산] 한양도성 탐방로 입구이다. 삼청동 금융연수원 맞은편이다. 백악정-만세동방-청운대 쉼터-청운대-북악산-창의문으로 내려가는 코스와 청운대 쉼터-곡장-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와룡공원-명륜3가 버스 종점으로 갈 수도 있다.

옛날 수도육군병원 후문 앞 국수집으로 향한다. 음식점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간장게장으로 유명했던 ‘큰 기와집’으로 향하는데 그 집도 온데간데 없다. 카페로 변했다. 다시 옛날 경기고등학교 앞을 지나 재동국민학교 사거리까지 왔다. 예전에 공간건축에 다닐 때 자주 갔던 집 ‘한뫼촌’으로 들어갔다. 한정식으로 재동 일대에서 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진 집이다. 음식 맛도 깔끔하고 맛깔지다. 막걸리도 시켰다. 배가 불러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먹었다. 오늘 약 10km, 15,900보를 걸었다. 지하철 경노석에 앉으니 프로야구 경기가 궁금해졌다. 집에 도착하니 밤 9시다. 오후 1시에 집을 나서서 약 8시간 만에 들아 온 것이다. 운동 한번 잘 했다. 즐거운 하루였으나 뒷 맛은 개운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