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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출처 https://mnews.joins.com/article/24010867#home

백석을 연모한 ‘엘리트 기생’ 자야, 시처럼 슴슴한 밥상 즐겨

중앙선데이 2021.03.13 00:02 727호 26면 지면보기

예술가의 한끼

백석을 연모한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기생명 김진향). [사진 문학동네]

백석을 연모한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기생명 김진향). [사진 문학동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백석의 시 ‘국수’ 중에서) 시 한 줄로 오감을 깨워 지붕에 마당에 함박눈이 내리게 하고 국수 육수 냄새를 풍겨 늦은 밤 허기를 느끼게 했던 시인 백석(1912~1996). 대원각을 시주할 때, 천억원을 준대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한마디 말로 그에 대한 존경과 연모의 심경을 압축한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1916~1999).
 

조선권번서 하규일에게 정가 배워
함흥서 백석 만나 짧고 깊은 사랑

성북동 대원각 주인 돼 큰돈 모아
법정스님에게 시주, 길상사 열어

정마리 등에게 조선 가곡 맥 전수
육회·물김치 즐기고 샌드위치 후식

백석, 이백의 시 떠올려 ‘자야’ 이름 줘
 

백석을 연모한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기생명 김진향). [사진 문학동네]

백석을 연모한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기생명 김진향). [사진 문학동네]

자야는 그가 평생 살뜰히 가꾸어 온 서울 성북동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다. 당시 시가로 천억원에 달하는 큰 재산이었다. 1997년 욕망의 공간 대원각은 수행의 도량 길상사가 됐다.
 
서울 출생의 자야는 조선권번을 다녔다.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으로는 이왕직의 아악부에서 정가 즉, 시조, 가사, 가곡을 강의한 하규일(1867~1937)이 있었다. 하규일의 양녀가 된 자야는 조선권번에서 3년간 정가를 비롯하여 여러 장르의 가무를 배웠다. 특히 춘앵무에 능했다.

 

백석. [사진 문학동네]

백석. [사진 문학동네]

자야는 자신을 아끼던 신윤국(신현모, 1894∼1975)의 후원으로 1935년 도쿄로 건너가 공부를 한다. 향학의 시간은 짧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신윤국이 투옥됐다는 뉴스를 듣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해 12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에는 인사동의 조선권번 소속 김진향(자야의 기생명)이 종로경찰서를 찾아와 불우이웃을 위해 일주일간 번 화대 65원 42전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신문의 하단 광고에 나오는 해군 단화 최고급품의 가격 2원 10전과 비교하면 자야가 쾌척한 금액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자야의 따뜻한 마음이 서울의 겨울을 살짝 녹여 주었다.
 
이듬해 자야는 투옥된 신윤국을 면회하러 함흥으로 갔으나 만남은 무산됐다. 그 길로 함흥에 눌러앉게 된 자야는 그해 가을 요릿집 함흥관 연회에서 백석을 만나게 된다. 영생고보 교사들의 회식자리에 영어교사인 백석이 나타났다. 청춘의 백석과 자야는 서로 깊고 긴 눈길을 주고받았다. 백석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떠올려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이쁜 이름을 주었다.
 
해방이 됐고 전쟁이 지나갔다. 남북이 다시 갈렸다. 백석은 북으로 갔다. 그리고 남에서는 잊힌 시인이 되었다. 자야에게는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 삼천리문학에 수필이 실릴 정도의 실력을 갖춘 엘리트 기생이었다. 문학의 꿈을 놓치지 않았던 자야는 1953년 만학도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자야는 성북동 골짜기 대원각의 주인이 돼 큰 재산을 모았다.

 

자야는 조선 가곡의 맥을 정마리(사진) 등 후배들에게 전했다. [사진 문학동네]

자야는 조선 가곡의 맥을 정마리(사진) 등 후배들에게 전했다. [사진 문학동네] 

(전달자 주: 정마리는 지리산 화개(경남 하동)에 사는 59동창 정재건의 둘째따님입니다.)

1980년대가 되자 자야는 바빠졌다. 1987년에 백석을 비롯한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됐다.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백석의 북방 사투리 시어들과 그와의 옛 인연을 새삼 끄집어내어야 했다. 한편 조선 가곡의 맥을 이어 나가기 위해 서울대 국악과 김정자(1942~2014) 교수가 최수옥과 함께 자야를 찾아와 가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두 가야금이 전공이었다. 김정자와 최수옥은 자야의 가곡을 채보하여 1990년 김진향 전창 하규일제 여창가곡 악보집을 냈다. 자야와 한명희 등 국악계 인사들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조선의 전통가곡의 맥을 잇고 중흥시킨 하규일의 제자라는 의식과 자부심이 강했다. 자신이 국악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기도 했다.
 
자야는 서울대 국악과에 금하 하규일 장학금을 내놓았다. 장학금의 지급대상은 가곡 전공자로 한정했다. 하동 화계 지리산 골짜기에서 태어나 자란 정마리가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한 건 1993년. 마침 그녀는 국악과 재학생 중에서 유일무이한 가곡 전공 학생이었다. 정마리는 졸업 때까지 금하 하규일 장학금을 받았다. 김정자는 신입생 정마리를 자야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야에게서 가곡을 배우게 했다.

 

자야가 기부한 서울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 [사진 문학동네]

자야가 기부한 서울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 [사진 문학동네]

자야의 거처는 동부이촌동의 고층 아파트인 빌라맨션 2층이었다. 70평쯤 되는 넓은 공간이었다. 김정자, 최수옥, 정마리 등 3인은 매주 토요일 자야의 아파트로 가서 2시간씩 자야로부터 가곡 수업을 받았다. 정마리는 1998년부터 1년간 한 달에 일주일은 자야의 아파트에서 침식을 하며 집중적으로 가곡을 배웠다. 손녀뻘 제자가 올 때마다 침소에 빳빳하게 풀을 먹인 새 이불을 넣어 줬다. 잠자리에 들면 새 이불이 사각거리며 풋풋한 풀냄새가 났다.
 
이 무렵 자야는 이미 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소리명창은 과거지사가 되었지만 귀명창은 여전했다. 큰 배포의 자야에게는 비록 소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소리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우선 자세부터 교정해 주었다. 허리를 쭈욱 펴서 연주가의 몸이 크게 보이게 했다. 정가는 궁중음악과 민간의 상류층 음악이다. 그런 만큼 감정을 억제하고 불러야 한다. 자야의 가르침은 이와 정반대로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부를 것을 원했다.
 
제자는 스승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해야 한다. 소리를 낼 수 없는 스승도, 스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제자도 사정이 딱할 수밖에 없었다. 말로 설명하는 소리의 정체를 짐작하고 이 소리 저 소리를 눈치껏 바꿔 가며 내어야만 했다. 힘든 수업이었다. 끝없이 반복하다 보면 드디어 귀명창 자야가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가 있었다. 자야의 입에서 기쁨의 한마디가 터졌다. ‘댓츠 라이트’(That’s right ·옳지). 더 만족한 소리가 나올 때는 몹시 흥분하며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이그잭틀리 왓 아이 세드’(Exactly, what I said·바로 그거야)를 외쳤다. 자야는 영문과 출신답게 모든 감탄사를 영어로 했다. 귀명창이 원하지 않는 소리를 내면 몹시 화난 표정으로 ‘아이 헤이트 댓’(I hate that · 그게 뭐야) 하며 손사래를 쳤다.

 

자야가 기부한 서울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은 길상사(사진)가 됐다. [중앙포토]

자야가 기부한 서울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은 길상사(사진)가 됐다. [중앙포토]

1년에 한두 번은 동부이촌동 아파트에서 예전에 함께 일을 했던 여성 동료들의 모임이 있었다. 나이가 들었으나 하나같이 차림이 화려하고 몸가짐이 단정했다. 전을 부치는 등 맛있는 음식들을 장만해 잔치를 시작했다. 정마리가 정가를 연주했다. 자야는 제자 정마리의 소리가 겉청보다는 속청이 곱게 나는 소리라고 자랑했다.
 
자야는 체격이 컸다. 식욕도 왕성했다. 밥과 반찬은 놋쇠 반상기에 담겨 나왔다. 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놋쇠였다. 아파트에는 살림을 맡은 여성이 있었지만 상차림은 두세 가지의 나물, 김치, 시래깃국 등으로 늘 소박했다. 작은 반찬 그릇에 거의 매일 육회가 담겼다는 게 특이했다. 밥상 위에 지글거리거나 냄새를 피우는 음식은 놓이지 않았다. 약간 차갑다 싶을 정도로 정갈한 상차림이었다. 김치는 서울식으로 슴슴했다. 여름이면 시원한 열무 물김치가 자주 상 위에 올라왔는데 소리를 하고 나서 말라 버린 목을 적시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소박한 식사가 양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식사를 하고 나서도 기어코 후식으로 샌드위치를 하나 더 먹었다. 그리고 낮잠을 잤다.
 
37세에 영문과 나와 수필 쓰기도  
 
자야는 대원각 시주에 이어 카이스트(KAIST)에도 122억원을 기증했다.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기증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10대의 기생 시절에도 이웃을 위해 큰돈을 쾌척하던 자야의 꾸준한 모습이었다.
 
1999년 자야가 세상을 뜨자 화장을 해 길상사 경내에 산골했다. 세월의 비바람에 씻겨 자야의 생전의 흔적은 어디에고 없다. 길상사에 자야의 영정, 공덕비, 사당이 있고 백석의 기념비가 서 있지만 무상할 뿐이다. 대신 카이스트의 공학도, 백석의 후배 문학가들 등 자야와의 인연들은 여기저기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자야의 제자 정마리는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정가, 오리지널 그레고리안 찬트, 정가화한 그레고리언 찬트를 공연하고 있다. 미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정가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자야와 백석의 인연의 강도를 두고 말들이 많다. 슴슴한 김치, 슴슴한 국수처럼 이 세상에 수수하고 슴슴한데도 가늘고 길게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란 게 있다면 그건 자야와 백석의 몫일 게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 이항 2021.03.19 09:04
    자야로부터 가곡을 배운 서울대 국악과 학생 정마리는 정재건 동문의 따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