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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1 16:55

육도윤회

조회 수 109 추천 수 0 댓글 1

친한 사람끼리는 종교얘기는 하지말라고 하는 것이 나중에는 꼭 싸우는 후유증 때문이겠지.

육도윤회하면 불교얘기인데 우리동기중에는 유명한 목사도 많고 기독교에 해박한 신학자도 

독실한 신자도 유독히 많다고 생각이 드는구만.특히 머리좋은 화공과출신에 박인석목사 원자력과에 이철용목사

신학자급에는 화공과에 박진용 신학박사급에 안경덕 독실한 장로급에 이한륭 아또 몇년 째 천주교성지를 꾸준하게

참배하며 순교하신 분들을 소개하고 있는 한기호등등 머리 좋으면 하나님의 소명의식에도 먼저 반응하는지

어느때는 부럽기도 하더라고.

각설하고 새삼스럽게 왜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인고 하니 어느 드라마에서 어린애가

동생이 병들어 죽자 어른처럼 이렇게 얘기하더라고. '그래 죽으면 아프지 않으니 좋겠지'.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게 아니야.죽어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죽어서도 육도를 윤회 하는데

그것이 모두 고통이라고.삼법인에서 말하는 일체개고 세상만사 일체가 고통이라고.그러니

죽지못해 사는 것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 죽어도 마찬가지니까.

자 그러면 이고통을 끊는 방법이 있기는 있는 것이냐.있다고,살아 있을때 해탈하면 된다고.

해탈?무엇이 해탈인 것이여.내가 꾸준히 책을 보고 생각도 해가면서 내린 결론은

쇼펜하우어의 염세론,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의 무화사상, 불교의 공사상, 노자의 무사상, 심리학에서의 무신경,

일상사에서의 무관심,생각없이 통크게 손익따지지 않고 슬퍼도 기뻐도 그저 허허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하네.

아니면 아주 작은 일에도 온신경을 다해서 몰두하여 그시간에 자신마저 잃는 것.

아참 또 있다. 쇼펜하우어가 그 유명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세계'에서 이렇게 썼지.

돌이 높은 곳에서 낮은데로 굴러가는데 돌이 하는 말이 이건 내가 굴러가고 싶어서 굴러 가는거야.

모든 자연현상을 이렇게 자연자신의 의지로 해석하면서 경이로워지는 것.불교에서의 자비사상

남을 위해서 나를 버리는 것,기독교에서의 사랑,남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해탈이 아닐까.

코로나바이러스같은 미물에도 꼼짝못하는 인생을 안타까워하면서  무더운 여름 마음으로나마 해탈합시다.

 

 

 

  • 구달 2022.05.04 07:36
    남각선사, 내가 이 글을 1년이 지나도록 읽지 못했다니 내 게으름 탓이리오. 참 좋은 글이네. 박진용에게 신학자급의 예우를 베풀어 주시니 정말 큰 영광일세. 나는 옛날식 캐톨릭 집안에 태어나 자라면서 종교와 신앙에 관하여 아마도 느끼는 바가 참 많았다는 생각일세. 그건 그렇고.. 혹시라도 "기억과 욕망의 교차, Mixing memory and desire" 를 cruelest 라 한 T. S. Eliot 의 말에 흥미가 있으면 글 한 수 집옥재에 올려주면 고맙겠습니다. 박진용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