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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komedi.com/1356801/의사들이-등잔·골동품-수집해-기부한-까닭/

의사들이 등잔·문화재 수집해 기부한 까닭?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⑱문화재·유물 지킨 의사

에디터

 

영국박물관(대영박물관)은 1759년 내과의사 한스 슬론 경의 기증품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독일 젠켄베르크 자연사박물관은 1821년 내과의사 요한 크리스티앙 젠켄베르크 박사의 개인 수집품에서 비롯됐다. 서구의 귀족 의사처럼 거대한 부를 투자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나라 의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박물·전시 문화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이들은 민족의 문화재와 유물을 모으고 이를 기부해서 전시문화를 통해 국민의 정신을 살찌우게 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의사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우리 사회의 지성인으로서의 의무감을 가졌기 때문에 문화재와 유물에도 열정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수원 등잔박사’ 김동휘(1918~ 2011)는 경기도 수원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에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함경남도 원산(현 북한의 강원도)의 구세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하다가 월남, 고향인 수원의 경기도수원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에게 강제 징집돼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다시 국군에 소속돼 군의관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전역했고, 이듬해 수원에서 보구산부인과를 개원했다.

김동휘는 환갑이 넘어서까지 환자를 돌보면서도 수원지역의 문화에 관심을 두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사람과 생활문화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는 등잔을 비롯한 유물들을 모았고, 물려받은 물품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특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등잔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 밤 생활의 지킴이었다. 등잔 아래에서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매개이기도 했다.

김동휘는 틈나는 대로 서울 인사동과 황학동 등에 가서 고물상을 뒤졌다. 1971년 수원여성회관에서 등잔 전시회를 했는데 동양방송(TBC) 아침 생방송에 초청되기도 했다. 그는 병원 2층에 등잔 전시실을 마련했으며, 1978년에는 300여 점의 등잔을 전시했다. 1991년 롯데월드 민속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기간을 두 달 연장했을 만큼 관람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전시회 이름을 정할 때 등잔 대신 ‘고등기(古燈器),’ ‘옛 불 그릇’ 등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가 아꼈던 고고학자 김병모 전 한국전통문화대 총장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등장이라는 이름으로 했다.

1990년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을 입법하자, 김동휘는 개인이 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음을 알고 그 동안 수집한 물품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볼 수 있도록 등잔박물관을 설립할 마음을 굳혔다. 이듬해 병원 건물을 팔았고, 매도 자금 전액을 투입하여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박물관을 건립했다. 1997년에 문을 연 등잔박물관관에는 800여 점의 유물이 소장됐는데, 그 중 반쯤이 등잔이었다.

김동휘는 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수원문화원 창립의 주역이며 한국예총 수원지부 창립을 이끌었고 예총 경기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또 대한민국 사진대전 초대작가로, 국전에서 연속하여 4년 수상한 원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촬영하여 ‘인간가족전‘이라는 제목으로 사진 전시를 하였다. 1980년대 말에 수원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를 설립하여 위원장으로서 화성 복원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 2003년에 복원공사가 완료됐다.

경주국립박물관에 가면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이양선(1916~1999)은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전(연세대 의대)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그는 평양기독병원에서 이비인후과 수련을 받고 1947년부터 평양시립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녘으로 내려와 대구에 정착했다. 그는 경북대 의대 강사로 임용됐고, 의대 교수 겸 부속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81년 정년퇴임했다. 이양선은 의사로서 진료와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도,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고 수집에 열과 성을 다 했다.

이양선은 대구에 정착하면서부터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수집했는데 그림, 도자기 등 미술품과 아울러 매장문화재에 크게 관심을 두었다. 그는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평생 문화재를 수집하여 1985년부터 2년 간 여러 차례 경주박물관에 기증했기에 별관 신라미술관에는 그의 호를 딴 ‘국은(菊隱) 기념실’이 마련돼 있다. 이양선이 수집해 기증한 것은 금속제품, 옥선제품, 토기, 골각제품 등 총 666점이다. 그가 아끼는 가야유물인 말을 탄 무사모양 뿔잔(국보275호)을 비롯하여 경주 주변의 청동기일관 유물, 도가니 와질토기, 기와틀, 청동에 옻을 칠한 발걸이(국보1151호), 오리모양 토기 등 우리나라 고고학과 미술사에 핵심적인 자료가 많다.

이양선은 경북대 의대 교수 재직 시 대한이비인후과학회 회장을 비롯, 이비인후과 학회의 여러 중책을 맡아 활약했으며 정년퇴임 후 대구가톨릭의대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를 지냈다. 1992년 퇴임 후 작고할 때까지 이양선 이비인후과를 개설하여 환자를 진료했다.

그의 수집문화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잘 보존돼 있으며, 박물관은 1987년 ‘국은 이양선 수집문화재 도록’을 편저해 출간했다. 국은 기념실의 안내문에는 이양선의 평소 소신이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는 재화적인 가치로만 생각할 수 없으며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유산이다. 이를 영구히 보존·연구하여 민족의 전통과 예지를 여기에서 찾아내야 한다.”

 

에디터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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