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봄가을 하루씩 교실에서 ‘구수한 냄새’ 진동한 까닭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㉑‘기생충 후진국’ 탈출

      1970년대 초등학교에서 기생충 검사결과가 나온 날 학생들이 교단 앞으로 나와 약을 먹고 있다.

1970, 80년대 생활의 큰 변화 중 하나가 기생충 감염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농어촌 주민이 도시 인구보다 훨씬 많던 때에 대부분 국민이 기생충에 감염되므로 봄과 가을에 기생충 약을 복용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인분을 채소에 비료로 주었기에 기생충 알을 자연스럽게 음식과 함께 먹게 되었던 것이다.

1964년 세브란스의전 출신으로 ‘농촌의학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영춘 박사를 초대 회장으로 사단법인 한국기생충박멸협회가 창립됐다. 기생충박멸협회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와 함께 전국 단위의 조사사업을 펼쳤고 집단 검진과 집단 투약을 주도했다. 한국일보사와 ‘회충 0% 달성 10년 운동’을 공동 추진하기도 했다.

                   기생충박멸협회의 회의. ‘회충 0% 달성 10년 운동!’ 표어가 눈에 띈다.

협회에서는 매년 전국 수백 만 명의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봄과 가을에 대변검사를 실시했다. 당시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어서 변소나 뒷간 바닥에 변을 보고 신문지나 종이에 대변을 받았다가 학교에서 나눠주는 채변봉투에 담아서 제출했는데, 채변봉투를 갖고 오지 못하면 혼이 났다. 이 때문에 일부 학생은 변을 나누기도 해서 그날은 교실에서 ‘향긋한 냄새’가 진동했다.

한두 달 뒤 검사결과가 나오면 기생충이 있는 아이들은 교단 앞으로 불려나와 약을 먹어야만 했다. 아침에 변을 못 봐서 개똥을 대신 넣었다가 온갖 기생충이 검출돼 망신을 당한 학생도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내과 의사가 기생충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배가 아프면 기생충 탓이라고 여기는 것이 당연시되기도 했다.

기생충박멸협회는 1986년 사단법인 한국건강관리협회로 전환되었다. 건강관리협회는 건강검진을 하는 기관으로 현재 전국 11개 시도지부에서 건강검진의원 ‘메디체크’를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의 가족계획국제협력재단은 일본기생충예방회, 대만의 중화민국위생보건기금회는 기생충방치회에서 비롯됐다.

왜 기생충박멸협회가 건강관리협회로 바뀌었을까? 기생충 감염률이 대폭 감소되었기 때문이었다. 1971년 기생충 감염률은 무려 84.3%여서 ‘기생충 후진국’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지만(기생충박멸협회가 활동을 전개하기 전인 1960년대에는 거의 전 국민이 기생충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크다), 1976년 63%, 1981년 41%였다가 1986년 12.9%, 1997년 2.4%까지 급격히 감소했다.

보건사회부와 기생충박멸협회의 기여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인분비료가 자연스레 화학비료로 전환돼 기생충 감염이 차단된 것도 큰 원인이다. 우리나라가 1980년부터 공업국가로 되면서 농촌의 인구가 감소하고, 농어촌에서도 화장실 개선을 하였기에 농촌에서 인분비료를 확보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화학비료 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된 것이 기생충감염률을 감소시킨 기본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