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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7 16:59

안나푸르나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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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잊지 못할 추억 몇 개를 가지고 삽니다.
그것이 슬픈 것이든 기쁜 것이든 시도 때도 없이 과거를 소환합니다.
天谷 박인순에게도 몇 개의 추억이 떠올라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합니다.
슬픈 추억은 가슴 아프게 하며 때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그러나 기쁜 추억은 저절로 입꼬리를 올리게 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追憶은 때를 가리지 않고 過去를 召喚한다

천곡에게는 그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히말라야 山麓 중에 아름답고 푸근한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nnapurna Base Camp-해발 4,130미터)를 다녀온 추억입니다.
2006년 3월28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4월10일 카트만두 공항을 이륙하여 방콕에 도착한 13박14일의 여정이었습니다.
2005년 안녹영 동기가 '배낭을 메고 홀로 떠난 60일간의 인도여행' 紀行文을 59회 회보 제37호(2005년 12월6일 발행)에 게재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여러 명의 玉友들이 안나푸르나를 다녀 왔습니다.

 

2006년에 김기택(이충구 친구), 박인순, 이충구, 정병호 4명이 다녀 온 것을 시작으로

2007년에 노병선, 박인순, 정병호, 정신모 4명이 안나푸르나 산록을 끼고 한바퀴 도는 Annapurna Circuit Trekking을 시도했고 이충구와 그의 친구인 김기택은 랑탕계곡을 탐방했습니다.

2010년에는 김해강 부부, 이동욱, 정병호, 한부영 부부 등 6명이 안나푸르나를 탐방하고

2013년에는 김대진, 백언빈, 송영문, 유의선, 이한륭, 정병호, 최상민, 한부영 등 무려 8명에 정병호의 손자까지 끼어서 총 9명의 대규모 탐방단이 그 곳을 다녀 왔습니다.

2013년 탐방을 끝으로 더 이상 玉友 친구들의 안나푸르나 탐방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2013년 이후 꼭 10년이 되는 금년 2023년에 우천 정병호의 提案에 따라 안나푸르나를 다녀 온 친구 12명이 3월18일(토) 오후 5시 광화문의 인도 네팔 음식 전문점에 모여 식사를 하며 그날의 감회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산속에서 먹었던 음식 ‘달밧(Dal Bhat and vegetable-130루피)’과는 다르지만 네팔 음식을 주문하고 커다랗게 구워 나오는 빵을 먹으며 그 당시 武勇談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멋진 추억이자 비슷한 감동을 느낀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談笑하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연인원 20명의 옥우들이 안나푸르나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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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푸르나를 마지막으로 다녀 온 2013년 이후 꼭 10년이 되었다고 그곳을 다녀온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023년 3월 18일...
 

천곡 일행은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2006년 당시 네팔의 國內事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 네팔의 국내 사회 동향은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王政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요구할 때였으며 이 틈을 노리고 모택동(毛澤東)을 신봉하는 '마오이스트'들이 정부군과 對峙하며 政權奪取를 試圖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디펜드라 왕세자의 총격으로 왕과 왕비 등 왕족 10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국왕으로 즉위하고,
2002년 10월 갸넨드라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2005년 2월 정부해산, 비상사태 선포, 정당지도자들을 투옥하고 국왕의 친정체제로 전환했습니다.
2006년 1월 19일부터 야당이 국왕 하야 요구하며 민주화 시위,
           1월21일 정부군과 반군 총격전으로 23명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2월8일 야당이 거부한 가운데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천곡일행이 네팔로 떠나겠다고 나섰으니 주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주 네팔 대사관과 연락하며 정세를 파악했고 현지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통해 현지사정을 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대체적인 반응은 '관광객은 안전하다' 였습니다. 인터넷 뉴스를 수시로 열어 보면서 천곡 일행은 최종적으로 '가자'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네팔의 국내사정은 민주화 시위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안녹영 동기는 혼자 다녀왔지만 천곡은 여럿이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마침 우천 정병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천 정병호와 意氣投合하여 '隊員募集'을 의논했습니다.
정원 4명이 가장 적절한 숫자라는데 서로 동의했습니다. 무엇보다 제일 긴 시간 묵어야 할 안나푸르나 山中 宿所가 2인1조가 돼야 편리하다는 정보에 따른 것입니다. 6명이나 8명이 되면 너무 많아 핸드링하기가 불편합니다. 의사 결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고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할 때 불편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서로 감정이 상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고천 이충구 동기가 포섭대상 제1호로 지목되었습니다. 의견을 묻기가 무섭게 "같이 가자"로 답이 나왔습니다. 우천과 천곡은 옥우산우회 멤버로 정기적으로 산행을 해 온 터라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있었지만 고천의 경우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몇 주 동안 부지런히 청계산을 오르며 체력 단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고천으로부터 친구 한 명을 소개받았습니다. 고천의 고향 친구인 심천 김기택이었습니다. 상견례 겸해서 식사를 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좋은 친구였습니다. 첫 대면부터 유모어 감각이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산 속에서 그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환상의 4인조가 편성되어ㅆ습니다.
천곡 박인순: 총대장 겸 기획담당
심천 김기택: 안전 및 진행 담당
우천 정병호: 총무 및 재무 담당
고천 이충구: 무임소 담당 겸 지원 담당

환상의 4인조가 편성되다.

준비물 리스트를 작성해서 일일이 체크하면서 꼼꼼히 챙겼습니다. 여행일정도 작성하고 하루에 걸을 거리와 소요시간, 숙소의 위치 등 산속에서 생활하는 요령과 특히 '고산증세' 대처 방법에 대한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하고 '비아그라'를 구매했습니다. 
출발 준비 완료!!!

2006년 3월 28일 오전 9시 5분 아시아나 OZ-721편은 홍콩을 향해 인천을 이륙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행기에 고천 이충구가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인천공항에 늦게 도착한 것도 아니고 일행과 Asiana VIP Room에서 차도 마시고 환담한 후 함께  게이트로 이동 중 옛 직장 동료를 반갑게 만나 이야기 꽃을 피우다 게이트에 늦게 도착해 비행기를 놓쳤습니다. 여러 차례 방송도 하고 우천 정병호가 전화도 했지만 끝내 문은 닫히고 이충구 짐도 내려놓고 비행기는 야속하게 인천공항을 이륙했습니다. 3명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말이 없었습니다. 이륙 후 1시간쯤 지날 무렵 아시아나 기내 사무장이 쪽지 하나를 천곡에게 전했습니다. 이충구가 CPA-417편으로 홍콩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순간 3명은 주변 승객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며 하이 파이브를 했습니다.

20060328-쪽지(아시아나항공 여객전무 전달)0001.jpg

아시아나 기내 사무장이 천곡에게 건네 중 쪽지... 그것에는 고천 이충구가 홍콩으로 비행하고 있다는 낭보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심천 김기택은 이런 경우 항공사 직원들은 "쥐 잡는다"고 한단다. 졸지에 이충구가 '쥐'가 된 셈이다. ㅋㅋㅋ

고천 이충구가 아시아나 공항 지상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조금 늦게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Cathay Pacific 417 편으로 홍콩에 도착하여 일행과 재회했습니다. 홍콩공항에서 카트만두로 들어가는 비행기 탑승시간이 3시간 25분이나 여유가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천공항 출발 시간은 당초 9시 20분이었습니다. 출발 며칠 전 출발시간이 9시5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책임지고 있던 천곡은 고천을 비롯한 대원들에게 이메일로 변경사실을 통보했는데 유독 고천만 예전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천공항에서 옛 직장동료와 담소를 마치고 9시 20분 출발 시간에 맞춰 게이트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떠나고 없어서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고천 말에 따르면 비서가 변경시간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거나 고천과 천곡이 서로 미안하다며 사과함으로써 사건은 종말 되었습니다.

고천이 친구들에게 잠시나마 걱정을 끼치게 해서 미안하다며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해후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라운지로 나와 산악인 박영석씨를 만났습니다. 기념사진도 찍고 그와 잠시 담소를 나누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사고로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의 가슴속에 묻혔습니다.

이충구 인천공항에서 홍콩 비행기를 놓치다.

사건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예약한 호텔에 旅裝을 풀고 저녁 식사 후 간단히 맥주 한 잔하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까페를 나서다가 우천 정병호가 맨홀 뚜껑을 잘못 밟아 발목이 꺾이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천곡이 보기에는 심한 부상이었는데 우천은 괜찮다고 일행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호텔에 돌아와 보니 벌겋게 부어 있었습니다. 통증이 심한 듯 보였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우선 自家 治療하기 위해 천곡이 남대문 도깨비 시장에서 구매한 痛症緩和 크림 한 통을 건네고 바르도록 했습니다. 조금 연기하느냐 아니면 우천을 抛棄시키느냐 아니면 모른 척 강행하느냐… 다음날 아침 우천에게 물었습니다. 밤새 통증으로 고생한 흔적이 歷歷했습니다. 본인은 괜찮다고 산행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천곡을 비롯한 일행의 얼굴에는 愁心이 가득합니다. 가 보지 않은 산길이고 더구나 해발 4,000미터를 올라가야 하는 험한 산길인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본격적으로 산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우천이 발목을 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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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만 해도 행복했다. 맥주 맛이 꿀맛이었다. 이 카페에서 나서며 우천이 발목을 크게 다쳤다. 

본인의 의지가 강하니 다른 옵션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습니다. 산중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때 해결하기로 하고 Kathmandu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예약한 Kathmandu발 Pokhara행 Buddha Air 비행기에 우리가 예약한 사실이 없다는 항공사 직원의 말에 숨이 막힐 뻔했습니다. 예약한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며 티켓 STATUS난에 ‘OK’로 적혀 있는 부분을 보여 주었습니다. 후론트 여직원도 아니고 뒤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남자 직원이 끼어들어서 예약된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단 프론트에서 물러나 곰곰이 전략을 짜 보았습니다. 문제의 남자직원이 우리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이것은 남자직원이 우리가 接近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信號로 보였습니다. 다시 그에게 다가가 티켓속에 약간의 後援金(?)을 넣고 건네며 비행기 좌석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살짝 웃으면서… 잠시 후 사무실 안으로 들락날락 하던 친구가 12:00발 비행기 티켓을 들고 나타나 천곡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당초 예약은 10:45분이었는데 12:00발이면 준수합니다. BHA-605…
우천을 비롯한 일행이 천곡의 협상력에 감탄했습니다.

Kathmandu 공항에서 협상력을 발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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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카라 공항에 도착해 현지 코디 일행의 영접을 받았다. 꽃다발과 함께 이마에 붉은 점을 찍었다.

3월30일 아침부터 산행이 시작됐습니다. 포카라(Pokhara 해발 800미터)에서 Naya Pul이라는 마을까지 택시로 약 1시간35분 달려 도착했습니다. 조그마한 택시에 짐도 많고 빨리 달릴 수가 없는 산길이었습니다. Naya Pul(해발 1075) 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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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네팔의 주식 달밧(Dal Bhat and Vegetable)... 130루피(한화 약 1,885원).
네팔 정부는 외국관광객에게 바가지를 방지하기 위해 트레킹 도중 모든 식당에는 정부고시가격을 받도록 했다.


3/30 Pokhara(800)-Naya Pul(1075)-Tirkhedhunga(1540)--- 9km(4.5시간)
3/31 Tirkhedhunga(1540)-Ghorepani(2750)--- 14km(8.5시간)
4/01 Ghorepani(2750)-Poon Hill(3210)-Ghorepani(2750)-Tadapani(2590)--- 13km(10사간, Poon Hill 관광 후 아침식사 시간 포함)
4/02 Tadapani(2590)-Sinuwa(2340)--- 13km(9시간)
4/03 Sinuwa(2340)-Deurali(3150)--- 13km(8.5시간)
4/04 Deurali(3150)-Annapurna Base Camp(4130)--- 9km(7.5시간)              6박7일 오르고

4/05 ABC(4130)-Bamboo(2490)---16km(9시간)
4/06 Bamboo(2490)-Jhinu Danda(1780)--- 12km(8.5시간)
4/07 Jhinu Danda(1780)-Damphus(1650)--- 21km(10시간)
4/08 Dhampus(1650)-Pokhara(800)--- 도보(5km)와 자전거(20km)로 하산                  3박4일 하산했습니다.
모두 합쳐서 순수한 산행은 9박 10일의 여정이었습니다.

트레킹은 910, 운행거리 125km, 트레킹 시간 66시간평균시속 2km.

트레킹 시작 이틀만인 3월31일 Ghorepani(2750)에서 또 다른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알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언제일까 하며 전전긍긍하며 산에 들어섰는데 바로 Ghorepani에서 일어났습니다. 다름 아니라 산 속에 숨어 있는 반정부 마오이스트들이 등산객들로부터 통행료를 징수한다는 정보입니다. 이미 입산 전에 네팔정부에 일인당 입산료 2,000루피를 지불했는데 산속에서 마적들에게 또 통행료를 내야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Ghorepani Snow View Guest House에 check-in하니까 Guest House 주인이 저녁식사 무렵 마오이스트들이 온다고 사전에 알려 주었습니다. 로비로 내려가 테이블에 앉아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는데 마오이스트 한 명이 들어왔습니다. 권총을 차고 있었습니다. 밖을 보니 다른 마오이스트들이 경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일인당 1,200루피를 요구했습니다. 천곡이 협상에 나섰습니다, 원래 이런 경우 겁에 질려 협상이고 무엇이고 달라는 대로 주는 것이 보통인데 천곡은 협상을 하겠다고 덤벼든 것입니다. 천곡의 지론은 정연했습니다. 이미 네팔 정부에 입산료를 공식적으로 지불하고 왔는데 왜 또 당신들에게 입산료를 내야 하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마오이스트의 답변은 그와 다른 異論이었습니다. 현재 네팔은 부패한 왕정으로 국민들이 도탄에 빠져 있어 자기들이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바란다는 취지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政權奪取를 위해 後援金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곡이 바로 逆堤案했습니다. 우리 예산은 1,000루비이니 1,000루피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마오이스트는 1,100루피로 하자고 최종 제안하여 천곡이 수락했습니다. 너무 오래 끌다가 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수증을 두 장 요구했습니다. 일행이 4명이라 앞으로 산행 중에 서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두 명에 한 장씩 소지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흔쾌히 영수증을 두 장 써 주었습니다.

그들이 철수한 이후 Guest House 주인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일이라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마오이스트와 돈을 놓고 흥정하는 모습은 난생 처음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옆 테이블에 있던 이스라엘 여성들도 불만이 가득했지만 결국 돈을 다 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협상한 내용은 모르는 듯했습니다.

마오이스트와 통행료를 협상하여 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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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horepani(2750)에서 마오이스트와 후원금 협상을 마치고 먹은 닭백숙... 천곡이 주방에 들어가
              ​요리법을 주방장에게 교육하여 만들어 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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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horepani(2750)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 새벽 5시에 Poon Hill(3210) 관광에 나섰다. 
            Poon Hill은 히말라야 일출을 볼 수 있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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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다보면 건너게 되는 출렁다리... 그 밑 계곡으로 안나푸르나의 눈이 녹은 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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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van(2505)에서 샤워를 하고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가 얼굴에 나타난다. 웃음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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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006년 4월4일(화) 오후 2시 35분 Annapurna Base Camp(4130)에 도착하여 숙소 식당 벽에 우리의 흔적을 남겼다.

"환갑을 이미 지낸 친구들이 힘을 모아 이곳에 왔습니다.
지난 세월 각자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고,
이제 여유를 갖고 이 커다란 가슴속에 안기고 싶어 왔습니다.
우리를 맞이해 준 히말라야가 고맙습니다.
"드루가", "홈", "돔멜", "몬카지" 들의 도움도 컸다." 라고 쓰고 사진과 함께 벽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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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산 직전 숙소 앞에서 기념촬영... 벅찬 감동을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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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 김기택은 포터들을 교육시켰다. 심천이 Attention"하고 구령을 하면 포터들은 일제히 "충성"하며 거수경례를 하도록 했다.
아침 출발 전 그리고 점심식사 후 출발할 때마다 예외없이 시행했다. 주변 관광객들이 재미있어하며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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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inu Danda(1780) 노천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저녁 식탁에는 닭백숙과 양배추 조림이 올라왔다. 
천곡이 밭에서 양배추를 뽑아 와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볶은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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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의 어린이들 그들에게 사탕을 주어서는 않된다. 양치질을 할 수 없어 치아가 썪기 때문이다.
                 천곡은 준비해간 학용품을 나누어 주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트레킹을 마치고 마지막 숙박지인 Damphus(1650)에 도착하여 안 사실이지만 현재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통행금지 조치였습니다. Damphus에서 날머리 Phedi(1130)까지5km는 도보로, Phedi에서 Pokhara까지는 포장도로 20km이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코스입니다. Pokhara 현지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전거 4대를 올려 보낼 터이니 그것을 타고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화가 된 김에 Pokhara 현지의 분위기를 물었더니 ‘관광객은 통행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 자전거 4대에 나눠 탔습니다. 일부 포터들은 걸어서 내려오겠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오는 길이라 큰 힘이 들지는 않았습니다만 내려오는 도로의 분위기는 험악했습니다. 도처에 정부군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도로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으며 도로 중앙에는 타이어가 검은 연기를 내 뿜으며 타고 있었습니다. 외국관광객은 검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통행금지 계엄령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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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로 20km를 달려 하산했다.

 

무사히 일행 모두 Pokhara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트레킹을 무사히 마친 감동을 나눌 사이도 없이 천곡은 카트만두 경유 방콕으로 무사히 네팔을 탈출할 수 있을까? 나머지 여정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우선 Pokhara에서 Kathmandu까지 비행기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확인했습니다. 확인된 정보는 비행기 일정이 불확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Pokhara 현지 코디에게 비행스케줄을 예약하도록 하고 확인, 재확인을 시켰습니다. 비행기 예약은 확인되었는데 Pokhara 공항까지 가는 방안이 문제였습니다. 비상계엄이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통행이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지 코디에게 경찰서에서 통행증을 발급받아 오도록 했습니다. 짐이 많고 대중교통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공항까지 도보로 움직이려면 포터(Porter)들이 동행해야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경비가 들었습니다. 돈이면 통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지만 당장 Pokhara를 탈출하려면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4월9일 오전 10시40분 비상계엄 당국에서 발행한 현지인 통행증을 가지고 포터들과 함께 호텔을 도보로 나섰습니다. 산중과 달리 도시에는 경비가 더 삼엄했습니다. 기관총을 걸고 군인들이 바리케이드 안에서 집총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포터들은 겁에 질려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천곡이 앞장섰습니다. 가능한 대로를 피해 뒷골목으로 걸으며 50분만에 Pokhara 공항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현지인들은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일행 모두 짐을 메고 들고 낑낑거리며 청사 안으로 들어가 11시30분발 Buddha Airline에 성공적으로 check-in을 마쳤습니다. 곧 출발하겠다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카트만두에서 비행기가 오질 않습니다. 웬일인지 Pokhara 공항에는 외국인 관광객조차 잘 보이질 않습니다. 현지인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습니다. 프론트를 오가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뚜렷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테이블에 담요를 깔았습니다. ‘GO-STOP’판을 벌렸습니다. 공항 내부는 조용하고 한적한데 GO-STOP 치는 소리가 진동합니다. 탁 타타악~~~ GO-STOP 3년 반을 치도록 비행기 온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드디어 오후 3시15분 일행은 비행기에 탑승하고 이륙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 도착 3시간 45분이 흐른 뒤였습니다. 카트만두 공항 인근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가지는 온통 불바다였습니다. 여기저기 검은 여기가 솟아오르고 시내 중심지역은 군중들과 경찰, 군인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포카라 공항에서 고스톱을 치며 비행기를 기다리다

카트만두 공항에 내렸습니다. 짐을 찾고 시내 호텔로 이동해야 하는데 통행 불가였습니다. 택시도 허가를 받은 택시만 공항 출입이 가능하고 엄청난 프리미엄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천곡이 점잖아 보이는 택시 기사 한 사람을 붙들고 그의 장기인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인근 호텔까지 安全하게 갈 수 있는가를 확인했습니다. 두번째는 요금이었습니다. 인근 호텔에는 예약을 하지 않았으니 가도 방이 있을지가 의문이었으며 이 난국에 호텔 예약할 수도 없었습니다. 택시 기사 이야기로는 약 30분 정도의 거리에 좋은 호텔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을 느껴 그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공항을 나서자 마자 큰 길을 놔두고 갓길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왜 그가 갓길로 달리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넓은 길로는 총알이 날라 오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쏘는 지는 모르지만 운전자가 총소리가 날 때마다 자라 머리를 하며 움찔움찔 놀라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긴장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방이 있었습니다. Check-in하자마자 목욕부터 했습니다.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로비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부터 시작해서 점점 진하고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켰습니다. 호텔 로비 레스토랑에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모여 TV로 전해지는 뉴스를 바라보며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사항이 같은지라 대화가 금세 통하며 친해졌습니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마치 험악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의 기분을 느꼈습니다. 내일 카트만두를 떠나 방콕으로 잘 갈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카트만두 공항 인근 호텔에 체크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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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트만두 공항 인근 호텔에 들어 와 로비에서 네델란드 부부와 한국여성을 만났다. 
                   비상계엄 하에서 어떻게 네팔을 탈출하느냐가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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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트만두 공항에서 애타게 탑승수속을 기다리고 있는 일행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4월10일 아침 8시5분 카트만두 공항을 떠나 방콕에 12시경 도착하여 청암 이부영을 만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메시지가 나오질 않습니다. 게이트 입구에 있는 전광판은 아예 꺼져 있었습니다. 공항직원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흐르는데 도무지 안내 방송 하나 하질 않습니다. 대합실에 있는 승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불안한 얼굴로 상대방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정보라도 얻으려고 궁금해했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주조종사가 공항으로 오다가 데모대에 막혀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는 정보가 흘러나왔습니다. 창 밖으로 비행기는 보이는데 비행기를 움직일 주조종사가 없으니 말짱 도루묵입니다. 8시5분 출발 예정이던 RA-401편은 4시간 15분이 지난 12시20분에야 카트만두 공항을 이륙했습니다. 해외 출장을 다니다 보면 비행기 연결을 위해 공항에서 3시간 또는 4시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정시간보다 이렇게 늦게 출발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오후 4시 방콕 공항에 내려 청암 이부영을 만나니 마치 자유세계로 탈출한 망명객 같았습니다.

무사히 네팔 탈출에 성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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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이 따로 없다. 바로 이곳이 천국이다. 방콕에 도착하여 청암 이부영을 만났다. 꿈인가 생시인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山麓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지인들이 히말라야의 女神이라고 부르는 안나푸르나에 다녀온 후 한 동안 동네방네 자랑하며 다녔습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자연스레 사람들이 질문도 했지만 그들이 질문하기 전에 입에서는 벌써 ‘안나푸르나’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나푸르나를 다녀온 후 금년이 꼭 10년째라는 기념으로 친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며 그때의 感懷와 感動을 다시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천곡의 일행은 위에 記述한 것처럼 남들과 조금 다른 경험을 더했고 그 경험이 이렇듯 17년전 追憶을 召喚하게 한 것입니다.

살다 보면 짜증나고 괴로운 일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천곡의 경우는 안나푸르나를 생각하면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밝은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名醫의 處方보다 더 좋은 精神的 補藥입니다. 힘도 솟고 마음도 너그러워집니다. 함께했던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식사도 같이하며 情談을 나누었습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감정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九十을 바라보는 할望九의 나이에 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진정하고 자신을 둘러보면 그 때와 달라진 점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정신만은 멀쩡합니다.

가고 싶다!

 

 

P.S: 2007년 2월 4명의 단원을 꾸려 제2차 탐방을 감행했습니다. 이 스토리는 다음에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