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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극()에서만 살던 이굉일

 

  

여복(女福)을 타고 나, 네 여자의 사랑을 듬뿍 받고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잘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많았단다.

그래서 짧게 살다 가시면서 29개의 직업을 가졌다고 굉일은 말했다.

경영인으로서는 그 젊은 나이에 단성사를 운영했고,

여러 신문에 글을 많이 실었으며, 창작도 했고,

직접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하셨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지만

50년대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굉일의 가슴에 크게 자리하고 있으면서

굉일의 생각과 삶의 방향타를 잡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굉일이 사랑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신 것 같았다.

우리가 흔히 굉일이는 여자 복을 타고 났나 봐.’ 라고 얘기할 때

조용히 앉아 외아들 걱정만 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권용현의 형수가 된 숙자 누님은 굉일이와 그 친구들의 이었다.

우리는 모두 누님을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했고,

누님 역시 우리들을 아랫사람취급하지 않았다.

굉일이 없는 데서는 자기가 동생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슬그머니 공치사하기도 했다.

굉일이 들었다면 거 헛소리 좀 하지 마!” 꽥 내질렀을 것이다.

 

많은 동창들이 아는 바와 같이 누이동생 복자는 오빠의 뒷바라지를 엄청 했다.

집 안의 대들보인 오빠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그리 한 것이다.

 

따뜻하고 다정한 말이라고는 할 줄 몰랐던 굉일이

뒤늦게 만난 부인 또한 조선시대 양반 댁 규방에서 바로 나온 한 숙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지막 날까지 전혀 흔들림 없이 그랬다.

 

  

 이굉일 댁-01.jpg


 

좋아하는 것만 택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고

 

집 밖에서의 굉일은 극과 극만을 살았다.

호불호(好不好)가 뚜렷해서

좋아하는 것에는 몰두했고 싫은 쪽은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중간이란 어중간으로 취급해서 가질 않았다.

 

수학을 잘 해서, 3때 그 어렵던 모의고사에서

최고점을 받기도 했다.

대학 입시에서는 수학을 거의 만점 받았고

영어는 빵점에 가까웠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운동이라면 뭐든지 다 잘 했다.

핸드볼 축구 농구 기계체조 골프 격투기.....

특히 당구는 전국구였다.

 

테니스는 조금 치다 말았다.

왜 테니스장에 안 나오느냐고 묻자

이건 나와 안 맞는 것 같아.” 하는데

그 말은 ‘top 수준에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아예 손대지 않겠다는 말이다.

 

흔치않은 굉(굉장할)만으로도 모자라서 일() 까지

이름에 붙여줬으니, 평범한 짓은 애초부터 인연이 없었나 보다.

 

노래하는 걸 들은 일이 없고, 미술 근처에는 가는 것을 본 일이 없는데,

손 안의 동양 건축이나 서양화는 프로였다.

 

 

냉정한 승부사,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친구

 

장난삼아 벌이던 친구끼리의 포커 판에서는 으레 판돈을 다 쓸었다.

언젠가 황성근의 집에서도 나는 있는 돈을 몽땅 털렸다.

판이 끝나고 내가 차비 좀 다오.’ 하자

가차 없이 안 줘!” 하고는 그대로 가 버렸다.

나중에 그가 말했다.

아무리 친선 게임이지만 승부는 승부야. 최선을 다 해야지.

   재미로 하려면 다시는 하지 마!”

냉정한 승부사인지, 매몰찬 놈인지...

 

언젠가 LA에서 만났는데 손목에 그 유명한 명품시계를 차고 있었다.

인마, 뭐 그런 걸 차고 다녀!’ 퉁을 주니까,

친구야, 부럽니?”

하더니 풀어서 나를 주었다.

내게는 너무 과분해서 가형에게 선물했다.

얼마 후 굉일을 다시 만났을 때

너 왜 그 시계 안 찼어? 짜식 가짜인지 눈치 챘구나.”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 게 진짜 아니었을까생각한다.

승부만 떠나면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녀석이니까.

 

광명인쇄소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사진업으로 자영업도 하고

수출입과 봉재 사업도 했다.

워낙 두뇌 회전이 빨라서 어떤 새 일이라도 바로 전체를 파악했다.

그러고 나니 웬만한 일은 다 시시하게 느껴졌고

보다 힘 든 일, 어려운 일을 찾아 떠났다.

 

 

건강 챙기며 시카고에서 말년을

 

말년은 시카고에서 보냈다.

내 작은 아들이 시카고 살 때라서

미국 가는 길이면 기차 타고 월남인 촌의 굉일네엘 가,

월남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

 

당뇨가 심해서 밥만 먹으면 수치를 재고

조금 높다싶으면 바로 나가서 집 앞의 호수를 몇 바퀴 돌곤 했다.

강석원 오귀순 원종만 윤석정 이삼재가 미국 횡단 X 2 했을 때

굉일을 찾아가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마지막 날들에 뉴욕의 까꾸 강석원이 병상을 찾았고, 유준만과 통화 했다.

상태가 안 좋더라는 석원의 카톡이 오고,

바로 이어서 타계했다고는 소식이 전해졌다.

석원이 다시 시카고로 가서 굉일을 전송했다.

 

굉일아,

우리 떠났다고 섭섭해 하지 마라.

거기 좋은 곳에,

늘 함께 다녔던 변한섭,

마음이 가장 잘 통했던 오승원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

 

<2017. 5. 19. 경기59회보 57호 10쪽~11쪽에 게재된 글이 인쇄과정의 착오로

 '소제목'을 본문에 집어넣어 문맥이 이어지지 않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원문을 실어서 바로잡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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