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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8 12:33

해운대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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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송가(頌歌) 1-5

 

1. 축제

부산 사람들은 부산이 좋은 점을 잘 모른다. 특히 해운대에 주욱 살아온 사람은 해운대의 좋은 점을 모르고 산다. 필자는 유학과 초빙교수 등의 일로 해외에 14년을 살면서 그럭저럭 104개국을 다녀 보았는데 현재의 해운대에서 누릴 수 있는 생활 조건은 세계 어느 곳보다 좋다고 판단된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 맞는 음식과 관습 등에서 다른 어느 나라도 제공할 수 없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 현재 해운대 마린시티 지역에는 외국인도 많이 와 살고 있다. 한국인에게만 좋은 수준을 넘어 국제적으로도 꽤 생활 조건이 우수하다는 반증이다.

올해 같이 무더위가 계속 되는 경우, 여름철 기간이 서울은 140, 부산은 123일이라고 한다. 여름에 상대적으로 시원할 뿐 아니라 겨울에도 보통 5-6도씩 서울보다 따뜻하다. 이렇게 자연 환경도 아주 좋은데다가 또 주거비도 싸다. 소득 대비 집값 비율(PIS)이 전세계 최고인 홍콩에서 리펄스베이 같은 특급 주거지보다 못할 것이 없다. LA에서 선망하는 말리브지역보다 한국인에게는 부산 해운대가 마음 편하다.

게다가 서울에서 해운대를 하루 낮 시간 다녀만 가는 데도 최소 10만원을 기차삯으로 써야 하고, 가장 값싼 곳에라도 일박하자면 20만원의 교통, 숙박비에 식비를 가외로 써야 할 지경이다. 그러니 여기 사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최소 10만원 이상씩 버는 셈이다. 따듯한 날씨만 아니라 해운대 일대는 관광지에 와 있는 기분이 들어 항상 즐겁게 들떠 지내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물론 행사와 축제에 불꽃놀이도 잦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연고

나는 2012년 서울대 교수직 은퇴 후 3년 만에 부산 해운대 바닷가로 내려와 살고 있다. 스스로 해운대()에 석좌(또는 좌석)를 갖추고 명예교수 시대를 보내고 있다 말한다. 이곳에 자리 잡은 계기는 단순하다. 대개 부산에 연고가 있어 온 줄 알고 짓궂은 친구는 세컨드가 있냐고 들이대는데, 나는 약국에 가면 어디든 연고는 많다고 대꾸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연고를 많이 바르고 살려는지, 연고를 전혀 무시한 내 사연을 들으면 황당할 것이다.

2009년 은퇴 직전 딸 아이 회사에서 동백섬에 있는 조선비치호텔 쿠폰이 나와 모처럼 이곳에 와 잘 자고 보니, 옆쪽 마린시티라는 신개발지에 40층쯤 하는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여기 와서 살면 따듯하고 경치가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그 아파트 전세 값을 물어 보니 부산에서 최고가 지역이었다. 너무 비싼 전세값에 놀라고 돌아오는 길모퉁이에 마침 모델 하우스가 있어 들러 보니 80층이나 올릴 최고 기록 아파트 빌딩인데 서울의 비슷한 최고층 아파트 값보다 절반밖에 안 되었다. 전세보다 구입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쉽게 아파트 전매가 되던 때라 큰 주저 없이 손쉽게 한 채를 계약했다. 그런데 완공된 3년 후에는 모든 매매가 거의 동결되어 그 핑계를 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이사로 최대 피해자는 딸 네 집의 손자, 손녀들일 것이다. 아무래도 외할배와 외할미의 손길을 자주 타지 못하게 되고 딸도 급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하니 제 발등을 찍었다고 쿠폰을 원망했다. 그런데 정작 최대 수혜자는 나 자신인 것 같다. 서울에 있을 때 겨울마다 싸늘한 바람을 쐬고 나면 편두통이 생기던 악순환을 깨끗이 벗어나게 된 것이다. 현재도 그 증상은 재발되지 않아 많이 준비해 온 두통약은 시효가 지난 채 소용이 없게 되었다.

 

3. 파도

사실 필자가 20대까지 살던 집은 남산 한옥마을 도편수 이승업가로 보존되어있는 순 서울토박이다. 그래도 부산까지 오게 된 동기에는 내가 추위를 싫어하는 것이 큰 작용을 했다. 90년대에 한국학을 가르치러 3년간 초빙교수로 가 있던 호주 시드니대의 시절이 기후 상 내게 꽤 맞아서 은퇴 후 다시 가서 살쟀더니 외국 생활은 더 하기 싫다는 마누라와 타협 끝에 반도 동남단으로 오게 된 것이다. 제일 온화한 서귀포도 고려해 보았으나 교통편이 좋지 않아, 은퇴 후 5년간 매주 서울대에 강의 차 갔던 형편상 부산으로 낙착이 되었다.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해운대 비치는 아름답고 아담하다. 호주에서 4년 생활 중 임시로 몇 개월 살던 북부 시드니의 콜라로이 비치는 끝이 안 보일 정도의 모래밭의 연속이었다. 매일 동향집의 일출을 즐겼고 밤에는 달빛이 파도에 부서지는 모습을 작은 고기 떼가 파도에 밀려 온 줄 알고 바켓를 들고 비치 하우스 밑으로 달려 내려갔던 일도 있다.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빌딩이 너무 많아 달맞이 고개까지 덮여 버렸다. 이 고개 모습은 골프장이 있었다는 옛 시절의 나무들을 보존했더라면 마치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 딸린 다이몬드 헤드와 모습이 흡사했을 것이다.

아직 어스름한 새벽에 해운대 앞바다를 멀리 내려다보고 있으면 오징어잡이 배들이 여전히 집어등을 켜고 수평선 쪽에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동트는 아침이 되어 가면 배들이 철수를 서둘러 해안 쪽으로 들어 와 버리는 행렬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날이 훤히 다 갰는데 마지막으로 통통 대며 외로이 달려 들어오는 배 한 척이 간혹 눈에 띈다. 이 배 선장은 빚을 많이 지고 여러 식구를 부양하느라 끝까지 그물 줄을 당기다가 늦은 도착으로 생선을 넘기는 시간을 못 맞출까봐 저토록 연기를 뿜으며 달려오겠지 하는 상념에 젖는다. 은근히 그 힘겨운 파도를 일으키는 모습이 애처롭다.

 

4. 겸손

내가 사는 아파트는 눈밑으로 헬리콥터가 지나갈 정도로 높다.

거고 사추 지만 계일 居高思墜 持滿戒溢

높은 곳[지위]에 거하면 떨어질 것을 생각하고, 가득 찰 정도로 가졌으면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

이 경구는 당 태종 때 예천명 비석에 새겨놓은 것으로 겸손 검소하게 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서예 연습하실 때 써 놓으신 족자를 아파트 피트네스 벽에 걸어 놓았더니 외국인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그 뜻을 물어보고 이 고층 아파트에 맞는 명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최근 이사 온 현대 미술 전공했다는 여자가 경로당 같다고 트집 잡아 기어코 떼어 내고 말았다.

아파트가 크다 보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산다. 플라스틱 용기를 이용해 화분을 만들어다 놓았더니 아파트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힐난했다. 마찬가지로 알뜰시장을 열어 특히 외국인들이 귀국전 쓸 만한 물건을 처분케 하고 수익금을 갹출해 미화원의 청소복, 보안원의 손난로라도 사주었는데 이것도 고급 아파트에서 시장판을 벌렸다고 잡음이 났다. 내가 하버드대에서 공부할 때나, 시드니의 고급 동네에서 세 들어 살 때도 어디나 알뜰시장은 일상화 되어 있는 주말 풍속이었다.

마린시티에는 거제도의 조선사업이 잘 될 때 수많은 외국인 가족들이 살았다. 요즘 꽤 줄었지만, 고등학생까지는 부산 쪽 외국인학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비싼 아파트를 임대해 주었다. 그러다 대학생 나이가 되면 부모들은 거제도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이들 중 몇몇은 내게 한국어와 동양화 그리는 기초를 배웠고 귀국 후에도 연락을 해 온다.

 

5. 해운(海雲)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를 보면 이상한 곳들이 있다. 동백은 봄이 오면 다 떨어져 있게 마련인데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이라 노래한다. ‘지는 동백섬에또는 꽃 피 동백섬에’--이렇게 해야 현실에 맞다. 또한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라는 구절도 요 근래에는 연락선이 다닌 일이 없어, 과거 관부(關釜)연락선을 말하는 것이라 해석하든지, 또는 해방후 귀국 길에 폭침 당한 우키시마호에 탔다가 못 돌아오는 형제를 연상하려는 사람마저 있다. 좌우간 요즘은 연락선 대신 관광선이 수시로 다닌다.

동백섬 가운데 정상에 오르면 최치원 동상이 있다. 당시 서울인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12세에 중국으로 가 9세기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 이름을 날리고 귀국했으나 국내 정세상 때를 만나지 못한 천재로 내 마음을 처연하게 한다. 해운대(海雲臺)라는 지명도 최치원의 자()해운(海雲)’에서 비롯되었다.

요즘 해운대 해변에는 옛날 바닷가 구름을 한가히 바라보던 시절은 다 지나서 알록달록한 파라솔 숲과 각종 소음이 일어나는 행사가 많다. 특히 록밴드가 아파트 쪽으로 무대를 설치하고 저음으로 늦은 밤까지 타격을 해댈 때는 고통이다. 게다가 올해는 살인적 조명까지 쏘아 대길래, 구청에 무대를 꼭 남향 바다쪽을 향하도록 허가하랬더니 약속을 해놓고도 지키지 않는 것 같다.

필자가 1951년 일사후퇴 후 부산에 와서 2년여를 살았을 때 해운대는 좀처럼 오기도 어려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새 중심지가 되어 비행장이 있던 수영강가 자리는 최대 백화점과 영화의 전당까지 들어섰다. 옛날 최치원은 해인사로 표표히 떠났다지만, 현재에는 너무 많은 형제들이 구름 같이 돌아와 해변을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