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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이건희 회장 ‘신경영’ 함께한 나는 행운아”

(1) 사람이 곧 혁신이다

한국에서 기술 경영(MOT: Management Of Technology)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손욱 전 농심 회장이다. 손 전 회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삼성SDI 사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삼성인력개발원장 등을 역임한 정통 ‘삼성맨’이다.

창업자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을 모두 보좌하며 삼성의 기술 혁신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이후 CEO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손 전 회장이 기술과 경영의 접목에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몇 안 되는 선구자이자 1세대로 평가받는 배경이다.

‘식스시그마 전도사’, ‘한국의 잭 웰치’, ‘최고의 테크노 CEO’ 같은 수식어가 보여주듯 손 전 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2008년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식품 기업 농심의 회장으로 변신해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물질 파동’으로 시끄럽던 회사를 안정시키고 짧은 기간 동안 기업 혁신의 진수를 보여준 것도 혁신 전도사로서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경비즈니스는 손 전 회장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뤄낸 혁신 경영 이야기를 시리즈로 엮는다. 손 전 회장은 “이번 회고록이 한국형 혁신 경영의 체계화로 이어져 많은 후배 CEO들에게 도움이 되는 첫 단추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진 기업, 일류 기업과 후진 기업, 보통 기업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라는 질문을 깊게 파고들다 보면 결국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말로 귀결된다. 기업을 이끄는 사람의 차이는 곧 ‘리더십’의 차이다. 역사를 통해 보면 리더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체계적인 리더 육성에 힘써 온 국가나 기업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리더는 시대적 변화, 즉 천시·지리·인화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는 비전과 목표, 전략을 세우고 남다른 방법으로 조직원들을 무장시켜 꿈을 이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남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단절의 문화를 가진 동양은 계승 발전의 문화를 지닌 서양에 뒤질 수밖에 없어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갖고서도 굴욕의 근세를 겪어야 했다고 해석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법을 한니발이 계승 발전시켜 로마를 침공하고, 이를 스키피오가 업그레이드해 한니발이 패망하고 다시 카이사르가 계승 발전해 로마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혁신 경영도 마찬가지다. 혁신은 전 세계에서 앞서가는 방법들을 찾아내거나 스스로 개발해 활용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더 좋고, 더 빠르게 고객의 가치를 창조하는 경쟁 우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개발도상국 시절을 거치며 고도성장,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나라다. 성공적인 산업화 모델을 통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설비 투자가 이어졌고 규모의 경제, 낮은 노동비용, 수출 주도의 경제 체제도 만들어졌다.

경제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방법론들이 도입돼 활용됐다. 지난 40년을 돌이켜보면 매우 적극적으로 선진국의 혁신 방법을 도입하고 변화·발전시킨 기업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어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이에 비해 (기업 수 99%, 종업원 88% 차지하는)수많은 중소기업 현장을 가보면 너무나도 뒤처져 있는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도 처음엔 중소기업이었다. 똑같이 출발했지만 어떤 기업은 세계 일류, 어떤 기업은 후진적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일류 기업이 그랬듯이 모든 기업이 혁신의 방법을 배운다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멩이를 들고 싸우는 사람이 총을 들고 싸우는 이를 이길 수 없다. 좋은 방법이 없으면 결국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방법론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시작했다. 제목 정도를 알고, 몇 번 들은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혁신은 가장 앞서가는 방법론을 도입해 성과를 내고 체질화는 것이다. 그저 ‘아는 것’과 다르다. 예를 들어 바둑을 둘 때 정석은 공부하지 않고 일류 기사의 기보만 연구하는 것이 지금 우리 기업의 모습이 아닐까 우려된다.

혁신은 바닥에서 기본적인 것부터 쌓아올려야 고차원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프로세스 혁신 없이 전사적자원관리(ERP)만 도입한다고 끝이 아니다. 품질관리도 모르면서 식스시그마를 도입한다고 성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들의 현실은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컨설팅 회사도 마찬가지다. 기본을 등한시하는 혁신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낳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또 우리는 변화 관리를 소홀히 해 변화에 실패한 사례가 많다. 대통령이 변화와 혁신을 주창하면 얼마 안 가 혁신 피로감·저항 같은 얘기가 나온다. 결국 마음을 한 방향으로 바꾸는 변화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다.

공감하지 않는 혁신은 성과를 낼 수 없다. 성과가 없으면 재미와 즐거움이 없다. 결국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성과를 내고 이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즐거움의 혁신을 이번 시리즈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 필자의 희망이다.

즐거운 혁신 전하고 싶어

앞으로 필자는 삼성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필자는 다행히도 삼성 같은 일류 기업에서 40년 가까이 일했다. 혁신 도입과 활용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노하우를 더 많은 사람과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하는 게 남은 의무가 아닐까 한다.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또 글로벌 기업으로 뻗어나가는 사례가 많이 나와야 비로소 선진국 문턱을 넘을 수 있다.

삼성의 역사는 한국 혁신 경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故) 이병철 회장의 창업 이념 중 하나가 합리 추구였다. 이것은 합리적인 변화 관리, 즉 혁신을 말한다. 새로운 방법론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문화가 창업 이념에 깔려 있었다. 이 회장은 앞서가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도입하려는 조직 문화를 정착시키려고 애썼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도 마찬가지다. 장장 68일에 걸쳐 유럽과 일본을 다니면서 선진 기업을 벤치마킹한 여정은 세계 기업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임원 200명을 데리고 68일 동안 오직 벤치마킹만 하러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고 체계화한 연구 자체가 한국에는 없다.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인재 제일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인 분이다. 기업은 결국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채 제도를 시작했고 연수원을 만들어 조직적인 직원 교육에 힘썼다.

삼성 공채 1기는 1957년에 뽑았는데 직원 연수원이 따로 없어 외부에 위탁 교육을 맡기기까지 했다. 좋은 사람을 뽑아 잘 교육시키면 회사의 성장 동력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의 인재 개발 틀을 만든 것도 창업자다.

훌륭한 인재에게 혁신의 방법론을 가르쳐 준 사례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삽·쟁기·트랙터·비행기 중 무엇을 줄 것인가에 따라 농사의 성과와 스케일이 달라진다.

그런데 우린 왜 방법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한국적인 혁신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도 드물고 학자도 없고 컨설팅 회사도 없다. 언제까지 다른 나라의 것을 배워다 따라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는 없다.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일류 국가나 선진국은 먼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식스시그마, 일본의 도요타 방식, 러시아의 트리즈가 있다면 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깊이 고민해야 한다.

삼성의 역사는 한국 기업 혁신의 역사

중소기업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중소기업 육성책이 나온 지 이미 수십 년이다. 한국의 중소기업 백서와 일본의 백서를 비교해 보면, 우리 것이 오히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은 유럽을 배워 산업화를 시작한 이후 스스로 깨우친 정책을 활용해 선진국이 됐다. 우리는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정책을 도입하고 노력해 왔다.

백서의 항목 숫자는 많은데, 하나하나 내용을 깊게 들여다보면 형식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제목은 그럴듯한데 알맹이가 빠진 격이다.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우리나라는 모내기 사진만 있고 추수하는 사진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내실 있게 추진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중소기업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결국 인력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대기업은 우수한 자질을 갖춘 인재,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들을 모은다. 여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들을 다시 세계에서 최고로 열심히 가르친다. 삼성처럼 직원 교육에 투자하는 기업은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다. 그러니 일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소기업은 매우 낮은 수준의 교육 환경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중소기업의 현실이다. 대책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기업인, 사원들의 수준을 어떻게 뜯어고치고 교육시키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고기술·고부가가치 산업 측면에서 본다면 이공계대학의 혁신부터 시작돼야 한다. 중소기업이 “이렇게 교육시켜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언론에서도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것을 보지 못했다. 전시 행정적인 혁신은 많지만 공과대학 증원 등 근원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는 식이다.

생각해 보면 필자는 정말 행운아다. 혁신의 과정에서 항상 팀원으로 일해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 신경영 기행이 독일에서 시작될 때는 이건희 회장의 수행팀장을 맡았다. 당시 비서실 소속으로 전자부문 전략기획팀장을 맡았기에 가능했다. 신경영을 함께한 건 굉장히 값진 경험이었다. 20세기 들어 그런 변화의 리더십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는데, 그 과정을 함께한 건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병철 회장은 나를 삼성전기에 잡아와선 “5년 동안에 10배 키우라”는 특명을 내렸다. 1982년 당시 삼성전자는 TV 부품 4가지를 만들며 매출액 300억 원에 머무르던 작은 회사였다. 이를 1987년까지 3000억 원으로 키우라는 소리였다.

25개 신규 사업을 도입하고 기존 사업도 확장했다. 매년 67%씩 성장해야 가능했던 미션. 그때 필자는 생산·기술 총괄을 맡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을 쌓았다. 이것 역시 굉장한 행운이자 정말 감사해야 할 경험이다.

삼성에서 마지막 6년간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5년, 인력개발원장으로 1년을 일했다. 모두 초대 원장이었다. 삼성의 백년대계는 결국 기술과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온전히 경험했던 것이다. 기술원 5년 덕택에 기술 경영 전문가가 됐고, 인력개발원 덕에 사람 관리, 특히 리더십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