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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 프로젝트는 진행형

국산개발 신화 새롭게 쓸 것


2019-12-20.. 동아일보.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과기부 선정 ‘2019 과학기술유공자이충구 현대차 사장

 

포니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형입니다. 1975년 탄생한 포니1’은 한국의 첫 자동차 모델이라는 기록 외에도 각종 신화를 낳았습니다. 1986년 미국 시장에 진출한 첫해 17만 대를 팔면서 큰 성공을 거뒀지요. 덕분에 한국은 손꼽히는 자동차 생산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선진국 미국과 유럽 시장의 문턱은 여전히 높아요.”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KAIST 도곡캠퍼스 과학기술유공자 라운지에서 만난 포니개발의 주역 이충구 현대자동차 전 사장(74·한국자동차공학한림원 회장)한국 산업화의 결정적 장면중 하나로 꼽는 포니 개발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의 성공에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동차 입국을 이룬 것은 뿌듯한 일이지만 아직 만족할 수 없다는 자동차 장인의 결기가 느껴졌다

한국 자동차의 살아 있는 전설인 이 전 사장은 이달 1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선정한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됐다. () 김시중 전 과학기술처 장관, 고 김정식 대덕전자 전 회장, 자원학자 고 박동길 인하대 명예교수 등 12명과 함께 과기 분야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50년 전만 해도 자동차 산업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한국을 세계적 강국으로 이끈 신호탄인 포니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이후 설계책임자로 주요한 자동차 개발을 진두지휘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자동차 전문가가 과학기술유공자에 선정된 건 처음이다. 이 전 사장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 자동차 산업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자동차 산업을 일으키는 데 힘써 온 다른 숨은 주역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자동차 생산 불모지 한국에서 차량 국산화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기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국내엔 자동차 산업이라고 부를 만한 기반이 없었다. 서울대에 개설된 자동차공학전공조차 제대로 된 교재나 실습장비가 없었다. 이 학과 1회 입학생인 이 전 사장은 서울 청계천에서 구한 미국 자동차 회사의 매뉴얼을 탐독하며 호기심의 갈증을 풀어야 했다. 이 전 사장이 19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할 때에도 한국은 미국 포드나 도요타 등 외산 자동차를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판자로 바람만 겨우 막은 건물에서 하루 몇 대 생산하는 게 전부였다. 이 전 사장은 당시 공장들은 물난리가 나면 부품을 풀어 물에 씻어 다시 조립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고 회상했다. 자동차에 사소한 고장이 나도 필요한 철판을 가공할 설계도가 없었고, 설령 외국에서 설계도를 구해 와도 이를 해석해 가공할 인력도 없었다.

고유 모델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됐다. 포드, 제너럴모터스, 르노 등 내로라하는 선진국 자동차 회사를 찾아갔지만 턱도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 왔다. 일본 미쓰비시자동차로부터 뒷바퀴 힘으로 달리는 후륜구동엔진과 변속기, 조향장치 등 차량의 뼈대를 이루는 섀시 기술을 구입하기로 하면서 국산 모델 개발에 시동이 걸렸다.

이 전 사장은 그때까지도 고유 모델이 뭔지 몰랐다어쨌든 뼈대 만드는 기술은 확보했으니 차체를 설계해야겠다는 생각에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 전문업체(카로체리아)인 이탈디자인에 의뢰해 디자인을 확정했다고 말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75년 포니 1호차가 출고됐다. 이듬해엔 1976년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수출에도 나섰다. 한국은 그렇게 세계 9번째 고유 모델 보유국이 됐다.

이 전 사장은 까다로운 미국 시장을 목표로 여러 번 승부수를 던졌다. 후륜구동 대신 당시 자동차 업계의 주류였던 전륜구동 엔진을 사용한 포니엑셀을 1985년 선보였고, 이 차로 1986년 처음으로 미국 시장을 두드려 그해에만 17만 대를 파는 돌풍을 일으켰다

막상 미국에 진출해 성공을 거뒀지만 이후 쏟아지는 까다로운 미국 소비자들의 불평과 드러나는 문제점들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불만은 인테리어 도장부터 승차감까지 다양했다.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사용하던 미쓰비시의 전륜구동 엔진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전륜구동 엔진을 자체 개발했다. 이 전 사장은 수천억 원의 비용을 추가로 들여야 하는 큰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투자는 결실을 맺었고, 19941995년 한국은 차체부터 섀시까지 전부 자체 개발한 명실상부한 진짜 고유 모델인 엑센트아반떼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현대자동차의 플래그십 자동차인 에쿠스까지 거의 모든 라인업을 구축하는 데 관여했다. 최고기술책임자(CTO)이자 사장으로서 현장에서 수많은 자동차의 개발을 진두지휘한 리더십의 비결을 묻자 그냥 자동차에 미쳐 일만 했을 뿐, 리더로서는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 전 사장은 재직 시절 직원들 사이에선 무서운 타이거(호랑이)’로 불렸다. 그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가 있었다돌이켜 보면 리더에게 완벽주의는 감점 요인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전 사장은 리더이기 전에 제품을 만드는 엔지니어라는 생각을 항상 품었다엔지니어는 완벽주의로 무장해야 하고 다시 엔지니어로 돌아가도 완벽주의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자동차밖에 모르는 사람,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