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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희생자들에 사과해야 일본에도 당당할 수 있죠”

등록 :2016-10-04 20:11수정 :2016-10-04 21:57(한겨레신문)

 

[짬] 한베평화재단 초대 이사장 강우일 주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오랜 세월 우리는 외세에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짓밟히고 인권을 빼앗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우리도 비슷한 잘못을 베트남 사람들에게 저질렀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죄할 때 일본이나 다른 나라가 우리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 사죄하라고 외칠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2일 제주시 아라동 천주교 제주교구 주교관에서 만난 강우일(사진·제주교구장)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강 주교는 지난달 19일 서울시 엔피오(NPO)지원센터에서 열린 ‘한베평화재단’ 창립 총회에서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2002년 제주교구 맡아 ‘4·3진상’ 관심
“국민 섬겨야 할 국가가 학살” 충격
‘베트남전 민간인 만행’도 같은 맥락

‘우리가 먼저 참회’ 재단 취지 공감
“진심 전하자 베트남인들도 호응”
한국정부 차원 사과가 ‘인간 도리’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전시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베트남 피해자들 지원과 한국 참전군인들의 고통을 끌어안고 평화의 길을 열어가자는 취지에 동참한 각계 인사들이 창립했다.

강 주교는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들었지만, 제주도에 와서 살게 되면서 좀더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에게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제주 4·3항쟁 때 민간인 학살과 맥이 닿아 있다. 그래서 그는 지인들이 제주에 오면 관광지로만 보지 말고 반드시 제주 4·3평화공원에 가서 한국 현대사의 알려지지 않은 4·3의 비극적인 역사를 공부하고 가라고 권유한다.

“제주에 오기 전에는 4·3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기는 했지만 이게 어떤 사건이었고, 제주도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몰랐죠. 제주도에 온 뒤 도민들을 두루 만나고 사료를 들춰보면서 역사에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되겠다는 인식을 굉장히 강하게 느끼게 됐어요.”

2002년 10월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한 강 주교가 알게 된 4·3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가장 큰 충격은 국가가 국민을 마구잡이로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단순 논리로 제주도민은 빨갱이이고,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고 간주해서 ‘발본색원하라’,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등 상부의 지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압했다. 결국은 제주도민들을 같은 국민으로 보지 않고 빨갱이라는 이념의 잣대로만 바라보고 무차별 학살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청원운동에 동참해 미국까지 다녀온 강 주교는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국민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데 완전히 주객이 전도됐고, 4·3 당시 국가지도자들의 이념 아래 수많은 국민을 도륙한 것은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라고 강조했다.

강 주교의 4·3에 대한 역사인식은 베트남으로 이어졌다. 역사의 통찰을 통해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했다. 강 주교는 “우리가 마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무시하고 인식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살다가 할머니 한 분이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국민적 역사인식으로 확대됐던 것처럼, 베트남도 그렇게 될 확률이 상당히 있다고 보인다”고 전망했다.

“상대방으로부터 비판받고 사죄를 요구받기 전에 자발적으로 베트남 사람들한테 사죄와 연대의 자세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강 주교는 “그런 일을 해오신 분들의 뜻에 공감한다는 차원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이사장직을 부탁해서 거절하지 못했다”며 웃었다.

강 주교는 베트남 정부로서는 큰 차원에서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덮는 정책을 내걸고 대한민국과 수교했기 때문에 베트남 정부가 우리한테 사과를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된 곳에 증오의 비를 세우고, 한국인들에게 많은 슬픔과 한이 맺혀 있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 국내의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베트남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고 소개했다. “베트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처음에는 만나려고 하지 않았는데,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자 이제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맞아들이는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도 화해하기를 바라는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고, 과거사를 그냥 묻어둘 것이 아니라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는 흐름이 베트남에서도 생기고 있다.”

그는 바람직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두 나라가 활발하게 경제 교류를 하는 것은 그것대로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민간 차원에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면서 다가가야 상생의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역이나 한류의 확산만이 아니라 밑바닥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베트남 민간인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