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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동훈 경희대교수아들, 해리가 이라크 모술탈환작전 취재기가 2016년 10월 25일 한겨레신문에 게재되어 이곳에 올린다.

  지난 2015년 말, 해리는 지신을 난민으로 위장하여 터키 이스탄불에서 독일까지 난민들의 모습을 취재한 기사에 이은 소식이다.



중동·아프리카 : 국제 : 뉴스 : 한겨레
총알이 빗발치고 쿠르드 병사가 쓰러졌다
한겨레

[이라크 모술 탈환작전 취재기]
지상전 선봉 선 쿠르드군, IS 거점 마을 9곳 탈환 전과
모술 동부 9km 바시카에서 흰깃발 내건 IS 매복 기습
‘핑핑’ 총알 소리·병사들 절규·지원요청 무전 아수라장

취재진 보호하던 병사, 응사하던 병사도 총탄 맞아 즉사
동료 주검 장갑차에 싣고 후퇴하며 참았던 울음 터뜨려
전투 치른 마을은 폐허…IS는 곳곳에 지하터널 연결망
모술 탈환 시점 불투명…인간방패 지연전땐 몇달 갈수도

이슬람국가(IS)가 장악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 모술 탈환 작전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19일(현지시각), 이라크군과 쿠르드군은 빠른 속도로 이슬람국가가 점령했던 마을들을 재탈환하고 있었다. 이라크 정부는 전과에 흡족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높았다.

앞서 이날 쿠르드자치정부 국무총리실의 미디어 담당관인 카이야가 전선 취재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쿠르드자치정부군인 페슈메르가가 모술에서 동북쪽으로 불과 9㎞가량 떨어진 전략거점 마을 바시카를 공격할 계획이므로, 취재를 원하는 이들은 집결지로 이동하라는 통보였다. 다만 그는 안전을 이유로 취재진의 최전선 동행은 불허했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집결지에선 탱크, 장갑차와 병사들을 실은 트럭들이 수㎞나 줄을 지어 최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은 총을 메고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를 하고, 또는 모닥불을 지펴 추위를 녹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00여대의 탱크와 장갑차들, 그리고 군인 수천명 사이에는 전투를 앞둔 긴장감보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쳐났다.

20일 이라크 모술 인근의 전선에서 쿠르드민병대(PAK) 지휘관 헬로 렘시티가 페슈메르가 지도부와 회의를 끝낸 뒤 돌아오고 있다. 그는 하위자 근처에서 급조폭발물(IED)를 해체하다가 폭발물이 터져 왼팔을 잃었다.
누군가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지난봄 키르쿠크 지역에서 만났던 피에이케이(PAK·이란의 쿠르드계 민병대) 지휘관 중 한 명인 헬로였다. 그는 지난해 최전방에서 이슬람국가가 설치한 급조폭발물(IED)을 분해하다 폭발물이 터져 왼팔을 잃었으나, 무거운 총을 한손으로 조작하며 여전히 부대원들을 이끌고 있었다. 헬로에게 그들 병력을 따라나서도 될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렇게 우연히 최전선으로 들어갈 기회가 찾아왔다.

20일 새벽 이라크 모술 인근의 최전선에서 쿠르드민병대(PAK) 대원들이 이슬람국가(IS)와의 전투를 앞두고 기도하고 있다.
20일 새벽 동틀 무렵,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병영 상공에 이슬람국가의 정찰용 무인조종기(드론)가 떠 있었다. 드론은 민병대의 집중사격으로 격추됐다.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고, 탱크와 장갑차가 전진하면서 공격이 시작됐다. 아직 장갑차량들만 진입하고 있을 때, 헬로가 부대원 10여명을 이끌고 최전방을 넘어 이슬람국가 세력이 점령중인 마을로 접근하는 게 보였다. 쿠르드자치정부군과 달리 민병대는 장갑차가 없어 픽업트럭에 화기를 장착한 열악한 장비로 싸웠지만 사기만큼은 드높았다.

흰깃발에 방심한 순간 총알 빗발…코앞에서 ‘분노의 교전’

이들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마을들을 공략하며 전진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국가가 쿠르드 병력을 더욱 깊이 끌어들이기 위한 매복 작전이었으나, 이때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였다. 도로 옆 한 민가의 담장 너머에 하얀색 깃발이 올라와 흔들렸다. 흰색 깃발은 이슬람국가 점령하에 있다가 탈출하는 주민들이 ‘우리를 쏘지 말라’는 뜻으로 드는 깃발이기도 하다. 민병대가 이들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총알이 날아왔다. 함정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페슈메르가의 일제사격으로 쉽게 그 집을 제압할 수 있었다. 멀리 앞장서 가던 탱크와 장갑차 주위로 역시 하얀 깃발을 흔들며 항복해 오는 사람이 30여명 보였다. 쿠르드군 지휘관은 그날 성과가 충분했다고 생각했는지 차량을 돌리라고 명령했다.

20일 이라크 모술 인근의 바시카에서 이슬람국가(IS)의 매복 공격을 받은 쿠르드민병대(PAK)대원들이 쓰러진 동료를 트럭 옆으로 옮겨 은신하고 있다.
그런데 직전에 공격을 받았던 민가 근처까지 돌아왔을 무렵, 도로 양쪽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두 장갑차와 트럭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 일방적으로 총격을 받는 와중에 앞쪽 트럭에 붙어 가고 있던 아달란이라는 이름의 병사가 여성 대원들과 함께 나를 비롯한 기자들이 있는 트럭 쪽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왔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곧 괜찮아질 것’이라는 몸짓을 한 뒤 응사하기 시작했다.

내가 뒤쪽 탱크들이 왜 빨리 지원을 오지 않는지 잠깐 돌아보다 다시 아달란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가 픽 하고 쓰러졌다. 머리 위쪽에 총을 맞았다. 뿜어져 나온 피가 금새 땅을 적셨다. 그를 구하기 위해 병사 몇 명이 다가올 때, 적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그 몇분간의 시간은 오로지 핑핑거리는 총알 소리와 병사들의 절규, 다급하게 무전기로 지원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뒤섞인 혼란 자체였다. 그 순간 또 한 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그는 날아온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병사들은 감정이 북받친 채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분노가 가득한 사격을 퍼부었다.

지난 20일(현지시각) 이라크 모술 인근의 바시카에서 아달란이라는 이름의 쿠르드민병대(PAK) 병사가 이슬람국가(IS) 대원들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동료들이 아달란을 장갑차 안으로 옮겨 지혈을 하며 살리려 애썼지만 그는 끝내 숨을 거뒀다.
20일 이라크 모술 인근의 바시카에서 이슬람국가(IS)와 교전하던 쿠르드민병대의 한 병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자 동료들이 모여들고 있다. 총에 맞은 병사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마침내 후방에 있던 장갑차 3대가 오고 나서야 쓰러진 병사들을 장갑차 안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전원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가까스로 위험 지역을 벗어난 직후 장갑차 밖에 매달려 있던 병사들과 나도 장갑차 안으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일행이 장갑차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이들이 그때까지 참고 있던 감정에 북받쳐 흐느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임시 진지에 돌아온 우리는 다른 대원들과 조우했다. 페슈메르가 지휘관은 민병대 지휘관에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전히 동료를 잃은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헬로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부대원들을 다독이며 다음 상황을 대비했다.

전날 밤의 축제 분위기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나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프랑스와 독일 취재진이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 간략하게 상황을 말해 준 뒤, 우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포격 소리를 뒤로하고 최전선을 떠나왔다.

20일 이라크 모술 인근의 바시카에서 이슬람국가(IS)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장갑차 안으로 들어온 쿠르드민병대(PAK) 대원이 숨진 두 명의 동료를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모술 작전은 크게 3개의 군대 조직이 각각 역할을 분담한 채 진행되고 있다. 이라크 중앙정부 군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자치정부 군대인 페슈메르가, 그리고 미국 등이 참여한 연합군이다. 연합군은 공중 폭격이 주요 임무로, 지상전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지상전의 양대 주력군인 이라크 정부군과 페슈메르가는 이번 작전에서 공동의 적인 이슬람국가를 대적하기 위해 손을 잡긴 했지만, 둘 사이는 역사적으로 줄곧 충돌하며 적대적으로 공존해왔다. 그러나 이슬람국가의 출현으로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듯,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라크-쿠르드족 연합군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모술 작전에서 두 군대의 역할은 명확하게 나뉘어 있다. 아랍계가 대다수인 모술 안으로는 쿠르드족 페슈메르가는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슈메르가는 모술 진입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뒤, 모술 안에서의 작전은 이라크 정부군에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앞서 작전 첫날인 17일과 이틀째인 18일, 이라크 정부군과 페슈메르가는 예상보다 쾌조의 진격을 했다. 16일 밤 나는 모술 동쪽으로 20㎞ 떨어진 자르다크산 정상에서 외국 취재팀들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 산은 모술로 가는 길에 탈환해야 할 마을들을 내려다보기에 좋아 미국 <시엔엔>(CNN)과 영국 <비비시>(BBC) 등 세계 각국 취재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막의 10월 산 정상의 기온은 꽤 쌀쌀했다.

마침내 작전 개시의 날이 밝았다. 17일 동틀 무렵, 진지 밖에서 어둠 속에 윤곽을 드러내는 작은 마을들을 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내며 로켓탄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첫날 목표는 모술 인근 9개 마을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지상전을 통해 마을로 접근하는 페슈메르가 병력을 연합군의 공습과 자르다크산에 있는 후방 부대의 로켓 공격이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산 정상에서 아래쪽 마을을 향해 폭격과 포격을 가하자 곳곳에 포연이 일어나고, 이슬람국가 세력이 하나둘씩 마을을 잃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나 저 밑에서 어떤 참상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영국 <텔레그래프> 기자들과 팀을 이뤄 지상전이 펼쳐지고 있는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 마을들은 이슬람국가의 통제 아래 있긴 했지만, 그들로선 언제라도 쉽게 버릴 수 있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곳곳에 설치해놓은 급조폭발물(IED)들이 이라크군과 쿠르드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심리적 압박감을 줬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이슬람국가는 네댓명의 대원을 마을에 남겨뒀다가 이라크군과 페슈메르가 부대가 마을을 재탈환했다고 믿고 방심하는 순간 기습공격을 하거나 자살폭탄 차량을 돌진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20일 새벽 이라크 모술 인근의 바시카에서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드 자치정부 군대인 페슈메르가 대원들이 이슬람국가(IS)와의 전투를 앞두고 모닥불을 쬐고 있다.
<텔레그래프> 취재팀 차량을 타고 전투가 벌어지는 마을 초입까지 접근했다. 끊임없이 로켓탄 발사음과 총성에, 공중 폭격까지 더해져, 대체 어느 쪽에서 쏘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던 찰나, 우리가 서 있던 곳에서 불과 40m가량 떨어진 곳에 폭음과 함께 땅이 일어나며 먼지가 주변을 뒤덮었다. 이슬람국가 대원들이 쏜 로켓탄이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되돌아서야 했다. 그렇게 공격 첫날이 저물었다.

이튿날인 18일, 전날 재탈환했다는 9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의 풍경을 담고자 <텔레그래프> 사진가와 함께 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전쟁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성한 집이 하나도 없었고, 이슬람국가가 연합군 공습의 정확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마을 곳곳에서 불태운 타이어들이 여전히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헬리콥터 등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시커먼 연기가 나는 타이어를 태운 것이다.

IS군은 마을마다 복병을 남겨 연합군 진격을 늦췄다

이슬람국가 대원들은 공습 대피와 매복, 도주 등을 위해 여러 개의 지하터널을 파놨다. 어떤 곳들은 그 안에서 며칠을 지낼 수도 있을 만큼 규모가 컸다. 이슬람국가는 2014년 6월 모술을 점령한 직후부터 방어 태세에 들어가 수많은 지하터널 연결망을 구축해놨다.

지난 초여름에 갔던 모술 서쪽에 위치한 도시 신자르가 생각났다. 그곳에도 이슬람국가가 파놓은 땅터널이 있었는데, 한 무장대원의 주검이 방치된 채 부패해 뼈만 남아 있었다. 주검 아래에는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사진이 한 장 떨어져 있었다. 두 딸의 아버지였던 그 대원은 마지막 폭격의 순간 어딘가 남겨두고 왔을 가족을 생각하며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이 전쟁의 목적이 뭔지 어떠한 확신도 없이 여러 사정으로 이 싸움에 발을 들여놓았을 많은 전사들을 상상해본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열악한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슬람국가에 합류한 대원들도 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일 이라크 모술 인근의 바시카에서 이슬람국가(IS)와의 전투를 앞둔 쿠르드민병대(PAK) 소속 여군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밝게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분쟁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과 저널리스트들은 최전방에서 많은 선택 앞에 놓인다. 그 선택이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중심으로 데려다 주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그 선택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20일 취재팀이 바시카를 떠난 직후, 이라크 정부는 뜻밖의 많은 희생에 당황했는지 미디어를 전반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최전방으로 들어가려는 저널리스트들을 먼저 차단한 뒤, 이미 부대 안에 있던 취재진도 속속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23일 일요일 현재로선 모술의 북동쪽 최전방 지역에서의 소식은 정확하게 보도되지 않고 있다. 앞서 21일에는 모술에서 남동쪽으로 약 150㎞ 떨어진 키르쿠크에서 이슬람국가 무장세력과의 교전이 시작되자 많은 미디어는 그쪽으로 몰려갔다. 다른 지역에서도 모술을 향한 전진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라크 정부군과 페슈메르가는 각자의 진격 방향에서 같은 속도로 모술을 향해 접근하는 것을 기본전략으로 짰다. 따라서 이곳 북동쪽에서 예상치 못하게 진격이 지연된 것은 다른 지역의 작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슬람국가도 모술 안에서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고, 키르쿠크에서 벌였던 게릴라 전술로 연합군의 신경과 전력을 최대한 분산시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을 택할 것이다.

나름대로 현지에서 많은 정보를 받을 수 있는 저널리스트들조차도 이라크군과 쿠르드군이 주축인 연합군이 얼마나 빨리 모술을 탈환할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이들은 이슬람국가의 상당수 지도자급 대원들이 이미 모술을 떠났다는 소식통의 전언을 근거로, 모술 탈환은 짧게 걸릴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이슬람국가 세력이 모술의 시민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지연전에 들어갈 경우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전투의 최전선에서 이슬람국가의 매복과 완강한 저항을 몸소 겪은 경험으로 미루어 모술 재탈환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더욱이 이 전투로 인해 발생할 수많은 난민들의 이동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바시카/글·사진 전해리 다큐 사진작가

▶전해리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고, 2009년 워싱턴 코코런 미대를 졸업했다. 현재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럽과 중동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9월 터키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레스보스 섬으로 가는 시리아 난민들의 목숨을 건 탈출 행렬을 동행 취재해 <한겨레>에 실은 바 있다.


관련정보
기사등록 : 2016-10-24 오후 09:46:35 기사수정 : 2016-10-24 오후 11: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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