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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6 05:12

악비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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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를 생각하면서



어제 저녁에 학교에서 집에 오니 안방 창문에 매미가 와 있었다. 지금이 새벽 5시인데  아직도 매미가 매달려 있다. 내가 오랫만에 밤을 지새우고 있다. 사실 장기간 내 건강상태는 좋지 않다. 그래서 3월 중순부터 두문불출, 집에만 주로 있었고 이메일 점검은 물론 매사 귀찮아서 이 칼럼인에도 글을 올리지 않았다. 지난 4월에는 학교에 전혀 가지 않았고 5월에 6번, 6월에는 10번 정도 가게 될 것 같다. 사진도 지난 3월23일에 찍은 후 어제야 매미를 찍었다.  6월25일에는 매미 사진 하나, 3월23일에는 한강공원, 집 인근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아래 사진들 참조).  

문창극 건으로 말이 많아 이 칼럼에 글을 올리게 된 것이다. 정치계와 종교계의 비리, 세월호 참사, 총기 사건 등으로 계속 너무 시끄럽다. 국회의원 가운데 범법 행위를 한 사람들이 없을까? 자정능력, 애국심을 잃은 사람들이 지도자 역할을 하니 ---. 그래서 이와 같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관련하여 남송 악비 생각이 나서 아래에 악비 관련 글들을 실은 것이다.


높은 문화와 생산력을 자랑하였던 중국의 북송(北宋)왕조(960~1127)가 당쟁이 격화되면서 여진이 세운 금(金)나라의 침략을 받아 황제는 포로가 되고 나라도 망하였다. 그러나 휘종의 아들 중 한 사람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겨우 재건하였는데, 이를 남송(南宋)이라 했다. 남송 초 금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악비(岳飛)등의 주전론과 진회(秦檜)등의 강화론이 팽팽히 맞섰다.


악비는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불굴의 투지,뛰어난 전략으로 금나라 군대를 여러차례 격파하였다. 악비는 제갈량과 더불어 충절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중국인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관우와 함께 군신(軍神)으로 숭배되기까지 한다. 실제로 그는 금나라 군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뒀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 인기가 드높았다.

하지만 강남으로 달아나 항주를 임시 도읍으로 삼고 있던 송의 귀족들은 악비가 눈엣가시 같았다. 그러나 금나라에 잔뜩 겁을 먹은 남송의 황제 고종과 진회는 악비의 승리가 도리어 강화를 어렵게 한다고 보고 악비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서호의 풍광이나 즐기며 취생몽사하는 게 그들의 바람이었던 까닭이다. 진회는 가짜 성지를 만들어 악비의 병권을 빼앗고 소환하였다. 결국 송은 굴욕적 화친조약을 맺고 금의 속국이 됐다.  자신을 모함하여 죽일 것임을 직감한 악비는 침묵하였고, 물적 증거를 잡지 못한 진회는 ˝혹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수유(莫須有)˝의 세 글자로 죄명을 만들어 악비를 죽여 버렸다.


                                                                           막수유 [莫須有]
                                                                                                 莫 : 없을 須 : 모름지기 有 : 있을

˝혹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뜻으로, 반드시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있을지도 알 수는 없다는 말이다. 죄명(罪名)을 날조(捏造)함을 비유하여 쓴다.


대장 한세충(韓世忠)이 직접 진회에게 책임을 따지며 물었다.
˝악비에게는 도대체 무슨 죄가 있었던 것이오.˝
진회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럴 만한 일이 아마도 있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기사체막수유)].˝
이 말을 듣고 한세충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아마도 있을 것[莫須有]이라는 세 글자로 어떻게 천하를 납득시키겠소[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막수유삼자하이복천하)]?˝


악비는 나중에 복권돼 악왕(顎王)으로 추존됐다. 하지만 진회는 막수유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간신으로 등극한다. 오늘날 악비의 묘에 가면 진회가 결박된 죄인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있다. 지금은 막아놨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회의 동상에 침을 뱉고 발로 차는 것이 관광코스였다고 한다.


사람 사는 게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다. 못된 것 먼저 배운다고, 우리나라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런 ‘막수유(莫須有)’식 흑색선전이요, 네거티브 인신공격이다. 이제 달라질 때도 됐다. 그 쓰레기들을 차근차근 분리 수거해 잘못 버린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버린 쓰레기로 그들을 매장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문창극의 경우 그의 온갖 먼지란 먼지는 다 털었을 텐데 ---. 인만재판과 유사한 절차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반드시 무언가 있을 것이다˝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혹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여 악비와 같은 충신을 죽이는 일이 된 것 같다. 


여하튼 인성교육에 힘써서 우리의 후손들은 바른 길을 가도록 합시다. "부모는 아이의 교과서"임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