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2740 추천 수 0 댓글 1

조선 세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요약]
 
조선 세종
朝鮮 世宗
조선의 제4대 국왕
본명 이도(李祹)
대관식 1418년 9월 9일(음력 8월 10일)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
출생일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출생지 조선 한성 준수방
사망일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52세)
사망지 조선 한성
매장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
왕비 소헌왕후
자녀 총 22명 중 적자녀 10명:
정소공주 (1412년 출생),
문종 (1414년 출생),
정의공주 (1415년 출생),
세조 (1417년 출생),
안평대군 (1418년 출생),
임영대군 (1419년 출생),
광평대군 (1425년 출생),
금성대군 (1426년 출생),
평원대군 (1427년 출생),
영응대군 (1434년 출생)
부왕 태종
모비 원경왕후
이전 왕 태종
다음 왕 문종
왕조 조선

세종(世宗, 1397년 5월 7일[1]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이다. 성은 이(李), 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2][3]

조선 태종과 부인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형 효령군 이 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형 이 제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1418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군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 측근들이 사형당하였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황희,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 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20세기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초상화 인물이며,[4]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가 출범하였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상왕(태종)이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이 훙서한 후 1422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비디오] http://www.youtube.com/watch?v=qZGCEKA7YJM

최후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은 현대의 의학 용어인 뇌경색뇌출혈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은 비만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은 뇌경색 직전인 상황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3월 30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의 막내아들, 세종의 8남]집 동별궁에서 훙하다.[*1450년 음력으로 2월17일 별세](후략)

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서기1397년 정축]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

  • 최창균 2014.03.17 06:43

    異와 別을 존중, 서로 다름을 창조로 이끈 世宗

    박현모 한국형리더십개발원

    Premium Chosun

    입력 : 2014.03.01 03:03

    세종실록에서 보는 창의 - 古制라는 단어 398회 등장… 試驗·실용 단어도 많아
    옛 성공사례 찾아 배워라… 실용정신을 강조한 임금
    우린 중국과는 다르다 - 中華사상 물든 당시엔 그야말로 혁명적인 선언
    세종대왕의 '다름 정신' 창의 리더십의 시작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대는 세종 시대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500년도 전에 어떻게 그런 창의적 기풍이 조성됐을까, 창조의 저력은 어디서 우러나왔을까.

    '세종실록'에 자주 나온 말들에서 그 단초를 찾아봤다.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고제(古制)'라는 말이다. '과거의 사례'라는 뜻인데, 세종실록에 398회 나온다. 이는 그 이전의 태종실록 91회는 물론이고, 그 뒤 세종과 재위 기간이 비슷했던 성종실록 129회나 중종실록 54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세종이 요즘 말로 해서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최고의 성공 사례)'를 찾아서 배우라고 유난히 강조했기 때문이다. 정책 수립, 인재 쓰기, 진법(陣法) 등 여러 분야에서 세종은 고제를 찾으라고 했다.

    예컨대 세종은 1432년에 박아생이라는 사람이 "공자를 높여 문묘(文廟)를 만든 것처럼 태공망(太公望), 즉 주나라 문왕(文王)의 스승 여상(呂尙)을 제향하는 무묘(武廟)를 만들자"고 제안하자 집현전에 과거 사례를 조사해 올리라고 지시했다.

    재밌는 것은 "옛 사례를 조사해 오라"는 세종의 지시가 늘어나자 집현전 학사들은 아예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장서각이라는 도서관을 짓고 국내외의 책, 심지어 아랍 지역의 책까지도 구입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장서각은 무수한 과거 사례집의 집결처였던 셈인데, 세종 때 집현전 학사를 지낸 서거정에 따르면, 책들이 너무 많이 쌓여서 접근이 어려울 정도가 되자, 부문별로 모으고 표시를 해서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열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리더십 일러스트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세종은 또 농업 경영서 농사직설을 제작하기 위해 '각 도(道)의 관찰사에게 명해 여러 지방의 숙련된 농부(老農)들을 찾아가 방문'하게 했으며, 의방유취나 향약집성방 같은 의학 서적을 만들기 위해 '의관(醫官)을 선발해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서 약방문에 관한 책을 널리 구하게' 했다. '어떤 일을 기획할 때 (왕께서는) 반드시 옛것을 스승 삼았다'는 그에 대한 사후(死後)평가는 세종의 일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종실록엔 '시험(試驗)'이란 말도 자주 나온다. 시험의 의미를 담은 다른 말도 매우 많다. 농사직설 서문에 정초(鄭招)는 '농토에서 충분히 시험해 본 증험을 가지고 갖추어 아뢰었다'라고 하고 있으며, 세종 스스로도 '바람에 견디는 볍씨를 관청에 심어서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는 '기리고(記里鼓)를 시험해 사용'하기도 했다. 기리고는 왕의 수레가 1리(里)를 갈 때마다 나무인형이 스스로 북을 치게 하여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였다.

    특히 무기에 관한 실험을 유독 자주 했는데, 영화 '신기전'의 배경이 되기도 한 염초(화약 무기 제조에 쓰이는 물질)의 대량 생산을 위해 종래의 향염초 대신 당염초를 구워 만드는 법을 시험해서 생산량을 배가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독충에서 나오는 독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에게 중독 시험을 해 보는 황자후(黃子厚) 같은 뛰어난 의원이 나오기도 했다.

    '세종실록'엔 '실용(實用)'이란 뜻을 가진 말도 자주 나온다. 세종은 재위 중반부에 "내가 경서(經書)와 역사책 중에서 보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책을 읽는 것은 글을 보는 동안에 생각이 일깨워져서 여러 가지로 정사에 시행되는 것(施諸政事)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여 독서의 목적이 정책의 시행에 있음을 밝혔다. 농사직설을 편찬할 때도 농사에 필요한 것만 뽑아 편집하고, '농사 외에 다른 설(說)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쓰라'고 지시했다.

    세종의 실용정신은 한글을 창제할 때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그 목적을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즉 고제와 실험과 실용이라는 말을 아우르면서 그것을 창조로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태도가 있다. 바로 '다름'을 존중하는 자세이다. 세종실록에 '이(異)'와 '별(別)'은 태종실록의 3배 정도 자주 등장한다.

    '오방(五方)의 풍토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이 있어, 옛 글과 다 같을 수 없다'는 농사직설 서문이 한 예이다. '대개 지세(地勢)가 다름으로써 풍습과 기질이 다르며, 풍습과 기질이 다름으로써 호흡하는 것이 다르다'면서 우리에게 맞는 발음 표기를 위해 '동국정운'이라는 운서(韻書)를 최초로 펴낼 때도 '다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훈민정음 서문 역시 다름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세종이 다름을 강조한 것은, 그 당시 대다수 지식인들의 생각이 선진 문명국인 중국의 문자와 제도를 따라서 시행해야 한다는 중화주의에 깊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분위기에서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는 세종의 선언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세종은 이같은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다른 시각에서 과거 사례를 모으고, 새롭게 실험했으며,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인재들을 이끌어갔다. 창의란 것은 말로만 떠든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