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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음력으로 세종대왕 서거 564년 되는 날

by 최창균 posted Mar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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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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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세종
朝鮮 世宗
조선의 제4대 국왕
본명 이도(李祹)
대관식 1418년 9월 9일(음력 8월 10일)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
출생일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출생지 조선 한성 준수방
사망일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52세)
사망지 조선 한성
매장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
왕비 소헌왕후
자녀 총 22명 중 적자녀 10명:
정소공주 (1412년 출생),
문종 (1414년 출생),
정의공주 (1415년 출생),
세조 (1417년 출생),
안평대군 (1418년 출생),
임영대군 (1419년 출생),
광평대군 (1425년 출생),
금성대군 (1426년 출생),
평원대군 (1427년 출생),
영응대군 (1434년 출생)
부왕 태종
모비 원경왕후
이전 왕 태종
다음 왕 문종
왕조 조선

세종(世宗, 1397년 5월 7일[1]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이다. 성은 이(李), 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2][3]

조선 태종과 부인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형 효령군 이 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형 이 제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1418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군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 측근들이 사형당하였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황희,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 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20세기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초상화 인물이며,[4]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가 출범하였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22년까지 부왕인 태상왕(태종)이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부왕이 훙서한 후 1422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비디오] http://www.youtube.com/watch?v=qZGCEKA7YJM

최후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은 현대의 의학 용어인 뇌경색뇌출혈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은 비만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은 뇌경색 직전인 상황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3월 30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

임금이 영응대군(永膺大君)*세종의 막내아들, 세종의 8남]집 동별궁에서 훙하다.[*1450년 음력으로 2월17일 별세](후략)

세종 실록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2월 17일(임진) 1번째 기사

지중추원사 이선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다.

(전략)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요, 이름은 도(祹)이며, 자(字)는 원정(元正)이니, 공정왕(恭定王)[*태종]의 세째 아드님이었습니다. 어머니 비(妃)는 민씨(閔氏/*원경왕후)이니, 홍무(洪武) 30년[*서기1397년 정축] 4월 10일[음력]에 낳으셨습니다. 자람에 미쳐 충녕군(忠寧君)에 봉했는데,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습니다.(후략)

세종 127권, 32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2월 22일(정유)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