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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글은 아래 구달의 "영원한 생명"에

덧대어 올린 것이다.

구달의 게시글과 같은 분야의 주제로서,

당초 댓글로 달고자 했으나 

구달이 다른 글이 올라온 뒤 더 글을 올리겠다 해서,

부득이 게시글로 쓰게 됐다.


한기호의 베드로회 게시글에 붙여 얘기 좀 해보려고

여러 차례 마음먹기도 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깨끗한 신앙 이야기라서

나의 이런 이야기는 '초 치는 말'밖엔 되질 않겠기에

입밖에 내지 않다가,

좀 자유로운 구달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에 연관하여 

이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얘기하게 된 것이다.


읽는 이에게 당부하는 말씀,

이 글은 어떤 종교를 선전 폄훼 비방하려는 게 아니고

이 주제에 관한 내 생각의 유전流轉을 읊은 데

불과한 것임을 해량海諒해달라는 것이다.     



나의 유신론有神論 고백告白

 

천주교 신자인 나의 유신론은 불행히도 성경이나 교회에서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 밖 독서를 통해 찾은 것이다.

그나마 기독신앙의 본질에 가까운 신이라는 점이 다행일까?

 

성경 교회 신부 목사 교인들은 믿어라, 무조건 믿어라 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게 참 많다.

작은 불신不信들이 전체에 대한 부인否認으로 진화進化,

한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무신론無信論에 기울기도 했었다.

 

성경에서 믿지 못 하는 첫 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의 부활.

몇 해 전 부활절에 즈음해 신부神父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신부는, 

‘예수의 부활을 육신肉身의 부활이라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어른다. 

뜻밖이다.

그러나 그건 이미 나의 오래된 꼭같은 생각이었다.


예수가 살았던 신비의 시대엔 믿음이 진리를 얻는 첩경이었겠지만,

과학이 발달한 현대 지식의 시대엔 증명되어야 진리로 선다.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숱한 신비들은

인지人智가 미치지 못한 미지未知의 것일 뿐이다.


나에게 유신론을 세워 준 첫 번째 책은

Life After Life" (by Raymond A. Moody, Jr., M.D.),

그리고 그 속편續篇 "Reflections on Life After Life"이다. 

꽤 오래 전, 아마도 70년대 후반쯤에 읽었다.

 

저자가 의과대학원에서 죽음 주제의 강의 중에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게 수집되었고,

그 사후死後체험들이 인종, 성, 종교, 문화, 언어, 교육, 사회적 경제적 지위 등에 무관하게

공통된 내용들로 일관되어 있음에 주목, 

사례자들이 털어놓는 사후체험들을 연구하게 되고,

결과를 얻어 책으로 저술하기 이른 것이다. 

마침 같은 주제의 연구를 따로 진행하고 있던 의대학장 Elisabeth Kubler-Ross, M.D.가 반갑게 서문을 썼다.  


사후세계를 다룬 과학적 - 실험과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객관적이므로 - 연구의 효시로,

책이 출간되어 나오자마자   

종교계나 속세, 학계나 일반을 불문, 찬반 양론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추가 사례들이 수집되었고,

종국에는 속편續編을 저술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연구들도 일대 봇물을 이뤘다.

죽음의 과정이 정형화定型化되었고,

임사체험臨死體驗(Near-Death Experience, NDE) 용어도 생겨나 이젠 일반인에게마저 익숙하다.

 

이 책은 사후세계는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사후 존재인 영이 만나게 되는 빛의 존재

무한한 사랑의 존재, 그리고

사후세계가 곧 천국이고, 지옥은 달리 없다는 것을 밝힌.


빛의 존재는 사람만은 죽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또 영이 저지른 생전의 잘못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반성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하고,

사후死後에도 공부는 계속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이 빛의 존재는  

모든 것, 이승에서의 죄악마저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말 그대로 절대 존재다.

 

성경의 야훼YHWH(Jehovah)는 이와 달리 상대적이다.

사람보다 강력한 힘의 존재이긴 하지만,

야훼에게는 대적對敵하고 겨루는 신격神格의 존재들 - Satan, Beelzebub, Lucifer 등 - 이 있다.

"Paradise Lost" (by John Milton) 그 생생한 다툼의 이야기.

현세의 모든 종교, 기독교 이슬람의 일신교一神敎, 무신無神의 불교조차, 실상實相

다신교多神敎모습을 보인다.(Yuval N. Harari.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2014:Vintage books, pp.245-253)  


야훼는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보복도 한다.

다른 신을 믿으면, 징벌.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하신 분이 어째서 이럴 수가 있을까?

아훼에 대해 내가 어려서부터 품었던 의문이다.

내 불신不信의 시작이요, 요체要諦.


그러다가 “Life After Life에서 드디어 완전한 절대 존재가 있다는 답을 얻었다.

이 존재는 무한히 포용하는 사랑의 존재, 물성物性 인성人性 이성理性을 초월한 존재다.

 

뇌신경 연구자를 중심으로 사후의 현상이

산소 부족 시에 일어나는 뇌신경 현상일 뿐이라는 반론의 연구도 있었지만,

이 책의 골자 즉 사후세계와 영의 존재를 훼손하지 못했다.

결국 내 유신론도 뒤집히지 않았다.

유사한 연구의 다른 책도 이 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튜브 등에서 어떤 이는 지옥이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선교 목적의 위조물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도출한 또 하나 나의 결론,

신은 결코 이승의 일에 간여干與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위의 많은 이가 기도에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신無神인 사람, 심지어 무신巫神을 좇는 이조차

그런 유의 응답을 받는 이는 많다.

예수 하신 말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와 같은 맥락이다.


기도의 동기는 모두 그 사람의 사적私的 소망.

성경에서 언급되는 기도나 믿음의 주제도 모두 그의 개인적 사안事案이다.

나는 반문反問한다,

하느님

인류가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한결같이 갈구하는 원망願望

이 세상에 평화를 내려 주소서에는 

왜 아직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나요?

응답을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에 난무亂舞하는 죄를 하나씩이라도 없애 주실 수는 없나요?


19세기 영국의 천재天才 통계학자 프란시스 갈튼(Sir Francis Galton)은

좀 우스꽝스러운 연구이긴 하지만,

기도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통해, 기도가 효험이 없다고 결론하기도 했었다.

즉, 기도의 대상에게 기도 내용대로의 효과는 없고,

오히려 기도하는 이에게는 어떤 효험을 보인다는 것.


이 글과 맥이 꼭 닿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의 주요 다신교多神敎 - 그릭, 노르딕, 힌두 - 의 제신諸神을 지배하는  

최고의 존재 - Moira, Ananke(그릭), Ragnarök(노르딕), Ātman(힌두) - 도 

날씨나 전쟁, 건강 재물 같은

인간세상의 일에는 결코 간여하지 않는다.(Sapiens, pp. 238-239)  


나의 유신론에 깊이를 더해 준 두 번째 책은,

"The Magus of Strovolos: The Extraordinary World of a Spiritual Healer"

(by Kyriakos C. Markides). 10년 전쯤 읽었다.


미국 대학 지질학 교수인 저자가 안식년安息年을 이용해

고향 키프로스 스트로볼로스에 생존 활동하는 현자賢者 Magus

안식년 1년을 넘겨가며 취재 보고한 책이다. 소설이 아니다.


현자는 자신과 제자의 전생前生과 업을 훤히 알고 있다.

임의로 유체幽體 이탈離脫을 행하여

세상을 마치 빛처럼 돌아다니며, 환자의 업병業病을 치료한다.


업병을 치료하다가, 현자 자신에게

남의 업이 덧씌워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자는 치유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Karma과 윤회輪廻 Reincarnation

현자의 치유활동의 바탕이다.

그러나 치유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므로서 신에 귀일歸一하는 것임을 일러 준다.


윤회의 끝이 무에 귀결하는 것이 아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마음이 만든 허상虛像일 뿐이 아니고,

인간은 무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현자의 가르침 중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

이 타인他人의 인에 의한 과일 수 있다는 것.

즉 업은 꼭 나의 허물에 대한 벌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은 사랑의 실천에 신에게 연대連帶해서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은 범인류적 공통의 과업이다.

'Life After Life'와 연관해 생각하면

업과 윤회는 인간이 살아서 치뤄야 할 반성 공부의 한 형태로 보여진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모든 인류의 업을 치유하고자 대신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사랑의 극치極致를 모범한 지고지상至高至上의 예例.

다른 성인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밖에 존재하면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준 데 불과하지만, 

예수는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와 함께 한, 우리를 짊어진 분. 

예수를 가슴저리게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PS:

성경에서 내가 가장 주목注目하는 부분은,

산상수훈山上垂訓 (마태 5-7),

인간에 대한 가르침의 정수精髓로서.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외침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Eli, Eli, lama sabachthani?" (마태 27:46, 마가 15:34),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서.


PS2:

이 글을 쓴 한참 뒤인 2016년 1월에 읽은

"당신, 전생에서 읽어드립니다" (박진여. 2015:김영사)가 

업과 전생에 관해

나의 해석과 꼭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많이 놀랐다.


"업은, 벌이 아니고, 

이 생에서 치뤄야 할 공부이며,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

남의 업을 이전받기도 한다."


저자 박진여는 외국인도 포함된 내담자來談者의 전생前生을 읽어

업을 밝혀 주고 그 치유법을 제시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책은 그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독자에게 윤회와 업에 대한 바른 생각과 자세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저자는 대학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 병원에서 환자를 다루다가

자신에게 전생을 읽는 리딩reading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고

이 길을 걷게 됐다. 

저자는 무녀巫女가 아니므로 

자신의 일에 무신巫神의 조우助祐 받지 않는 독특한 능력자다.    










  • 구달 2015.10.06 03:59
    동성애의 운명을 타고난 이들을 대하는 교황 프란시스의 마음:

    If someone is gay and searches for the Lord and has good will, who am I to judge?
    어느 동성애 인이 하느님을 찾고 선행을 행한다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Who am I to judge?

    내가 사는 나라의 황제는 그 헌법 First Amendment (수정 1조)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or abridging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 or the right of the people peaceably to assemble, and to petition the Government for a redress of grievances.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Who am I to judge?

    우리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찾을 권한"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 인간 하나 하나에게 주신 절대의 권한입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가족을 가질 권한이 있습니다.

    Who am I to judge?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未平 2015.10.06 12:25
    구달,

    읽어 주어 고맙네.
    좋은 글이라 해 주니
    또 고맙네.

    게시글 생각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이 주제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싶었네.

    어떤 생각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스스로의 생각에도 자박自縛하지 않고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네.

    그러나 게시글로 쓰다 보니
    문의文義가 명백하도록 쓰게 됐네.

    "Who am I to judge?"
    공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