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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17:14

정년퇴임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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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의 글) "서울공대"지 2009년 가을호에 게재예정

정년퇴임 소감
최창균(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21회)


최근에는 제 젊었을 때의 꿈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아왔습니다. 이번 정년퇴임을 맞아 제 연구실 문하생들이 제 석사지도교수님이신 황선탁 선생님(현재 한양대 석좌교수)으로부터, 깜짝이벤트로, 저 모르게 퇴임 축하의 글을 받아 지난 7월9일에 있었던 문하생들과의 기념연에서 다음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 처음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연구실에 찾아와 “학위를 끝내면 곧 귀국해 후학을 양성하는 게 꿈”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제 젊은 시절 목표와 꿈이 교수였음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1976년에 클락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귀국하여 KIST에서 근무하면서도 서울대 공대에서 매년 강의를 하였습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로의 부임을 그만 두려고 하다가, 1978년 3월에 조교수로 시작하여 서울대 공대에서 31년 6개월을 근무하고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게 되니 감회가 깊습니다. 1978년 2월에 첫애를 얻고 “서울공대”지에 “예쁜 딸”이란 글을 기고해 제 큰딸의 이름이 서울대 공대에 널리 알려졌는데, 이제 다시 “서울공대”지에 퇴임소감을 쓰게 되니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나온 31여년을 회고하여 보면, 처음 10년간은 학생지도, 연구, 산학협동, 학회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 당시에는 학생지도가 최우선과제였습니다. 덕분에 師弟之間에 깊은 정이 오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연구비 지원의 태동기라 교내 연구비 규모가 작았지만 연구비 신청에 경쟁이 제법 있었습니다. 1977년에 한국과학재단, 1981년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전자의 경우, 연구비 경쟁이 치열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연구비 가뭄, 박봉의 시절이라, 교수 응모에 흔쾌히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다음 10년간은 대학자율화의 진통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선거로 총장, 학장을 뽑게 되었고 학과가 통합되어 학부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8년 3월 화학공학과는 공업화학과와 통합되어 응용화학부가 되었고 2005년 2월에 응용화학부는 화학생물공학부로 개칭되었습니다. 88올림픽을 지나면서 교수가 되고자 하는 열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제 20년간의 화학공학과 교수생활 중 제가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유학이나 취업 추천 및 지도, 주례, 딱한 사정이 있는 경우,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마지막 10여년간은 공과대학의 발전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2000년에 들어서서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운동을 싫어한 탓입니다. 여하튼 저는 전과 달리 공대 발전에 부응하지를 못 하였습니다. 속칭 SCI 논문의 작성에 열중하여, 학생지도와 사회봉사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물론 師弟之間의 정도 점점 소원하여져서 전과 달라졌습니다.

위와 같은 과도기 상황의 배경 하에서 제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어 우선 운이 좋았고 매우 기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적응을 잘 할 수 있었다면 보다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 명예로운 정년퇴임의 공은 제 연구실 제자들과 제 집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이 기회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평소 저에게 후의를 베풀어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부디 건강하시고 매사 뜻대로 이루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