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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을 1년 앞에 두고 ---

나는 내년 8월로 정년이 되어 대학을 떠나야만 한다. 때문인지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가 제법 있다. 공연히 내 심경을 글로 남기고 싶어 아래에 적는다.

나는 평일에 영어 작문 및 수정이 학교에서 하는 일로 고착된 지 오래되었다. 때문에 새로운 연구과제 발굴이 힘들어져서 자연대류문제 . 422 참조)에 안주하면서 지난 5년 넘게 연구비 신청도 하지 않았다. 4년 이상 학부 교수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공과대학 교수회의에는 20년 넘게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더욱이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니 교직원 만나기도 쉽지 않다. 찾아오는 사람도 전화도 거의 없다.

그러나 학부, 공대, 서울대의 발전을 염원하고 있다. 이는 이장무 총장의 다음 서신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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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감사합니다

보낸 날짜 2008/08/23 토요일 오후 6:00:44

보낸 사람 "이장무"

받는 사람 "Chang Kyun Choi" ,

최창균교수께;

감사합니다.
늘 학교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장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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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학회 참석도 하고 싶지가 않다. 사실 나는 수년 전에 두 학회의 펑의원을 자진사퇴하였다. 한국화학공학회의 경우, 일부 후배교수들이 평의원회장에서 노인들이 학회를 좌지우지 한다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것을 듣고 나서는 그들이 보기 싫기 때문에 평의원 사퇴를 했다. 또한 애처로워 국내학회지 구독도 중단하였다. 사실 NICE라는 이름도 싫었다. 더욱이 참고문헌 없이 쓰여진 기술논문들을 볼 때마다 표절 생각이 난다. 그러나 우리 한국화학공학회가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SCI저널에 논문을 많이 실리는 교수가 힘을 얻게 되기 시작하여, 전과 달리, 나도 현재까지 이에 주력하고 있다. 나는 SCI 저널논문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게재되는 논문 1편에 일정액의 연구비를 지급하라고 이야기하여 왔다.

더욱이 BK사업은 이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나의 경우 2000년 1월부터 2008년 8월까지, 저작권 이전된 저널과 Proceedings(열, 유체 학술회의는 보수적이라 대부분 저작권을 넘겨야 함)에 총 77편을 실었고 이 중 40여편이 SCI 저널에 실린 것이다. 이에는 대학원생들, 김민찬(제주대), 경희대의 김우식(화공)과 강용태(기계), 유재수(중앙대), 윤도영(광운대), J.M. Ward(전 Minnesota대) 교수의 기여도가 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내가 논문들을 직접 검토하였다.

간간이 영어교정을 유료로 보아주겠다는 서신을 내가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논문을 외부의 힘을 빌려 수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나는 해외 국제학술회의에 2년에 한 번 정도 참석하여 왔다. 2003년에 조홍제 군과 터키에서 열린 "International Symposium on Transient Convective Heat and Mass Transfer in Single and Two-Phase Flow"에 참석하여 “12 Best Papers”의 하나로 뽑혔다. 이 논문은 특집호 "Int. J. Thermal Sci. 43권 (2004)"의 817-823쪽에 게재되었다. 2005년에는 문주형 군과 그리스에서 열린 "International Conference on Heat Transfer, Thermal Engineering and Environment"에 참석하여 “Best Student Paper Award”를 수상하였다(첨부 1 참조).

정태성 군 등이 2004년에 “Probing Crystallization of Calcium Oxalate Monohydrate and the Role of Macromolecule Additives with in Situ Atomic Force Microscopy”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이, “Langmuir”(20, 8587-8596, 2004)에 표지로 채택되는 영예를 안았다(첨부 2 참조).

나는 2004년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32명 중 ‘최다논문수’, 그 당시 평가용 공식에 따라 ‘최대연구업적’을 이루었다(대학원생수가 급감하여 그 당시에 다섯 사람인 덕이었음). 2005년에 인센티브 1000만원을 각각 받게 되어 있었으나 인센티브의 중복 수령은 허용되지 않았다.

김화용 교수(학부장과 BK단장 역임; 2002-2004)가 ‘최대연구업적’이 좋다고 하여 ‘최다논문수’에 따른 관련 인센티브는 김 교수 권유에 따라 이종협 교수가 차지하였다. 이는 이지화 학부장(2004-2006)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연구비가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아 내 인센티브는 김재정 교수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2005년에 최대논문수 기준인 연구분야 성과급(교육, 연구, 봉사 각각 1인)을 내가 받았다. 작년에도 당시 이승종 학부장(2006-2007)이 내가 BK팀에서 자진 물러났으므로 1200만원의 연구비를 받으라는 것을 고사하였다.

나는 건강 문제로, 산보하려고 오후 3시반 정도에 퇴근한다. 요즈음은 날씨만 좋으면 서리풀근린공원(방배역에서 강남성모병원에 이르는 야산)을 걸어 집으로 간다. 건강하게 느낄 때에는 아침 7시반 전후에 학교사무실에서 일과를 시작한다. 서울대 병원에서 1년 이상 진료를 받아도 건강이 호전되지 않아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겨 새로운 두 주치의(내과 내분비, 신경정신과)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서울대병원과 달리 아산병원에서는 정신과 주치의가 내 상태를 물은 후 나를 내보낸 다음 집사람을 별도로 만나 집사람과 의견 교환을 하고 있다.

마음의 평온을 바라면서 ---

 

 

Posted at 2008-08-25 Mon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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