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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퇴임을 2개월 앞에 두고 ---





여러분께,




다음 달 8월31일부로 제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어 서울대학교 제 홈페이지도 오는 9월1일 문을 닫게 됩니다.


 

우선 그 동안 여러분들의 성원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정년퇴임을 기념하여 세미나(아래 참조)를 마련한, 한국화학공학회 이동현상부문위원회 위원장 김우식 교수님(경희대학교 화학공학과), 연사님들, 참석자 여러분, 꽃바구니를 보내주신 한국화학공학회 박준형 회장님, 또한 과분한 선물들을 주신 회원 여러분께 이 기회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김 교수께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저와 관련된 플래카드나 인쇄물이 없어서 기분이 좋았으나, 강연이 끝난 후 뜻하지 않은, 과분한 선물들에 놀라 여전히 마음에 큰 부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1986년 10월25일 이동현상부문위원회가 설립된 이래, 1990년에 제1회 이동현상 학력경시대회 운영위원장으로 일하였고 1993년 한국화학공학회 총무이사로서 경시대회 운영비를 학회에서 지원하도록 발의한 것 외에는 제가 부문위원회에 특별히 기여한 것이 없어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경시대회 운영비가 계속 학회로부터 지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 이동현상연구실이 개설된 1978년 3월이래(아래 약력 참조) 저와 함께 연구실에서 同苦同樂 하였던, 연구실 동문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동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아니었다면, 교수로서, 오늘의 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난 달에 보내 준, 생일 선물들 고맙다는 말을 이제야 늦게 전합니다. 특히 장기간 동문들을 대표하여 저에게 생일과 명절 선물을 전달하여 온 박진용 교수(한림대)께도 다시 고마움을 전합니다. 앞으로는 제가 동문들로부터 선물을 받기 보다는 동문들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여러분들이 제 위치를 바꾸어주면 매우 기쁘겠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스트레스가 커집니다.



저는 지난 3월 중순부터 계속 건강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대로 산보도 하지 못하여 지금 체중이 제 생전 최고입니다. "버리고 떠나기"에 따른 정신적인 충격 탓도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수집한 논문들은 물론 신문 스크랩도 다 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새 홈페이지에는 기쁜 소식이 더욱 많이 실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




최창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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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화학공학회 이동현상/공업화학부문위원회 합동 봄 세미나 개최




가. 일 시: 2009년 6월 12일(금)



나. 장 소: 고려대학교 하나스퀘어 멀티미디어 강당



다. 행사 일정(사회: 안경현, 윤도영)



14:30∼15:00 등록



15:00∼15:15 인사말씀


김우식 교수 (이동현상부문위원회 위원장)


최창균 교수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15:15∼15:45 정귀영 교수 (홍익대학교 화학공학과)


“Numerical modeling of the unit and the stack MCFC”



15:45∼16:15 김재정 교수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Copper Interconnection for high speed CMOS”



16:15∼16:45 김종엽 교수 (고려대학교 화공생명공학과)


“Pattern formation in granular mixtures”



16:45∼17:00 휴식시간



17:00∼17:30 김도현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생명화학공학과)


“Microfluidic system as a tool for miniaturization of biological devices”



17:30∼18:00 김우식 교수 (경희대학교 화학공학과)


“Application of Couette-Taylor Vortex to Crystallization”



18:00 ∼ 폐회 및 간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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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력




인적 사항



성명: 최창균(崔昌均)


직위: 교수


직장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생물공학부


직장주소: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599 (우편번호: 151-744)


집주소: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1-8 경남아파트 5동 705호


(우편번호: 137-765)


전화번호: (직장) 02-880-7407


(집) 02-2068-8757


이메일: ckchoi@snu.ac.kr 또는 ckchoiyou@gmail.com



학력



1963. 3 – 1967. 2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학사)


1971. 9 – 1973. 8 Iowa 대학교 화학공학과 (석사: 1972. 12)


1973. 9 – 1976. 5 Clarkson 대학교 화학공학과 (박사)



경력



1967. 1 – 1970. 7 한국비료공업㈜ [現 삼성정밀화학]


울산공장 암모니아과 사원


1967. 3 – 1969. 6 육군 소위


1976. 3 – 1978. 2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화학공정연구실 선임연구원


1978. 3 – 2009. 8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조교수, 부교수, 학과장


역임; 화학공학과,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주요 국내학술회의 활동



1979. 6 – 1981. 6 한국화학공학회 편집위원


1982. 2 – 1983. 5 태평양 화학공학회의(PACHEC) 운영위원


1985. 7 – 1987. 6 한국화학공학회 편집위원


1986. 10-1987. 5 SICHEM준비위원


1987. 6 – 1989. 5 한국화학공학회 편집이사


1988.11 한국화학공학회 학술상 수상


1990. 1 – 1992.12 한국막학회 부회장


1990. 1 – 1991. 4 제1회 이동현상 학력경시대회 운영위원장


1993. 1 – 1993.12 한국화학공학회 총무이사


1993. 1 – 1993.12 한국화학공학회 편집위원


1993. 1 – 1994.12 한국응용및이론역학회 부회장


1993. 1 – 1996.12 한국막학회 감사


2001. 1 – 2001.12 한국화학공학회 감사




최창균 교수는 1978년 3월13일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조교수로 부임한 이래 화학공학 관련 교육과 연구를 통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최 교수는 부임 직후부터 화학공학과의 교과과정을 개편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후 부교수로 학과장(1982-1986)직을 맡아 “화학공학 계속계육”을 실시하여 회사원들의 전문지식을 제고하였고 산학연구비, 산학장학생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대학원생들이 이 혜택을 받았고 취업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화학공학과 장기발전계획(안)”을 작성하여 학과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1988년에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최 교수는 학과외의 대학내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2개의 협동과정(생물화학공학, 의용생체공학)이 서울대 공대에 설치되는 데에 기여하였고 공대 내 각종 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공학계 대학원 학사관리(1981)”, “공학연구소 진로 및 발전계획(1986)”, “인사제도 개선방안(1991)”과 같은 보고서 마련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개교 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화학.섬유.원자력 산업에서 공학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서울대학교 관련분야 학문연구 50년 회고와 전망을 대변하였습니다.


1990년에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요청에 의거, “화학공학과 교육프로그램 개발연구”의 연구책임자로 최 교수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고 그 보고서가 각 대학에 배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교육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 해에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국화학공학회에서 ‘이동현상 학력경시대회’가 처음 개최되었고 최 교수가 초대 운영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최 교수는 연구 면에서도 많은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1988년에 한국화학공학회 학술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난 31년동안 자연대류의 유발요인 및 전달특성을 꾸준히 연구하여 왔습니다. 이외에도 분리막, 열교환망 합성, 결정성장, 고-액 분리 등의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200편이 넘는 학술논문들(full papers; 주로 공저임)을 국내외 학술지와 국제학술회의 Proceedings에 게재하였습니다. 이는 100명이 넘는 문하생들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최 교수는 국내외 학술활동에서도 열성을 보였습니다. 한국화학공학회 편집이사(1987-1989), 총무이사(1993), 감사(2001), 한국막학회 초대 부회장(1990-1992), 감사(1993-1996)를 역임하였습니다. 국제적으로는 ‘International Heat Transfer Conference'를 비롯한 열전달, 분리기술, 유체역학, 화학공학 관련 국제 학술회의에서 우리나라가 부각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 최창균 2014.02.08 19:42

    공대 이임사

     2009 9. 2

     

     

    안녕하십니까?  여러 교수님들을 뵈오니 매우 반갑습니다.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 어느 틈에 제가 서울대 공대를 이임하여, 이와 같이 저를 위하여 성대한 만찬을 마련하여 주신 공대 학장님, 교수 여러분들께 우선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1978 3월에 조교수로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31 6개월을 근무하고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지나온 31여년을 회고하여 보면, 처음 10년간은 학생지도가 저에게 최우선과제였습니다. 덕분에 師弟之間에 깊은 정이 오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구는 물론 강의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 해에 공동지도학생들을 포함하여 14명의 석사를 배출하였고 한 학기에 6과목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연구비 지원의 태동기라 교내 연구비 규모가 작아 연구비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977년에 한국과학재단, 1981년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전자의 경우, 연구비 경쟁이 치열하였습니다. 특히1980년대 중반까지는 연구비 가뭄, 박봉의 시절이라 많은 분들이 전국적으로 교수 응모에 흔쾌히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저는 1982년에 부교수가 된 후 3년여 동안 학과장직을 맡았습니다. 이 때 “화학공학 계속계육”을 시작하여 학과 재정의 확충은 물론 회사원들의 전문지식을 제고하였고 산학연구비, 산학장학생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대학원생들이 이 혜택을 받았고 취업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화학공학과 장기발전계획()”을 작성하여 학과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저는 학과장직을 사임하였습니다. 저는 1988년에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다음 10년간은 대학자율화의 진통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선거로 총장, 학장을 뽑게 되었고 학과가 통합되어 학부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8 3월에 화학공학과는 공업화학과와 통합되어 응용화학부가 되었고 2005 2월에 응용화학부가 화학생물공학부로 개칭되었습니다.

     

    제 첫20년간의 교수생활 중 제가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유학이나 취업 추천 및 지도, 주례, 딱한 사정이 있는 경우,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이 기간 중 저는 공대 또한 서울대 내 각종 위원회 위원으로 일하였습니다. “공학계 대학원 학사관리(1981), “공학연구소 진로 및 발전계획(1986), “인사제도 개선방안(1991)”과 같은 보고서 마련에도 참여하였습니다. 2개의 협동과정(생물화학공학, 의용생체공학)이 서울대 공대에 설치되는 데에 기여하였고 1996년에는 개교 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화학.섬유.원자력 산업에서 공학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서울대학교 관련분야 학문연구 50년 회고와 전망을 대변하였습니다

     

    제가 근무한 마지막 10여년간은 공과대학의 발전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2000년에 들어서서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운동을 싫어한 탓입니다. 더욱이 공대 발전에 부응하지를 못 하였습니다. 전과 달리 저는 학생지도와 사회봉사도 소홀히 하였습니다. 師弟之間의 정이 점점 소원하여져서 전과 달라진 탓도 있습니다. 여하튼 제 잘못에 대하여 사죄드리니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이 기회에 제가 좋아하는 말을 전하겠습니다

    항상 제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오래전에 작고하신 Kammermeyer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선생님은Iowa대학교에 화학공학과를 설립하셨으며 은퇴하실 때까지 계속 학과장(Head)으로 근무하셨습니다. 제가 화학공학과 학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다음의 네 단어를 마음 속에 지니면서 실천에 옮기라는 메모를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Patience + CIA
    입니다. CIA Communication, Interpretation, Adaptation을 뜻합니다. 즉 의사소통력, 해석력, 적응력과 함께 참을성을 계속 배양하여야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참을성과 적응력이 결여되어 평교수로 학교 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은 위의 네 글자를 마음 속에 지녀 승승장구 하십시오.

     

    제가 위와 같은 과도기 상황의 배경 하에서 정년퇴임을 하여 우선 운이 좋았고 매우 기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적응을 잘 할 수 있었다면 보다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 정년퇴임에 따른 공은 제 연구실 제자들과 제 집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이 기회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두 부디 건강하시고 매사 뜻대로 이루십시오. 공과 대학의 더욱 큰 발전을 기원하면서 ---.

     

    감사합니다.

  • 최창균 2014.02.08 19:52

    학부 전별사

     2009. 8 . 31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을 뵈니 매우 반갑습니다.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 제가 정년퇴임을 맞게 되어, 이와 같이 저를 위하여 성대한 만찬을 마련하여 주신 학부장님, 학부교수 여러분들께 우선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집사람이 작은 성의로 답례품을 마련하였으니 꼭 가져 가십시오. 미안합니다마는 참석하시지 못 한 분들께도 제 감사의 말씀과 함께 꼭 전하여 주십시오.

     

    저는 1978 3월에 조교수로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31 6개월을 근무하고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게 되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지나온 31여년을 회고하여 보면, 처음 10년간은 학생지도가 저에게 최우선과제였습니다. 덕분에 師弟之間에 깊은 정이 오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구는 물론 강의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1981 2월에는 공동지도학생들을 포함하여 14명의 석사를 배출하였고1982 2학기에는 6과목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연구비 지원의 태동기라 교내 연구비 규모가 작았지만 연구비 신청에 경쟁이 제법 있었습니다.

     

    1977년에 한국과학재단, 1981년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전자의 경우, 연구비 경쟁이 치열하였습니다. 특히1980년대 중반까지는 연구비 가뭄, 박봉의 시절이라 많은 분들이 전국적으로 교수 응모에 흔쾌히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다음 10년간은 대학자율화의 진통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선거로 총장, 학장을 뽑게 되었고 학과가 통합되어 학부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8 3월에 화학공학과는 공업화학과와 통합되어 응용화학부가 되었고 2005 2월에 응용화학부가 화학생물공학부로 개칭되었습니다.

     

    제 첫20년간의 교수생활 중 제가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유학이나 취업 추천 및 지도, 주례, 딱한 사정이 있는 경우,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제가 근무한 마지막 10여년간은 공과대학과 우리 학부의 발전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2000년에 들어서서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운동을 싫어한 탓입니다. 더욱이 우리 학부 발전에 부응하지를 못 하였습니다. 전과 달리 저는 학생지도와 사회봉사도 소홀히 하였습니다. 師弟之間의 정이 점점 소원하여져서 전과 달라진 탓도 있습니다. 여하튼 제 잘못에 대하여 사죄드리니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은 과도기 상황의 배경 하에서 제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어 우선 운이 좋았고 매우 기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적응을 잘 할 수 있었다면 보다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 정년퇴임에 따른 공은 제 연구실 제자들과 제 집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이 기회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저에게 후의를 베풀어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부디 건강하시고 매사 뜻대로 이루십시오. 우리 학부의 더욱 큰 발전을 기원하면서 ---

  • 최창균 2014.02.10 05:58

    (초청의 글) "서울공대"지 2009년 가을호에 게재예정
     정년퇴임 소감

     최창균(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21회)

     

     

     

    최근에는 제 젊었을 때의 꿈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아왔습니다. 이번 정년퇴임을 맞아 제 연구실 문하생들이 제 석사지도교수님이신 황선탁 선생님(현재 한양대 석좌교수)으로부터, 깜짝이벤트로, 저 모르게 퇴임 축하의 글을 받아 지난 7월9일에 있었던 문하생들과의 기념연에서 다음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 처음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연구실에 찾아와 “학위를 끝내면 곧 귀국해 후학을 양성하는 게 꿈”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제 젊은 시절 목표와 꿈이 교수였음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1976년에 클락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귀국하여 KIST에서 근무하면서도 서울대 공대에서 매년 강의를 하였습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로의 부임을 그만 두려고 하다가, 1978년 3월에 조교수로 시작하여 서울대 공대에서 31년 6개월을 근무하고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게 되니 감회가 깊습니다. 1978년 2월에 첫애를 얻고 “서울공대”지에 “예쁜 딸”이란 글을 기고해 제 큰딸의 이름이 서울대 공대에 널리 알려졌는데, 이제 다시 “서울공대”지에 퇴임소감을 쓰게 되니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나온 31여년을 회고하여 보면, 처음 10년간은 학생지도, 연구, 산학협동, 학회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 당시에는 학생지도가 최우선과제였습니다. 덕분에 師弟之間에 깊은 정이 오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연구비 지원의 태동기라 교내 연구비 규모가 작았지만 연구비 신청에 경쟁이 제법 있었습니다. 1977년에 한국과학재단, 1981년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전자의 경우, 연구비 경쟁이 치열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연구비 가뭄, 박봉의 시절이라 전국적으로 교수 응모에 흔쾌히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다음 10년간은 대학자율화의 진통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선거로 총장, 학장을 뽑게 되었고 학과가 통합되어 학부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8년 3월 화학공학과는 공업화학과와 통합되어 응용화학부가 되었고 2005년 2월에 응용화학부는 화학생물공학부로 개칭되었습니다. 88올림픽을 지나면서 교수가 되고자 하는 열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제 20년간의 화학공학과 교수생활 중 제가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유학이나 취업 추천 및 지도, 주례, 딱한 사정이 있는 경우,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마지막 10여년간은 공과대학의 발전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2000년에 들어서서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운동을 싫어한 탓입니다. 여하튼 저는 전과 달리 공대 발전에 부응하지를 못 하였습니다. 속칭 SCI 논문 작성에 열중하여, 학생지도와 사회봉사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물론 師弟之間의 정도 점점 소원하여져서 전과 달라졌습니다.


      


    위와 같은 과도기 상황의 배경 하에서 제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어 우선 운이 좋았고 매우 기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적응을 잘 할 수 있었다면 보다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 명예로운 정년퇴임의 공은 제 연구실 제자들과 제 집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이 기회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평소 저에게 후의를 베풀어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부디 건강하시고 매사 뜻대로 이루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