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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Vancouber, 경기고 동창회까페(   http://cafe.daum.net/vankyunggi/BITO/476 )에 접속되었다. 경기고 이전비화에 화동경기고는 11,000평이나 3배에 가까운 터를 받고 삼성동(32,250평)으로 옮겼다 한다. 이 까페에서 김의원동문도 만났다.        
           

  #아래는 강남개발의 주역이었던 손정목(86)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회고다.


손 명예교수는 1968년 건설부 산하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을 시작으로 1970년대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등을 지내며 강남 개발을 진두지휘한 강남개발사(史)의 산 증인이다. 그의 회고 가운데 경기고등학교의 강남이전 비화를 발췌하여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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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처음부터 고급 단지로 조성했으니 부자들이 너도나도 강남에 입주했겠다.

아니다. 다들 강남에 안 오려고 해서 고생했다. 오죽했으면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를 지어 공무원이라도 이주시키려 했겠나. 강남을 개발해 사람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 1972년에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이 학군 이동 아이디어를 냈다.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 등 5개 공립 학교와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 5대 사립이 당시 명문이다. 여학교로는 경기·이화·숙명·창덕·진명·정신을 알아줬고. 모두 종로구나 중구에 있었다. 이 학교들을 모두 강남으로 이동하는 구상이었다. 그러면 인구가 이동하며 강남이 빨리 개발될 거로 봤다.”

  

-저항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여론주도층이 모두 동문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지배층의 추억과 향수가 배어있지 않나. 그들 부인도 다들 그곳 출신이었다. 한국의 동문과 재학생은 물론 재외동문까지 나서 반대했다. 엄청난 파워더라. 경기고의 저항이 가장 심했는데 결국 화동(이전 전 위치)의 교사(校舍)는 허물지 않고 말끔하게 개수해 도서관으로 쓰고 교정도 단장해 도서관 뜰로 남긴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1972년 10월 삼성동 이전을 발표했다. 당시 경기고 땅은 1만1000평이었는데 이걸 3만2250평으로 보상해주고 새 건물을 지어준다는 조건도 추가했다. 아마 유신시절 중앙정부의 유일한 패배였을 거다.”(중략)

  

-강남 개발로 돈 번 사람이 많다. (당신도) 온갖 정보를 쥐고 있었으니 수백억원은 벌었을 것 같다.

전혀. 늘 남보다 1년 정도 빨리 개발 정보를 알았다. 돈가방을 싸들고 와서 알려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땅을 사지도, 정보를 돈 받고 팔지도 않았다. 돈벼락 맞으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강남의 대표적 땅부자인 김형목 (영동백화점과 영동고 설립자)이나 조봉구(가수 조덕배 삼촌, 전 삼호건설 회장)도 그렇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김형목은 자식 문제로 속을 썩였고, 조봉구도 삼호 파산 뒤 미국의 작은 원룸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하더라. 인생이 그런 거다.” (후략))

-1월 22일자 중앙일보 별지 특집-


출처: 경기고56회 김일두님의 글을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