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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의 글/ 프로의 글


                                                한 화학공학자의 좁은 세계
                                                        최창균(서울대 화학공학과 교수)

[호남정유(現 GS-Caltex) 사보, 3/4월, 24-25, 1988]


역사를 좋아하면서도 내과의사 아니면 소아과 의사가 되기를 꿈꾸었던 내가 화학공학자가 된 것은 사회조류에 순응한 결과이다. 화학공학을 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화학공학에 몸을 담게 된 것을 절실하게 후회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넓어져가고 있는 화학공학의 역사도 흥미롭고, 그 역사자체가 학문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공학은 넓은 세계이다. 1888년에 미국 MIT에서 좁은 공업화학을 근간으로 교과과정이 설정된 이래 1920년대에 이르러 단위조작의 개념이 도입되어 화학공학이 확립되었다. 1960년대에 이동현상의 기본원리가 가미되어 중간 크기의 공학과 미소한 공학의 접합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고분자, 생물기술, 인공지능, 반도체의 세계도 수용하여, 화학공학은 실로 화학, 물리, 생물학, 수학 등의 "자연과학"과 물질 및 에너지의 효율적인 "활용기술" 사이를 연결하는 넓은 교량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추세 속에서도 화학공학교육의 기본골격이 혁명적으로 변화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화학공학의 세계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민주주의가 꽃피우고 있는 나라에서 혁명을 기대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화학공학의 세계가 광대함에도 불구하고 화학공학자로서 나의 공학세계는 매우 협소하다. 나의 주요 연구분야는 이동현상 중에서도 자연대류에 관한 것이다. 1973년 9월부터 이역만리에 소재한 Clarkson대학교에서 관련연구를 시작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분야라고 내 자신이 선택하였기 때문이었다. 연구시작 수개월 후에, 어머니가 사랑하는 어린 아들의 건강을 위하여 적절한 시기에 젖을 떼듯, 지도교수이신 Davis선생님(현재 "University of Washington, Seattle"교수)이 연구방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던 때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I can help you no more!"

그 당시에는 실망이 매우 컸지만, 선생님의 냉철한 판단이 나의 지적 성장을 촉진시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실 선생님이 해결방안을 잘 알고 있는 문제이면, 왜 굳이 나에게 그 해결을 맡기셨겠는가? 타성에 의거 계속 지도교수님의 아이디어와 지도편달에만 의존하였다면, 나 자신의 창의력과 독립심은 영영 조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지에 대한 도전 또한 화학공학자로서의 나의 작은 세계를 개척하여나가도록 지도교수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었다.

또 다른 큰 계기는 내가 1976년 정월에 논문심사를 끝낸 다음에, 내 자신이 자축회를 대학근처의 자그마한 단골주점에서 개최한 밤에 일어났다. 어느 학생이 내가 사주는 맥주를 마시면서,

"You cheated your advisor!"

라고 나에게 말한 것이다. 내심 몹시 불쾌하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후일 결백함을 확인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사실 실험결과는 신빙성이 있겠지만, 이론을 뒷받침한 전산기 프로그램에 착오가 있다면, 이 학생의 말이 맞지 않겠는가? 여하튼 내 학위논문은 다음해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지에 게재되었고, 계산착오가 없었음은 귀국 3년 후인 1981년에야 부분적으로 확인되었음을 첨언한다.

위의 연구를 통한 교육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작은 세계이었지만, 지도교수께서 나의 능력을 감안한 연구윤곽을 설정하여 주셨고 나의 독창력을 조장하여 주셨다는 점이다. 또한 공학의 세계에서 완벽한 해를 구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신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학문제들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적인 사실을 잘 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완벽과 발전을 목표로, 단계적으로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자아형성도 이루어져야 함은 자명하다. 또한 공학의 세계는 심오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 이러한 견해들을 갖게 된 것은, 나에게 연구하는 방법을 찾아내게 하여 터득하고 발전하게 한 후 사회로 나를 배출시키신 지도교수님의 참다운 교육의 귀결이라고 굳게 믿는다.

미국에 사는 것을 좋아하던 당시의 우리나라 사회조류에 역행하여, 1976년 3월 1일에 나는 4년6개월 동안 그리워하던 조국으로 미련 없이 돌아왔다. 한국과학기술원(KIST)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우라늄의 회수, 습식인산의 정제, 인 화합물의 제조 등 각종 프로젝트들을 박원희선생님, 윤창구실장님의 지도하에 수행하였다(참조: 윤주영, "기억하고 싶은 화학공학자 윤창구," NICE,12, 627-630, 2006). 이와 같은 프로젝트들은 앞에서 언급한 자연대류, 또한 Iowa대학교에서 석사논문으로 수행되었던 막(membrane)분리 연구와 밀접한 연관성이 없음이 명백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리에 프로젝트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하는 자세와 방법을 연구 중에 터득한 데 힘입은 바가 매우 크다. 결국 대학에서 학사학위는 종합성, 석사학위는 전문성, 박사학위는 고도성을 보이는 교육의 소산이라고 생각된다. 내 소견으로는, 대학에서 젊은이들의 연구는 교육과정의 하나이다. 젊음이 있기 때문에 타성에 젖지 않고 독창력을 발휘할 확률이 높다. 독창력에 부가하여 연구하는 방법을 배운 나로서는, 나에게 부여되었던 프로젝트들이 내가 대학원 재학 중 수행한 연구내용과 달랐어도 그 내용이 종합적인 견지에서 화학공학의 기본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분야이었으므로 단계적으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여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978년 3월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교단에 서서 젊은이들과 호흡을 함께 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만하더라도 대학교수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자연대류와 관련된 연구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대학생활로 되돌아 온 것 이다. 교육과 학문적인 연구의 길을 걷게 된 지도 이미 10년이 지났다. 제자들의 성공이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賞)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자연대류를 비롯한  연구 면에서도 다소 성과를 보여왔다. 그러나 자연대류에 관한 연구의 경우에도 여전히 정확한 해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학문의 세계는 마치 미궁의 연속인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자연대류의 경우, 그 동안 이론적인 면에서 큰 진전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대학원시절 내 이론은 제한된 경우에 근사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 하면, 나는 그 동안 나의 박사논문 내용을 공격하여 온 것으로도 보여진다. 왜냐하면, 학문의 세계에서는 언론의 자유 보장 하에서 과오가 있다면 이를 시정하고 보다 완벽한 세계를 향하여 발전하고 나가려는 굳은 의지가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리에 맞는 비판을 수용하고, 비난을 위한 비난은 배제하면서 건전한 연구분위기를 조성하여 나가려는 전통이 지켜져 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연구에 의한 전문성 교육과 강의에 의한 종합성교육을 병행하여 젊은이들이 화학공학 분야에서 꿈을 실현할 의욕을 갖게 하는데 부분적인 기여를 장기간 하여온 나에게도, 여전히 교수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길 때가 가끔 있다. 역사가 짧아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교육, 연구, 학생지도, 행정에 걸쳐 전능한 사람이 교수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다방면에 걸쳐 유능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다가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날이 많다. 덕분에 나는 거의 연중 무휴가 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답답하다.

"교수는 방학이 있어서 좋겠어요."

우리나라의 고급스런 교수역할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교수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학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피상적인 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학기간 중에도 대학원생들에게 연구를 통하여 전문성 교육을 시켜야 할 책임이 교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화학공학 교수가 "프로"일까? 사전을 들여다보면, 교수도 프로라고 말하여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매우 어색한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겸비한 직업인, 즉 운동 선수, 바둑기사 등에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용어인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위 프로기질에서 금전적인 요소만 제외된다면 교수에게도 프로라는 말이 부분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경우, 화학공학이라는 좁다면 좁은 세계에서 화학공학과 관련된 지식을 젊은이들에게 전수하는 동시에, 자연대류와 같은 보다 좁은 세계를 젊은이들과 함께 탐구하면서 교육 및 공학적 지식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좁은 세계에서 탁월성을 영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를 쉽게 비유하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에서 수신(修身)이 힘든 이치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은근과 끈기 속에서 젊은이들의 참신한 창의력을 계발하여 그 창조물들을 축적시키는 동시에 넓은 세계로 전파시키는 나의 세계는 실로 매우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