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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5 00:04

프린스턴의 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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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의 봄 2007 (1)


3월 5일 (월)   그 간의 글을 단행본으로 엮어내다

     지난번 여행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돼 있었다.   "내일이면 여길 떠난다.   사랑하는
딸과 손녀를 두고.  허전한 마음은 매양 같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정아가 내년
3월이면 떡두꺼비같은 손자를 안겨 줄 테니깐.   그럼 그때까지 내 아이야 잘 있거라."

     그게 이번 3월이다.   좀 늦게 결혼한 정아가 분발을 하는 모양이다.   진아가
18개월도 안돼서 두째 아기를 낳는단다.   아무래도 제 에미의 손길이 필요한지 구원을
요청한다.   그래서 나도 밥해주는 사람 따라 치마꼬리 붙잡고 프린스턴으로 날아 가게
된 것이다.

     그 간 글이랍시고 끄적 끄적거려 여기 저기에 던저 두었던 것을 한데 묶어 책으로 펴
내기로 한 것이 작년 9월이었다.   꿈도 야무지게 유명 출판사를 노크하여 알아 보기도
하다가 온라인 출판 방식을 알 게 되었고 자비로 초판을 열댓권 만들어 몇몇 주위분들에게
읽어보라고 드렸던 것이다.

     그때에 넣지 않았던 세계일주 사진들을 첨부하고, 2006 년 글을 보강하여  "환갑에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   부제로 "우리 가족  그리고 여행 또 사랑 이야기"라고 타이틀을 정했다.
앞서 말한 세계일주 여행기에 그 간에 썼던 열댓편의 여행기 그리고 아내와 정아가
이메일로 나눴던 사랑 이야기를 같이 엮으니 300 페이지가 흘쩍 넘는 단행본이 돼고 말았다.

     3월 7일 미국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서둘러 출간을 마치고 일차로 50 권을 찍어 관심있는
분들에게 보내 드리고 10 여권을 여행 짐에 챙겨 넣었다.   두달 후 미국 여행에서 돌아오면
추가로 찍어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 드리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   나의 졸고가 하나의 책이
돼어 세상에 나왔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쑥스럽고 약간은 주눅들게 하지만, 그저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 온 생활 기록 이라 좋게 봐 준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3월 7일 (수)     프린스턴 가는 길에 용감해진 아내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싸게 사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이다 "컨티넨탈 항공"이라는
미 5위의 항공사가 세일을 한다기에 서둘러 예약을 한게 오늘이 출발일이다.   언제나
우리의 골치거리(?)인 몽이를 위해 아들내외가 우리집에 와 있기로 하고 새벽에 집을 나왔다.
    
     도꾜를 경유하여 뉴왁까지 가는 여정인데, 싼표라 그런지 도꾜에서 6시간을 체류한단다.  
그래도 우리는 오히려 이게 즐겁다. 왜냐면 라운지 패스가 있어 쉬며 놀며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리따 공항라운지에서는 캬라멜보다 조금 큰  미니 샌드위치에다 미니 컵라면을
주는 것이 참 일본스러웠다.

     체류시간이 길어서인지 아내의 옷매무새가 흩어져 있다.   그런가 싶더니 요사이  강화된
기내 보안으로 화장품을 휴대할 수 없었던 아내가  스스럼없이 화장품 면세점으로 돌진한다.  
그리곤 테스트용으로 진열해 놓은 루즈를 성큼 집어 입술에 바르는가 했더니 어느새 로숀을
집어 한손 가득 크림을 쥐어 짠다.    반듯하던 내 아내가 언제 이렇듯 용감해 졌나?   내가
평소에 주접(?)이 좀 있기는 하지만 나 닮아서 그리 됐나? 아니면 여인의 나이 먹는 과정이란
말인가?    
    
     젊었을때  직원들을 데리고 일본 출장을 가끔 왔었다.  그때의 일본은 그야말로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가 거의 환상적이었다.   아침만 돼면 일행을 이끌고 그리로 가서 시식용
쥬스에서 부터 수프, 달착치근한 어묵, 단내나는 미니 벤또까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떡에
모닝 커피까지 시식용만 찾아먹는 만용을 부렸었다.   그런데 이젠 그게 아내에게까지
전염되었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는 뉴왁까지 잘 왔고 마중나온  배불뜨기 정아 내외의 환호를 받으며
짐 4개를 찾아 싣고 프린스턴 집으로 왔다.   짐 4개중 하나를 바꿔 갖고 온 것을 안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밤 8시가 넘어서였다.  이민 빽이라 하는 펑퍼짐한 가방은 잘 구분이 않돼
대충 가지고 나온 것이 화근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짜 좋아하던 빚을 갚았다.    그 밤중에
프린스턴과 뉴왁을 졸린 눈을 비비며 그 먼길을 왕복해야 했고, 몇 시간 자기 짐을 기다려야
했던 상대방의 곱지않은 시선을 뒤로 받으며 쫒기듯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만 했다.


3월 10일 (토)     진아는 짐보리를 너무 좋아해

     지난번에 왔을때 불안하게 뛰뚱뛰뚱 걷던 진아가  이제는 달린다.   아이들이 두세살 적이
제일 예쁘다더니 18개월 된 진아가 바로 그렇다.   귀여운 몸동작과 장난기 있는 표정 그리고
우리보고 "하비, 하미"하며 알아 주는것이 눈물나도록 앙증맞고 몸이 다 근질근질하다.  왼손을
귀에 같다 붙이고 살레살레 뒤짚으며 "하이" 하는데는 정말로 애간장이 녹는듯하다.   아무래도
우린 팔불출인가 보다.   또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진아는 제 에미 아니 제 하비를 닮아서 인지 나다니는 걸 좋아한다.   동네 근처에
우리 나라처럼 애들 놀이방인 GYNBOREE 라는 곳이 있는데,  일주일에 서너번을 간다.  
주로 같은 또래의 아이들 하고 선생님과 부모들이 함께 놀이를 하는 곳인데, 정아가 배가 많이
불러 우리가 주로 데리고 다니는데 하비 하미는 비록 우리 뿐이지만 그 사이에서 휘젖고 노는
진아를 보면 프린스턴에서 인물났다는 말이 괜한 얘기가 아님을 실감한다.


3월 13일 (화)     부녀 유친

     취향이 비슷한 정아와 나는 한때 박광수 만화책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다 요즈음은
뜸하다 싶었는데 우연히 화장실에 꽂혀있는 박광수 책을 오랜만에 뒤적이다, 포스트잇
메모지를 한장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 필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정아에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빠외에는 팔의 힘이 다 할때까지 너의 팔을 꼭 끼고
있을 사람은 없다.   아빠가"

     우린 성격도 비슷해 자기 주장도 강하다.   이게 가끔은 마찰을 빚는다.   "아빠는 자기
얘기만 해.   내 말은 듣지 않고"   "애야 네가 그렇단다"     그때 정아와 나는 심각한 대화를
했던 것 같고 그래서 아빠의 심정을 이 글로서 전하려 했던 것 같다.

     원본의 만화책은 내용이 이러하였다.   어떤 일인지 그 날은 아빠와 같이 집을 나섰다.  
조금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분위기.   그래서 학교 얘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날 저녁 엄마는 웃으시며 내게 말을 건넸다.   "오늘 니가 아빠한테 팔짱을 꼈다며, 니 아빠는
그게 그렇게 좋은지 동네방네 온종일 자랑이더라..."     난 그날 비로소 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팔은 내가 태여나던 그 순간에도 내 팔을 감싸 주었고, 내 손을 그 남자에게 넘겨줄
그 순간까지 내 팔을 꼭 끼고 있을, 그리고 힘이 다 할때까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 팔을 놓지
않을, 내 아버지의 우리 아빠의 팔이라는 걸.........아빠 사랑해요.

     그때부터 우리 부녀는 각기 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3월 18일 (일)     두번째 손주의 탄생 전야 - 첫날

     배가 유난히 남산만하게 부른 정아를 보는 친정아버지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제 아내한테는 그렇게 해 놓고도 달다쓰다 한마디 않던 내가 제 딸에게는 애틋하다
못해 화가 날려고 했던 것이다.   여자만 왜 이리 스타일 구기며 고생해야 되는 것이지.  
쌍둥이가 아니냐는 주변분들의 우스개 말에도 선뜻 따라 웃어지지가 않는다.  

     재작년 진아때는 예정일보다 열흘을 일찍 낳는 바람에 스페인을 거쳐 여행중이던
우리는  그만 대를 잇는 역사적 순간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일찌감치 예정일 2주전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특히 이번엔 아들이라는 소견을
미리 받아 놓았기에 더더욱 생생한 현장 입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예정일이 20일이라 정아는 모든 회사일을 지난 금요일로 마치고 출산휴가 모드로
돌입하였고, 어제는 시내의 근사한 중국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들어 왔다.  
저녁이 되어서  배가 약간 아프기 시작하고 좀있어 주기적으로 아파하기 시작했다.  
밤 10시쯤 프린스턴 대학병원으로 들어 가서 드디어 오늘 새벽 5시에 아들을
순산하였다.   3.8 키로의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모든게 순조로워 담당 의사도 바라던
여자 의사가 교대 3시간을 앞두고 받았다고 정아가 좋아한다.   이미 아들이 나올걸로
귀뜸을 받은 터여서 별로 긴장된 분위기는 아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태아의 성별을
알려 주지 않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5개월 정도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해 준단다.  

     요사이 프린스턴에는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듯 영하의 추운 날씨에 강풍과 폭설로
스산한 분위기였는데, 새생명이 태어난 오늘 드디어 우리에겐 프린스턴의 봄이 온 것이다.


3월 19일 (월)     두번째 손주의 탄생 전야 - 두쨋날

     막 태어난 손자가 친정 할아버지를 닮아서 잘 생겼다는(?) 말을 사돈댁으로 부터
들어서인지 자주 아이를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30여년전 우리 아이들 때
생각이 떠올라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첫아이 정아는 아들딸 가릴 생각이 전혀 없이  우리들 사랑의 결실인 소중한 아기  
그 자체였었다.    문제는 두번째였다.   그 당시 풍조는 둘만 갖는 거였다.   그럼 이번에는
아들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서서히 들며 아들 낳는 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차,
예비군 훈련만 가면 단연 화두는 아들 낳는 비법을 나누는 것이다.   알카리나 산성 음식은
뭐고 언제 집중적으로 먹어야 하고 언제 어떻게 이렇쿵 저렇쿵...그래서 나도 뺑뺑이표를
사 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이리저리 돌려가며 코에 땀 흘리며 설명과 회유를 하곤 했었지.

     드디어 재원이가 태어나는 날이 왔다.   처가집 식구들은 아들이기를 빌고빌며 나에게도
기원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저 대범한듯 고결한척 "이 세상 인구가 반반인데 딸 낳았으니
이번엔 아들 아니겠읍니까?"  라고는 했지만 만약 아들이 아니라면 대를 잇는 핏줄이 어떻게
될 지 아련해지며 식은 땀을 몰래 닦고 있던 때였다.   눈을 감고 심장이 폴짝폴짝하는 소리를
내는 중에 들리는 장모님의 목소리, "어이쿠 최서방 축하하네"   이 소리에 살며시 눈을 뜨며
하는 흰소리는 "뭐, 당연한 것 아님니꺼, 세상 인구가 반반인데"   그러면서 나는 화장실로
급히 달려가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냅다 웃어 제꼈다.   속으로 몇번이고 같은 말을
되내이면서 "아들이라구, 어이쿠 아들이라구, 히히"   그땐 참 좋았다.

     정아도 강서방도 아기 나올때 "아들이야!" 그런 감격에 들뜬 소리는 듣도 하지도
않았을 껄.   그냥 그렇게 아기가 나왔나부다  덤덤했을 뿐이야.   더군다나 친정엄마인
내 아내도 다섯달전에 있었던 아들이라는 의사의 소견때보다 긴장감이 덜 했다고  할
정도이니.   그러나 그들은 혹독히 깨달았다.   그 다음날로 포경수술에 들어간 아기가
그 아픔과 두려움에 자지러지게 울며 또 울때, 옆에서 같이 눈물지어 주는 것으로 혹독한
아들 신고를 해야만 했던 것을.


3월 20일 (화)   미국에서 아기 이름 짓기

     정아가 아이를 출산한 "프린스턴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입원실은 그야말로 특실이다.  
10 여평은 족히 될만한 쾌적한 병실에서 ONE-STOP 써비스를 받는다.   애기를 받을 때도
의료진이 기계를 이동해 와서 입원실에서 받는다.   2박 3일의 몸조리도 그 방에서 그대로
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간호원과 의사들이 드나들며 아기와 산모를 돌본다.  
샤와실까지 딸려있고 보호자 침대도 편안하다.   복도에 있는 냉장고에는 쥬스와
아이스크림이 쌓여 있고 물론 커피도 셀프라 아무나 이용할 수 있다.   또 하루에 두번씩
아이스크림과 쿠키를 병실까지 돌려 우리는 그 재미에 하루종일 병실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모든 의료경비는 정아가 다니는 모토롤라의 플랜에 따라 그 혜택이 이만 저만이 아닌
것 같다.   또 6주간의 유급휴가와  12주간의 무급 출산휴가가 있어 8월까지는 회사 일을
보지 않아도 된다니 참으로 아이 낳기 좋은 환경이다.

     오늘 퇴원준비를 하면서 각종 기재서류에 아기 이름을 적어 넣어야 하기에 그 동안에
생각해 두었던 이름을 정리하여 드디어 "강 준성" 으로 영어 이름은 "David" 으로 했다.  
"재주와 슬기가 뛰어난 성품"을 갖고 "다윗왕과 같이 섬김의 지도자"로 커 나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여기 아이들 이름 짓기하면서 부모들이 고심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 적
생각이 나 가만히 웃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난 그 당시에는 통의동 체부동 그 동네에 작명소들이 즐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룡산에서 몇년을 수도하고 막 내려온 운명철학자라 하면서.   그래서
첫 아이인 정아는 김봉수라는 분에게서 수정같이 맑으라고 晶雅 였고, 3년 후 재원이는
백운학이란 분에게서 재상의근원이 되라고 宰源 을 받았다.     부모가 고민하지 않아
아이들한테 조금은 미안하지만 지금보아도 그 이상의 좋은 이름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스스로 위안해 본다.   그때엔 김봉수나 백운학이라는 이름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또 사례비도 3000원, 3년후에는 5000원이었던 것이 떠 올라 그 때 그 시대의 생활상을
잠시 회상해 보기도 했다.
    


3월 21일 (수)     봄이 시작된다는 춘분

     미국에 온지도 2주일이 되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늘어나는 시차적응일수와 정아의
출산에 대비한 스탠드바이 그리고 오랜만에 해후한 손녀와 해롱대는라고 집안에만 박혀
있었다.   이제 어느정도 급한 불은 껐으니 마음이 한가해 지려는데, 달력에는 오늘이 마침
Spring Begins 라고 되어 씌여있다.  

     모처럼 아내와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갔다.   이곳 프린스턴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를 보려면 동쪽으로 한시간 반이상을 달려야 한다.   그래야 그 광활한 대서양이 그리고
장장 200 키로나 되는 고운 모래의 져지 해변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은 이 해변의 북쪽 끝에
있는 샌디훅 국립휴양지로 향한다.   뉴욕항으로 들어 가는 입구에  자리잡은 10키로의
길쭉한 반도다.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자연 상태로 새하얀 비치가 반도 양쪽에 늘어서 있으며, 바다를
보고 달리는 자전거 도로와 산책코스가 봄의 눈부신 태양아래 보기좋게 뚤려 있었다.  
철따라 내려오는 새들의 서식처가 여기이고 그 북단에는 미국 초창기 랜드마크인 빨간
등대가 우뚝 서 있었다.   해안경비대가 있는 포트 행콕에는 군대 요새의 건물들과 총포들이  
여기저기 버려진 채 널려 있어 자연스러움을 더 해 주는듯 하였다.

     오늘은 그 동안의 을씨년스런 날씨에서 벗어나 봄 햇살이 따갑게 내려 쬔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썸머 타임으로 한낮이 더 길어진 가운데.   정녕 이제 봄은 우리 가운데
성큼 닥아와 있는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던킨도나스 집의 커피향과 크롤레아
도넛의 감미로운 맛이 우리를 봄날 오후의 나른한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데 충분했다.

                                                                             (프린스턴의 봄 2007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