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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4 10:13

프린스턴의 봄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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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의 봄 2007 (2)


3월 31일 (토)     나 설거지하며 살고 있어요

결혼을 하고도 계속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정아는 나름대로의 변이 있다.   자기는 집에서 살림하는 것 보다 회사 일하는 게 좋다고.   그래서인지 내가 보기에도 솔직히 정아는 집안 살림에는 별로 취미가 없는 편이다.

두째 아기가 태어난다고 제 어미를 부른 것도 아기 돌보는 일외에 집안 일도 좀 부려먹으려는 속셈이 있는 것을 나는 간파하고 있었다.     일이 되려는지(?) 집에서 일 도와주시는 분이 마침 우리가 도착하니 사정이 생겼단다.   그래서 우리가 오는 날부터 아내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일인 5역이라니…….     밥 세끼하고 사위 점심 도시락까지 챙겨 주어야지, 18개월 짜리 진아를 한시도 눈떼지 않고 뒤쫒아 다녀야지, 새로 태여나 시도 때도 없이 삐약대는 성준이 들쳐 업어야지, 산모 산후조리한다고 2층으로 밥 날라야지, 거기다 빨래 청소 설거지까지..아휴!

미국 생활이 다 그런건지 사위도 정신없이 바쁘다.   일주일분 장보아야지, 쓰레기 버려야지, 진아 산모 아기 돌보아야지, 틈틈히 설거지해야지, 그 와중에 짬짬히 회사 나갔다 와야지…..  

이런 소란스런 틈바귀에서 나도 좌불안석이다.   드디어 3주가 지나니 아내의 눈꼬리가   심상치 않다.   우리 이래도 눈치 하나로 여태까지 버텨온 몸이다.   그래서 며칠전 저녁이 끝난후 불문곡직하고  개수대 앞에서 고무 장갑을 꿰 찼다.   그리고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릇들을 일단 물에 행기고 퐁퐁같은 것을 스폰지에 묻혀 비벼 거품을 내서 닦아내고 다시 물로 깨끗이 씻어 낸다.   설거지 후엔 음식 찌거기를 모아 분리 수거통에 넣는다.    그리고 개운치 않은 마음을 털어내듯 고무장갑을 벗고 계면쩍은 웃음을 지으며 돌아 선다.  

이렇게 몇번의 설거지를 하고 나서  손가락 끝이 가렵기  시작하더니 열손가락중 일곱개 손가락에서 살이 터지고 피가 베어 나오는 증상이 생겼다.   누구는 무좀이라 하고 누구는 주부 습진이라 한다나.   약을 바르고 밴드에이드로 동여매고 3일을 그렇게, 마치 배구 선수들이 열손가락에 반찬고를 부치고 운동 시합하듯이.

조상께서 보고 노하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보시면 경을 칠, 어머니가 아시면 대성통곡하실, 사나이 남자 대장부가 설거지 통에 손을 담갔으니, 오호라 통재여.
어이구 그만두시라는 아내의 핀잔과 함께 여하튼 그 날부터 설거지 면제는 받았지만, 무엇으로 밥값을 대신해야 할찌 난감한 나날을 보내는 신세가 돼 버렸다.



4월 4일 (수)      봄의 단상


봄비 내리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제법 굵은 빗줄기다.   이곳 프린스턴 대학교 교정에는 노란 수선화와 아름들이 자목련이 한참이다.   길가의 샛노란 개나리가  우리 동네 양재천을 오롯이 떠오르게 한다.   이제 벚꽃이 만개하는 소식도 남녁에서부터 들려오며, 그 유명하다는 워싱톤의 벚꽃놀이도 엊그제부터 시작이란다.   이렇게 봄비가 쏟아져 내리니 덩달아 마음이 젖는다.

창문너머로 매화가 그 다섯꽃잎을 오므린채 봄비를 흩뿌리고 있다.   비로 몸은     비록  젖지만 그 의연함을 몸으로 받쳐 내는 듯하다.

               千年老恒藏曲
               梅生寒不賣香

               오동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늙어가며
               항상 거문고의 소리를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 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다

이런 기개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멋지지 않은가?


봄비가 가슴을 젖시면 어머니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게 다가 온다는 어머니에 관한 시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작자 미상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찬밥 한덩어리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발뒤꿈치가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손톱이 깎을수조차 없이 닮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덕없는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읍니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우시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읍니다


4월 6일 (금)     워싱턴으로 벚꽃 구경 가기

우리나라의 진해 벚꽂놀이가 있듯이  이곳 미국은 워싱턴의 벚꽃이 장관이란다.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우리의 진해와 똑같이 4월 5일이 만개란다.   미리 워싱턴 인근에 호텔을 예약해 두고 드디어 오늘 아침 3시간 반 먼길을 달려 11시반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포토맥강변의 “타이들베이슨”연못 주변으로 벚꽃이 줄지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본이 1912년에 미국과의 우호증진을 위해 기증한 3000여 그루의 벚꽂이 연못 주변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물에 반사되는 벚꽃이 일본에서도 으뜸으로 쳐 준다는 것을 따른 거란다.   올해로 95번째 벚꽃축제가 2주간 열리고 있는데 오늘이 그중 피크란다.

그런대 이걸 어쩌나!   우리가 도착해 보니 이미 벚꽃들은 시들어 있었다.   요사이 기상이변으로 한동안 더위가 오는듯 하더니 또 꽃샘추위가 이어졌는데 아마 일찍 피고 일찍 꽃잎을 떨어뜨린 것 같다.   인터넷이 오보를 한 걸까 아니면 축제를 망치기 싫어 업데이트를 하지 않은 것일까?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게 자못 흥미로웠다.   마침 근처에 유명한 씨푸드 시장이 있어 각종 싱싱한  수산물을 팔고 있길래 찐게를 한”다즌” 사서 포토맥 강가 풀밭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 보며 와드득 씹어 발라 먹으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연못 주변을 한바퀴 돌기로 했다.   100년된 아름들이 벚꽃나무들이 그 가지들을 연못을 향해 다이빙을 하고 있고 그래도 반쯤 남은 벚꽃 송이들은 많은 상춘객을 위로하고 있었다.   3대 대통령인 제퍼슨 기념관이 이 연못 옆에 세워졌을때 벚꽃나무가 훼손된다고 반대도 많았다 하며, 한쪽에는 32대 대통령인 루즈벨트 대통령 (유일한 4선 대통령) 기념 공원이 산책하기에 좋은 장소로 사랑받고 있었다.

또 그래도 아쉬어 이번에는 그 옆의 Memorial Loop (기념비 순례)를 하기로 했다.   최근인 2004년도에 세워진 “이차 세계대전 기념비”에는 분수와 연못과 석주들이 위용을 자랑했고, 최초로 유엔군의 이름으로 22개국이 북한과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해 참전을 기념하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가 1995년 건립되었다.     16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노예제도를 폐지한 “링컨 기념관”이 그 끝에 우뚝 서 있으며 그 안쪽 일직선상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초대 대통령 “워싱턴 기념탑”이 200미터 높이로 내셔널 멀의 중앙을 지키고 서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 주려는 듯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꽃을 내려 주었는데, 그 것은 꽃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 봄눈(春雪)이었다.


4월 9일 (월)     버지니아의 사적지와 마운트 버넌

워싱턴에서 버지니아의 샤롯빌을 오가며 몇군데를 구경하였다.   엊그제 내려오면서 들른 워싱턴 근교의 “매나사스 전투지”는 남북전쟁당시 1861년과 1862년 두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아직도 그때의 대회전을 잊지 못해 그 명칭도 북부는 “불런”이라 부르고 남부에서는 “매나사스”로 부르고 있을 정도란다.

오늘 아침에 올라오며 들른 “프레더릭스버그”는 오래된 역사적 도시로 1608년 스미스선장이 이곳을 찾아왔었고, 그 이후 초대 워싱턴 대통령도 어린 시절 여기서 자랐으며 5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먼로도 이곳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었던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또한 남북전쟁당시 치열한 시가전으로 유혈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워싱턴 근교에 있는 “마운트 버넌”을 방문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사유지로서 19개의 방이 딸린 저택과 정원과 농장 그리고 하인숙소와 워싱턴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40년간을 살면서 (물론 그 간에 독립군 사령관으로 8년간의 독립전쟁을 이끌었고, 독립후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던 때도 있었지만) 직접 농사일을 돌보던 진짜 농사꾼이었단다.  

모든 국민의 칭송을 받으며 대통령직을 물러나 이곳에 정착한 워싱턴은  2년후 갑작스런 감기로 이틀간을 앓다가 1797년 67세로 사망하였다.   세상을 멋지게 살다가 오직 이틀간의 아픔만으로 세상을 떠난 그가 몹시 부럽다는 아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일생을 두고 그를 사랑했던 아내 “마사”도 2년후에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 곁으로 갔다하니 이 역시 부럽다.    

그래서 나도 슬며시 아내를 떠 보았다.   나 떠난 후에 몇년을 더 있을 거냐고?    날 진정 사랑했다면 2년 정도면 어떤가 하고…..삶의 무게가 가볍게도 그러다가도 무겁게도 느껴지는 건 변덕이 심한 봄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4월 16일(월)   아내의 태몽

아침 잠결에 아내의 달뜬 목소리가 들려 온다.   “여보, 나 태몽 꿨나봐”     화들짝 놀란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요사이 나, 나쁜 일 한일 없는데!”   아내가 꼬집는 바람에 그제야 잠에서 깨었다.   “어이구, 꿈 좀 깨시라우.   우리가 아니라 며느리 말이야!”

며느리가 우리집에 들어 온지도 어언 2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 아이가  없다.   직장에 나가기도 하지만 저희들끼리 공부를 더 할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요사이 또 다른 기회가 생겨 본격적으로 2세 계획을 다시 세운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쉽사리 않되는지 고심을 하여 원형탈모 증세까지 보인다는 전화 목소리에 은근히 걱정을 하던 차다.

아내가 지나가다 들여다 본 동굴에는 온통 자수정이 번쩍거렸는데 그 속에서 아이 모양의 자수정이 생겨나 걸어 오더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그것 같은데, 아내가 너무 강박증이 생겨서 자면서도 그런가 보다하고 그냥 웃어 넘겼다.

아내의 말로는 정아가 태어날때는 큰 수레에 고추가 가득 실려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아니 그럼 아들이 태여나야 됐을텐데 그게 아니었고, 재원이 때는 푸른 풀밭에 장미 한송이가 피어 난 것을 보고 태몽인 줄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럼 어째서 장미가 아들이냐구?    그냥 꿈을 꾼것을 태몽으로 연결시키는게 아닌지 정말 난 모르겠다.

누운채 가만히 손을 꼽아 본다.   280일이면 지금부터 9달후인 내년 1월 하고 열흘이면 월말쯤 되려나?   훗훗, 속으로 미소가 스믈댄다.    그래, 잘하면 내년 1월 말에 손주를 보는 거야!   이번엔 진짜 손주, 친손주를 보는 거라구!    

글을 쓰는데 아내가 걱정스럽게 막아 선다.   “아직도 모른는데….유정이가 알면 스트레스 더 받겠는 걸”    그래서 내가 냉큼 안심을 시켰다.   “아니면 또 어떠 누,  꿈은 꿈일 뿐인데”      밖을 보니 노란 개나리가 어젯 밤 내린 비로 진한 황금빛갈을 띄고 너울대고 있었다.


4월 17일 (화)     건망증과 더불어 사는 삶

우리가 정아네 집에 오면은 편리한게 두가지가 있다.     우리만의 방이 별채에 항상 준비돼 있고 전용으로 자동차가 있다.   내방에는 컴퓨터가 있고 욕실이 있어 어느 때는 하루종일 방에서만 죽치고  책도 보고 인터넷도하고 글도 쓴다.    자동차는 정아가 처녀때 쓰던 “혼다 아코드”를 내 용도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 차를 몰고 어디든지 간다.   가까운 시내건 멀리 버지니아건.   근처 교민교회의 새벽기도도 나가곤 한다.   우리가 주로 나가는 “찬양교회”는 뉴저지 중부에서는 비교적 큰 교회로 출석인원이 어른만 700명이란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한국사람들이 모여 드는지 처음에는 무척 신기하였다.   물론 이민사회에선 교회가 신앙 목적뿐만 아니라 생활의 방편으로서도 그 역할이 만만치 않다 한다.

준성이가 태여나서 처음으로 엊그제 주일날 교회에 갔다.   아이가 둘이라 베이비 씨트를 각기 차에 설치하고 (여기서는 법이란다, 우리도 그런가? ) 사위는 아우디를 나는 렉서스를 몰았다. 그 날은 하루종일 폭우가 쏟아지고 강풍이 몰아 치는 날이었다.   교회가 끝나고 나오는데도 비바람이 여전하다.   한손에는 우산과 다른 손에는 아기 짐 보따리를 가득 들고, 그 와중에 주머니에서 렉서스 키를 꺼내야만 했었다.

집에 돌아와 주머니를 뒤지니 허전하다.   기본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던  혼다 차의 키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빠뜨렸는지 모르겠다.   생각이 가물가물한게 영락없이 건망증의 증세다.   이 키는 원래 있던 키를 잃어버려 유일하게 남아있는 “발레파킹용” 키라 또다시 만들려해도 키에 보안장치가 돼 있어 혼다 대리점으로 토우해서 제작해야 된다고 하며 돈도 200불이 든단다.

집안을 온통 뒤져도 집 주의를 아무리 불을 키고 뒤져도 키는 나오지 않는다.   교회에서 빠뜨렸나 해서 전화를 걸어도 불통이다.   그렇게 우울한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에 교회에 가서 찾아 보려고 나섰다가 폭우로 도로 여기저기에 홍수나 나서 폐쇄된 도로가 많았다.   할 수 없이 어제는 꼼짝못하고 오늘 교회로 전화하니 분실물 신고가 없다 한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직접 가 보기로 하고 교회 주차장에 들어서 엊그제 주차한 장소로 가 보았더니 멀리서 황금 덩어리같은 게 반짝였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키였다.   반가운 마음에 덥썩 쥐고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그 사이 이틀동안 내린 폭우에도 떠내려 가지않고 또 쓰레기차에 쓸려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오롯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 비바람속에 키를 꺼내다 두 키가 뒤엉켜 하나는 떨어졌음이 분명하다.  그 날 이후 쉬지않고 나를 격려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의뢰한 아내의 힘이 컸음을 고백한다.   얼마 전에는 백화점에서 지갑을 여니 그만 내 신용카드가 보이질 않아 혼비백산하여 국제전화로 분실신고를 하고, 집에 와서 점퍼를 뒤지니 거기에 있질 않은가?    내 원 참.   나이가 이렇게 되었나?   이제는 어느정도 건망증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전능자를 향하여 마음의 평안을 구해야만 되는 때가 온 것이다.
                                                  (프린스턴의 봄 2007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