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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종교


기독교는 생명과 사랑 그리고 긍정(믿음, 은혜, 소망)의 종교이다. 그런 기독교가 나는 좋다.


아담의 원죄


우리의 무의식 밑에는 딜레마와 불안이 있다. 기독교는 그 딜레마와 불안을 직시하여 해결책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우리는 풍요의 자궁을 떠나 태어나면서 자아를 갖게 된다. 자아는 소중한 것이지만 자기 중심적이기 쉽다. 그 자아는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찾아 독립한다. 그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용기있는 선택, 자아의 성장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자아의 자기 중심적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나님도, "인류의 시련과 구원"을 구상하며, 속으로는 자아의 그런 선택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아의 일방적 선택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사랑속의 신뢰)이 없다. 오히려 반발, 비웃음, 적대감이 있다.


자아가 선택한 그 길은 무한한 풍요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길, 따라서 죽음과 결핍의 세계로 운명지어진 길이기도 하다. 그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죽음과 결핍의 세계에 갇힌 우리는 불안하다.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결핍과 불안을 해결하고 싶다. 우리는 쉽게 탐욕에 빠진다. 경쟁과 성공, 명예와 권력의 추구로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더욱 목이 마를 뿐이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원죄"(창세기 2:7~3:24)의 의미를 오늘의 우리 처지에 비추어 재해석 해 본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아담에게 허용한 "선택의 자유"(자유 의지)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 자유는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 뜻대로 조종된다면, 그는 로봇 인형에 불과할 것이다. 로봇 인형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강제가 없다. 오히려 에덴을 떠나가는 아담에게 따뜻한 가죽 옷을 입혀준다. 가죽 옷은 십자가를 예표한다. 거기에는 피흘림의 자기 희생과 용서가 있다. 아담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


알에서 막 깨어난 거북이 새끼는 바로 바다를 향해 질주한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바다이다. 거북이류 전래의 DNA에 새겨진 바다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인류 전래의 DNA에 새겨진 기억이요 자각이다. 인류사는 우리 각자의 인생사에 축약된다. 우리 각자는 아담이다.


믿음과 은혜


예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를 통해 우리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을 제시한다. 부자 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아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의로운 아버지, 잘난 형에 대한 반발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가지고 나온 재산 모두를 허랑방탕으로 탕진하고 가난에 쪼들리다 못해 고향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무조건 기뻐하며 잔치를 벌인다. 이 둘째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풍요한 집에 다시 들어가려면 그를 아버지로 그냥 믿기(사랑하고 신뢰하기)만 하면 족하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도 같이 주어진다.


우리는 이런 대가없는 은혜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회복에 무슨 노력과 성취, 선행과 자선, 도야된 인격이 필요한가. 오직 믿음 즉 사랑 속의 신뢰가 있으면 된다. 관계가 회복되면 인격과 행위는 자연히 따라 온다. 오히려 모범과 공적을 내세워 아버지의 아들 자격을 사려는 첫째 아들의 교만이 문제이다. 거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사랑과 신뢰)이 없다. 아버지(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그의 교만에는, 동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멸시도 있다. 두 아들은 내 마음 속 두 개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가인과 아벨


예수의 비유 "돌아온 탕자" 의 두 아들이 아담의 아들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아담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낳는다.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 둘째 아들 아벨은 양치기로 연명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예물은 받고, 가인의 예물은 거절하는 일이 벌어진다. 절망과 분노, 질투와 시기에 눈 먼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쳐죽인다. 가인은 동생의 피로 물든 땅에서 저주를 받아, 가난 속에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가 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어떤 표를 주어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은혜를 또 한번 베푼다. (창세기 4:1~15)


왜 하나님은 두 아들의 예물을 똑같이 받지 않았을까. 안타깝다. 동생 아벨은 "하나님의 것"(사랑과 믿음)을 바쳤으나, 형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사랑과 신뢰) 없이 "세상의 것"(재물)을 바친 것이 아닐까. 가인은 믿음없는 재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하나님과 거래 하려는, 교만의 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스타인 벡은 가인과 아벨을 소재로 쓴 소설 "에덴의 동쪽"(엘리아 카잔 감독이 영화화)에서, 아벨을 형, 가인을 동생으로 형제의 순서를 바꾸어 튀스트 한다. 그래서, 형 아벨과 동생 가인은 "돌아온 탕자" 비유 속의 모범적인 형과 허랑방탕한 동생에 각각 대입된다. 소설(영화) 속에서, 아버지 아담은 모범적인 형 아벨의 선물(애인과의 약혼 발표)은 받지만, 허랑방탕한 동생 가인의 선물(돈)은 거절한다. 절망, 분노, 시기, 질투속에서 가인은 형의 애인까지 빼앗으며 형 아벨을 파멸로 몰아간다. 결국,  모범적이지만 형식(율법)에 매인 형 아벨은 아버지를 배반하고, 허랑방탕한 동생 가인이 오히려 아버지와 화해하는 반전으로 소설(영화)은 결말을 맺는다.


내 안에 "가인과 아벨"이 뒤섞여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인의 "허랑방탕"에는 그 이면에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율법(규범, 형식)과 위선에 대한 반발, 억제된 자유와 독립의 열망, 거절당한 사랑과 열정, 그로 인한 분노와 좌절, 시기와 질투, 이해받지 못한 억울함, 수용 안된 미숙한 믿음(사랑과 신뢰)과 방황 같은 것들이 숨겨 있을듯 하다.


교만, 가장 큰 죄


기독교에서는 허랑방탕보다도 교만이 더 큰, 아니 가장 큰 죄라는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겠다. 교만에는 형식적인 모범, 세상의 공적과 위선, 멸시와 자기 자랑, 혼자의 독단이 있다. 하나님과의 거래와  경쟁, 그에 대한 비웃음과 적대감, 은혜의 외면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사랑과 신뢰)이 없는 탓이다. 교만은 영적으로는 원죄의 핵심이다. 예수가 심하게 경고 질책한 바리새인(마태복음 23:1~39)은 모범적인 학자, 공적이 많은 지도자들이다. 당황스럽다.  그러나 나의 교만과 위선, 내 "마음 속의 바리새인"을 해결하기 위해 내 혼자 노력으로 할 일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인격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우쭐거리는 나는 실상은 세상의 인정을 구걸하는 걸인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나같은 걸인, 두 모습의 나까지도 "원죄와 죽음"의 수렁에서 구해 내려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렸다. 그럴 목적으로 그는 이 세상에 왔다(요한복음  3:16~17). 하나님은 문제 많은 세상과 흠 많은 인간을 여전히 사랑한다.


믿음과 회개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죄 밑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 나는 허랑방탕하고 또 교만하지만, 은혜의 가죽 옷을 입은 아담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나의 이 흉한 모습 그대로 받아달라고 그의 집 문을 두드리면 된다. 그 때에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해 들었던 반기(반란의 깃발)와 교만을 내려놓고,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받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회개"라고 부르는 이 일은 여지껏 달려가던 방향에서 180도 뒤로 돌아 서는 것이다. 믿음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집, 천국의 문은 회개와 믿음으로 열리는 문이다. 그 문은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8)


예수의 십자가 


믿음은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구원자)에게 나를 맡기는 것이다. 그러라고 하나님이, 무한과 유한을  가로 막는 장막을 찢고, 사람 예수의 모습으로 지구에 왔다. 죄와 죽음에서 나를 구하려고, 영과 혼, 피와 살로 된 사람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 내 모습이 아무리 흉해도 상관 없다. 맡김은 포기이므로, 자아는 포기와 죽음이 두렵다. 두렵지만 일단 나를 맡기면 나머지 일은 예수가 할 것이다. 그는 나의 자기 중심적 자아, 못생긴 자아를, 그와 연합된 진정한 자아, 결핍 없는 온전한 자아로 바꾸어 갈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피 속에서 그의 인격에 연합할 때, 미천한 나는 그의 신격에도 동참하게 된다.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박힌 나의 옛 자아는, 그 곳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예수와 함께, 예수를 닮아가는 새로운 아담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흠 많은 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될 것이다. 드디어 다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내가 다시 태어나도 아직 남은 옛 자아는 머리를 들 것이다. 계속 꿈틀대는 옛 자아를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옛 자아는 삐딱한 자식과 같다. 이들은 집 안의 원수들이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함께, 이 원수들을 인정하고 용납하고 사랑해주고 보듬어 안아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원수들이 예수와 연합된 진정한 자아에 스스로 합류하도록 하는 것이다. 집 바깥의 원수도 다르지 않으니, "원수를 사랑하라"(누가복음 6:35). 이 것이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한 방식이다. 은혜의 방식이다. 믿음 안에서, 예수가 옆에서 도와주므로, 이 일이 가능하다.


천국과 부활


믿음으로, 내 마음의 밭, 무의식 속에 숨겨진 진짜 생명의 씨앗, 애초에 아담 안에 심겨졌던 그 씨앗을 찾을 수 있다. 그 씨앗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 내 마음 안에 천국이 세워질 것이다(마가복음 4:31~32). 그 믿음의 문은, "여기서 지금", 이웃과의 사랑, 용서, 화해의 관계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는 문이다(누가복음 17:21). 믿음은 이웃을, 오늘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문은 몸이 죽은 후의 나를 다시 살려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처음에 사람이 바다를 날아서 건널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1927년 린드버그가 최초로 대서양을 쉬지않고 날아서 건너기에 성공하였다. 이제 그 사실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대서양, 태평양을 날아서 건넌다. 2000년전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기에 성공하였다. 이제 그 사실을 믿는 사람마다 부활하여, 천국에 가게 된 것이다. 그 믿음의 문은 유한(자연)을 돌파하여 무한(영)의 세계로 진입하는, 인간 진화의 최종 단계 관문이다. 나는 이제 무서워 떨며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된다. 평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가 좋다.


재산의 관리


예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누가복음 16:1~13)에서, 부자 주인은 맡긴 재산을 자기 소유처럼 낭비하는 청지기(관리인)를 해고 하려고 한다. 그러자 청지기는 마음을 돌려, 주인의 뜻대로, 맡은 재산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며 사랑을 베푼다. 주인은 그런 청지기를 칭찬한다.  예수는 청지기인 우리가 세상의 기업인들 못지않은 지혜로 세상의 재물도 성실하게 관리하라고 가르친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의 또 다른 비유인 "은화 열 므나"(누가복음 19:12~27)에서, 주인은 맡긴 재산을 열배로 늘린 하인을 칭찬하지만, 안전하게 그대로 보관만 한 하인은 집에서 내 쫒는다. 예수는 우리의 믿음, 생활, 사업에서, 안전 대신 위험(모험)을 감수하는 용기를, 현실 안주보다 창의와 혁신을 주문한다.


최근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임팩트 투자는 투자의 혁신이다. 사회, 환경, 빈곤층의 유익, 세상의 변화를 위한 투자이지만, 높은 투자수익도 추구한다. 수익을 재투자하여 그 일을 지속하고 발전시킨다.


아브라함을 필두로,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모험과 혁신, 변화를 택한 인물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속보다는 자유를 주고 싶어한다(요한복음 8:32). 그는 긍정적이다. 미래 지향적이다. 그는 변화를 좋아한다. "나(하나님)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요한계시록 21:5).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

 

세상("황제")의 시민으로서는 세금도 내고 세상 법도 지켜야 한다. 돈, 학식, 명예, 직함("세상의 것")도 필요하다. 마스크(인격)에 이런 것들을 담아 세상의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다. 마스크를 벗은 나의 민 낯을 세상에 보이는 것은 끔찍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  천국의 시민 자격을 "세상의 것"으로는 살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것"(사랑과 믿음)을 바쳐야 한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마가복음 12:17).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세기 4:1~15)를 기억하라.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수 없다"(누가복음 16:13).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목적이라면, 믿음 안에서, 재산, 재능, 성공은 유효한 수단일 수 있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면 우상 숭배가 된다. 


부자와 천국


바슈롬 콘택트렌즈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70%에 육박하여 이익을 많이 내고 있었다. 나의 바슈롬 코리아 합작사업도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바슈롬 본사가 눈 건강에도 좋고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새로운 디스포저블 콘택트렌즈 기술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수익이 많은 기존 콘택트렌즈 사업에  대한 집착과 자기 만족으로, 더 좋은 것을 외면한 것이다. 이런 실수로 바슈롬 콘택트렌즈 사업부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10%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많이 가진 부자는 가진 것에 집착 한다. 하나님 대신 자기의 능력을 믿는다. 더 좋은 것(은혜, 천국)을 준다 해도, 집착과 자기 만족으로 그 은혜를 외면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마태복음 19:23~26). 부자는 특히 쉽지 않겠지만, 집착과 자기 만족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면 된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받으면 된다.  자기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지낸 아리마대의 요셉은 의회의원이자 부자로서 예수의 제자였다(마태복음 27:57~60).


 사회제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빌려 세상("황제")의 제도를 만든다. 그 사회제도는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다. 동시에 인간의 자기 중심성, 하나님을 떠나 생긴 자아의 결핍감, 이로 인한 탐욕은 그 제도와 사회를 부패시킨다. 자유시장경제는, 오늘도 계속되는 산업혁명과 결합하여, 인류에게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부익부 빈익빈의 극심한 사회적 불균형의 부작용을 같이 만들어 낸다. 매매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에 "은혜"의 법칙을 관통시킬 때 시장의 부작용이 해소된다. 그럴 때에 "보이지 않는 손" (시장의 원리)이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것은 최근 경제·경영학 학자들이 깨달은 사실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생긴 인간의 탐욕은 하나님을 다시 밈음(신앙)으로써 치유된다. 그에 따라 제도와 사회의 부패도 치유될 수 있다.


영, 믿음의 본향


"예수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 주장은 기독교 초창기부터 있었다. 그 것은 소수의견이지만, 거기에 지금의 기독교에 대한 어떤 혁신성이 있는지 살펴 볼 필요는 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이나 루터의 종교개혁이 당시에는 소수의견이었지만, 그 소수의견이 당시 기독교 신학(교리)의 잘못된 곳을 고쳤기 때문이다. "사흘만에 부활하여 승천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귀신을 쫓아내 병든자를 치유한, 그리고 물위를 걸은", 또 눈먼 자를 고치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인 등등의 기적을 행한 예수를 못 믿겠다는 것은 다수의견이다. 이 것을 믿겠다는 것은 오히려 소수의견이겠다. 다수의견인 자연(이성)의 눈으로는 예수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소수의견인 영의 눈으로는 이해가 가능하다. 영은 믿음의 본향이다.  


우리의 영은 생수(하나님 말씀)가 밑에서 흘러드는 우물이다. 예수는, 그 자신이 생수이면서, 우물에 고인 생수를 위로 퍼내어 우리의 의식으로 전달해 주는 두레박이다. 우물(영) 위의 뚜껑이 닫히면 두레박(예수)은 소용 없는 것처럼 보인다. 두레박(예수)의 존재조차 부인하게 된다. 닫힌 우물(영)에서는 생수를 더 이상 퍼낼 수 없다. 생수를 위로 퍼내지 않는 우물에는 생수가 더 이상 밑에서 흘러들지도 않는다. 결국은 마른 우물(영), 영적으로 잠자는 자, 죽은 자가 된다. 우리의 우물(영)은 열려 있어야 한다. 우물에서 생수를 계속 퍼내서, 우물로 생수가 계속 흘러 들어오게 하여야 한다.


세상의 다수의견에 대하여, 기독교는 아직도 소수의견이다. 세상에 대하여 예수는 혁신이다. 서로 다른 의견과 주장들의 진위는 시간이 판정할 것이다. 기독교와 예수의 가르침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원한 생명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꿈꾸며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태어 났다. 성경을 펼치면 그  꿈과 소망이 사랑과 믿음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기쁜 소식이다. 그 꿈과 소망을 단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기독교가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