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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용 교수와의 조우


중학교 입학부터 고교 시절 1학년 까지 나는 꼬맹이여서 출석번호가 5번을 넘은 적이 없었다. 겨우 고교 2학년 때가 되어서야 13번이 되어 상당한 도약을 했었고 3학년 때는 내 키가 훌쩍 커서 무려 49번이나 되어 나는 앞줄에 앉아야 하는 꼬맹이 신세를 면했었다.


이런 신체적 차이나 성장 속도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학창시절 나는 박교수와 별 접촉이 없었다.  같은 반이었던 때도 기억나지 않고 다만 고3 때 그가 한창  대입 모의 고사에서 이름을 날릴 때 그의 이름을 들어서 아 그런 녀석이 있구나하는 정도로 기억할 뿐이다. 그 전 까지는 그도 급우들 간에 그렇게 두각을 나타 낸 적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내 기억으로 그는 우리 졸업 때 이과에서 수석을 했고 문과 수석은 작고한 권호장 군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박교수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30이라는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나 찾아간 오레곤 주립 대학에서 였다.  그 때 박교수는 학위과정을 거의 끝내고 학위 논문도 사실상 끝낸 상태에서 소위 디펜스, 즉 지도 교수단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학위 논문을 발표하는 과정만 남겨두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그는 학위를 끝내고 훌로리다 대학의 조교수로 잡을 잡아 떠났다.  내가 늦은 나이에  유학이라고 와서 영어도 서툴러서 쩔쩔 매던 어려운 시기에 그를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은 당시 나에게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와의 조우 기간은 아마도 6개월을 많이 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나에세 많은 호의를 베풀었고 지금도 나는 그 때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소중히 생각한다.


내가 기숙사 밥을 먹다가 김치 생각이 나면 학교 구내의 나의 기숙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의 집을 찾아서 김치에 대한 갈증을 풀기도 했고 그가 떠난 후, 나는 그의 집을 물려 받아 그가 살던 집에서 살기도 했다.  나에게 싸브마린 샌드위치를 처음으로 맛보게 해 준 사람도 박교수였다.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이 나면 나는 동네에 있는 싸브웨이에 가서 1피트 짜리 샌드위치를 사 먹곤 한다.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던 나에게 오레곤 대학 농구팀 경기를 처음으로 구경시켜 준 사람도 그였다.  당시 오레곤 대학 농구팀 중에 죤슨이란 흑인선수가 있었는데 (매직 죤슨이 아니다) 박교수가 나에게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야 귀영아, 저 친구 정도면 박사 10명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을 돈을 받을 거다  당시 박교수는 그의 호탕함으로 좌중을 압도하여 한국 학생들 간에는 대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좋은 추억을 가진 내가 박교수로 부터 내가 후배들에세 자신에 대한 욕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글쎄이 사람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기는 한데 나는 그런 식으로 남의 뒤통수 치는 못나고 못된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럴 동기도 없고 그럴 이유가 도데체 없다.  지금도 나는 박교수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무런 나쁜 감정이 없다.  그러니 박교수, 문제가 무슨 개인 적인 감정문제라면 이제 그만 나에 대한 노여움을 푸시게나.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와 나는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상당히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것 같다.  그의 말 대로 의견이 다른게 문제될 것은 없다.  아니, 사실 그 말은 정확한 말은 아니다.  의견이 다른 것은 분명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더구나 문제를 감출려만 드는 것이 정말 문제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문제대로 남아있게 되고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은 모든 것을 테이불에 올려 놓는 것이다.


사람들은 같은 사안에 대해서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는 거의 금기시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다.  정치문제, 종교문제 중에서도 특히 금기시 되는 것들은 지역정서 문제, 5.18에 대한 역사적 견해,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등등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  등등.


이런 여러가지 사안에 대해 박교수와 나는 아마도 거의 정 반대되는 견해를 가질 것 같다.  이는 물론 그동안 몇 개의 그의 짧은 글을 통해 내가 받은 인상에  근거한 나의 추측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서울 상대 교수로 한국 경제사를 전공하신 안병직 교수는 한 때 잘 나가는 좌파의 대부였고 운동권에서 이름을 날리던 강사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사또루 교수의 중진자본주의론을 접하고 또  박정희 정권말, 한국 자본주의가 망할 것을 예측했던 그가 깡패 같던 전두환이 들어서서 김재익 같은 철저한  자유시장 경제주의자를 수석으로 앉히고 한국 자본주의를 꽃피게 하는 것을 보고 대 전향을 한다.   그런데 그 동안 많은 제자들에게 잘못된 사상을 가르친 책임을 절감하여 많은 제자들과 지인들을 만나서 설득을 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었다는데그는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친교를 유지할 수는 없겠는가 질문한다.  나도 동일한 질문을 한다.


이 사이트만 해도 그렇다.  왜 그렇게 가리는 것이 많고 제약이 많을까?  정치와 종교는 인간 활동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문이다.  이런 중요한 부문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것을 왜 금해야 하는지?  이 사이트의 구성원들은 그래도 엘리트라 불릴만한 사람들 아니던가?  김평우 동문이 email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나이에 무엇이 무서워서 할 말도 못하는가


헤이, 박교수! 그대의 글이 삭제된 것은 내탓이 아닐세.  이 사이트 운영자들의 방침이지.  나는 자네 말을 듣지 않는게 아니라 적어도 현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 자네와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세.  그리고 내가 옹호하는 것은 법치이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이지 개인 박근혜가 아니야.


아무리 그렇더라도 LA에 올 기회가 있으면 연락하게.  그래서 우리가 묵혀둔 감정이 있기에는 자네와의 접촉기간이 너무 짧았지만 혹시라도 오해가 있다면 확 풀어보세.  그리고 우리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찾아보세.

 

LA에서 정귀영

  • 정귀영 2016.12.24 01:04
    시인이란 자신의 내밀한 내면의 세계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들어내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괜히 잘난 척하며 화려한 언어의 유희나 펼치는 글이란 솔직하지만 소박한 글 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보네. 뭐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프라이버시 까지 들먹일 필요가 있겠나. 그만 고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