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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9일 자유게시판에 올려진 좋은 기록물 사진은 우리동문이 서울 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이상억교수가 50년 이상 보관하고 있던 귀중한 자료를 경기고등학교에 기증하는 날 교정의 한 모퉁이에서 사진 촬영한 것으로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의 글을 이상억학우를 대신하여 게제합니다.

정년 후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그 동안 보관해 오던 중고교 시절의 유물들이 나타났다.
경기고 동창회에 지난 4월 25일 걷기대회 때 기증한 잡지 ‘경기‘ 12권을 비롯하여 ‘경기’ 3호 편집 교정지, ‘순간경기’, ‘주간경기’ 및 영자신문 Kyunggi Youth 등이었다.
그중 59회 졸업식을 보도한 ‘주간경기’에는 우등생과 공로학생 명단까지 나오는 흥미로운 부분도 있으니, 화면 확대를 해서 읽어보면 당시 누가 어찌 했는지 사실증명이 다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글을 붙여 보라는 편집인의 명령을 백분 받들기 위해, 별도로 발간을 준비 중인 본인의 정년기념논문집 중에 넣을 “국어학도로서의 반세기: 언어학과의 통섭”이란
회고록 가운데서 아래와 같은 부분을 발췌해 냈다.

<기고> 신문 “순간경기”와 잡지 “경기” 시절
                                             이상억

나는 초등학교 6학년쯤 글쓰기에 취미를 붙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무렵은 공부에만 집중했던 시기라 청계국민학교 졸업 때 교육감상을 받고
경기중학교를 7등으로 입학해 으쓱해 하기만 했다.
글쓰기에 더 열을 올리지는 않다가, 아마 2학년 때 나중의 운명적 행로로 향하려고 그랬는지
신문반을 가입해 ‘순간경기’  제1면을 편집했다.
이후 ‘이승만’이란 어용시 작문시간에 시가 뽑혀 신문에 실렸고,
중 3때 급기야 옛 과거시험 자리였던 창덕궁 영화당 앞에서 열린 전국 백일장에서
‘도서실’이라고 주어진 제목에 대해 쓴 1석 시로 어느덧 문학에 기웃하기 시작한 소년이 되었다.
결국 이 일이 나중에 전공까지 하게 된 단초가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아래에 보이는 바와 같은 소년시 ‘도서실’에 대한 평은 “비유가 형이상학적 경지에까지 이르러 책이나 도서실이 안 보인다”는 요지였다. 그래도 독서에 취미가 있다는 분위기는 잘 나타냈던 듯하여 과연 내가 15세 때 이런 시를 썼었나 싶다.
내가 살던 광교 옆 삼각동 에서 장교까지 하류로 내려 오면 통나무를 치싸놓고 파는 야적장들이 있었는데, 백일장 아침에 종로 3가로 가는 길 섶에서 맡은 통나무의 펄프 냄새가 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무수한
갈피마다
풍기는
생생한 통나무 내음.        
나는 푸근히         
마셔 버리고 푸다.         
아니        
가슴 속에 소롯이 피는 들꽃으로나,         
가슴 속에 뭉게지는 뭇꿈으로         
하고 푸다.

눈을 따라
주줄이 일었다
슬어지는 이슬의 알 알.         
나는 알뜰이 주워모아         
마음 속에 뚜렷한         
또 하나의 눈알을         
이루련다.
가을이 저물 녘에나는
푸섶 사이로 나부끼는
커단 덩굴잎을 하나 주워서
맥맥이 흐르는
깊은뜻을
캐려 애쓴다.

  이렇게 시인연(然)하다가 고교입시가 다가 왔는데 세 자리 석차까지 내려가 어쩌면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생겨 벼락공부 끝에 의외의 21등으로 진학하였다. 너무 안도를 하면서 고교로 가자, 또 안 해본 문예반을 가입해 잡지를 내 보겠다는 객기가 생겼다. 1학년 때 배운 솜씨로 3학년 때 격년호를 맡아 입시 공부는 않고, 멋있는 초고교급 잡지 ‘경기’ 3호를 출간하였다.  

  이때 한국학 특집도 넣어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이기문 교수님의 ‘국어학의 전망’에 대한 글을 실었었다. 나중에 내 지도교수가 되셨고 그 글 내용이 내 분야가 되어 버릴 것으로 그때는 예상을 못했었다. 그밖에도 엄선한 교수님들 글만 십편 가량 넣어 마치 고교판 ‘사상계’ 같은 잡지를 편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래 도면의 시 앞 머리 일부와 같이 새로운 활자의 역상(逆像) 사용법도 시도하였었다. 잔뜩 이상(李箱)의 영향을 받아 내 필명도 이상(栮相)이라고 했을 때니까 무슨 짓인들 못했으랴!

거리의 神秘와 憂愁 [마을안 이야기, 두 째                                                                             李 相 億                        
또 感堵安 의때 릴뻐해말 고라'秘神'
[<여기서 읽기 시작해서 s자처럼 진행]
                      
'憂愁'라고 말해 둘 때의 隱密한 즐거움과 스며오기 始作하는 기쁨.                        
.終至初自 은먹러글 ,른투서 한 는되下拂 에字活 P9 ,소로비 ,서래이
I.諸神이 退却한 이 거리로 나는 角笛 하나만을 꼲고 ㄴ아간다.
黃昏에 비낀 古風한 列柱의 거리를 돌고 마침내 돌아, 色音도 狼藉한 破片, 破片과 차마 향그러운 砲煙의, 그 莊嚴한 廣場 어구에 이르르면, 나는 삐에로의 입같은 웃음을 웃으며 華奢했던 饗宴의 날을 反芻한다. 헌데 난 暫時,어디에 있을가??.........................................................
아주 幽幽怪怪한, 出入口 잊은 洞穴을 안다네.거기,
거기서 '裏'라는 즘생이 제법 難處하게 '恩寵'을 熱誠으로 默禱하고 있네만,
嘲笑와 詛呪와 抗辯으로 아리 새혀진 저 壁畵가 壁으로(하여금) 存在ㅎ게 한다는 것을 느껴 보게나. [후략](www.sangoak.com의 ‘문집원고’에 전문 수록)


S자 모양으로 활자를 배열하되 역상까지 활용한 이런 작업은 활판 인쇄에서만 가능한 것이어서, 컴퓨터 조판이 판친 뒤에는 역시 본 일이 없다. 시 내용에 김광균의 이미지즘의 영향도 받은 점이 있고, 하여튼 왜 이런 글을 썼었는지 지금은 잘 설명할 수 없는 환상이 그 무렵에 머리 속을 들락거렸던 것 같다.
홍이섭, 황수영, 이기문, 이능우, 김동욱, 이두현, 장사운 교수 등 열 분의 글을 받아 잡지를 일반인용 수준으로 잘 내기는 했지만, 애초의 의대 희망은 접고 취미대로 국문과로 오는 길에 불가피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지금 와서 과거를 돌아보니 이 때 오히려 잘 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설픈 애타심에서 품게 된 슈바이쳐의 꿈보다는, 문예 취미와 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 국어국문학이란 전공으로 자연스럽게 귀착한 것이다.
===아래는 지면이 허락하면 계속===
문학에 대한 병은 대학 1년말에 ‘대학신문’ 신춘문예 공모에서 가작을 받음으로써 끝이 났다. 65년 초 당선작은 없었지만, ‘가작’은 역으로 ‘작가’가 되지 말라는 말 같았고, 창작은 아주 잘할 자신과 소질이 없으면 손 안 대는 것이 좋겠다는 느낌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문학’은 뒤집으면 곧 ‘학문’이 되게 되어 있다. 2학년부터 국어학을 전공하리라는 각오를 하고 이숭녕, 이기문 선생님 방직이를 4학년 때까지 하였다. 최고의 선생님들 앞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만 해도 영광이었다.
고교 때부터 선택했던 불어 선호 취향 끝에 불문과로 학사편입을 하여 외국에 대한 호기심도 채웠지만, 이 때 남의 나라 전공을 하면 국학을 하는 것보다 궁극적인 보람이 덜 하고, 또 도달하는 수준이 아무래도 영국인이 쉐익스피어를 연구하는 것만큼 알아주지도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생겼다. 그러나 국어학을 서울대에서 하면 그것은 바로 세계 일류가 되는 당연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판단은 지금도 옳다고 보며, 한국학 학자의 자부심이 여기서 우러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