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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종교란 story telling 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난해한 시로 유명한 윌리엄 불레이크는 그의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을 통하여 “종교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서사시적인 이야기로부터 어떻게 예배의 형식을 선택하느냐의 과정이다”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Book of J에서 인용]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쉑스피어의 작품으로부터 함렛교를 만들수도 있을 것이고 단군설화로부터 단군교를 창시했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겠습니다.

“야웨”란 신은 원래 학자들이 J라고 명명한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의 작품의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한 주장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원 저자인 J가 “야웨”를 처음부터 유대교나 기독교가 떠 받드는 신으로 만들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야웨를 우리가 구약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괴퍅하고 변덕스럽고 질투심 많은 신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좀 더 납득이 가는 신의 형상으로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의 역사”를 쓴 카렌 암스트롱 수녀는 이 “야웨”신에 대한 개념이 시대를 거쳐 진화되어 왔다고 말합니다.  본래 야웨는 “전(쟁)신”이었지만 아모스 선지자 이후로 정의의 신, 사랑의 신 등 현재 우리의 관념에 들어있는 좋은 신의 개념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혹자는 ‘신의 역사”라는 책의 제목부터 오류라는 지적을 합니다.  “신의 역사”가 아니고 “신의 개념의 역사”라고 해야 맞는다는 거지요.   동감입니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신이란 존재하지도 않은 “개념’일 뿐이니 “신의 역사”란 말 자체가 본래적으로 오류란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출애급기에 나오는 야웨신의 행태는 우리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로왕이 아무리 강퍅하다 하더라도 죄 없는 수많은 애급의 어린 생명들을 죽이는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현 시점에서 야웨가 이스라엘을 시켜서 팔레스타인의 모든 어린 생명들을 유린했다면 국제사회로부터의 거센 비난을 모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믿는 다는 사람들은 이 성경구절을 그냥 무심히 지나치고 바로왕의 강퍅함만을 탓하고 맙니다.  

이는 우리의 사고가 이미 종교적 “밈”에 감염된 때문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종교는 처녀가 아이를 낳고 죽은 사람이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참으로 몸서리쳐지는 무서운 힘입니다.  “논리적 사고”야 말로 우리의 문명과 문화와 사회를 받쳐주는 몇 안되는 기둥 중에 하나일 진대 종교는 이것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를 암흑기라고 하는 데…

보스톤의 타프스 대학의 철학교수인 Dan Dennett는 개미의 특이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개미는 잔디밭의 풀잎파리를 게속해서 기어 올라가는 것이 관찰 된다는 것인데 이 개미는 좁아지는 풀 잎파리의 맨 끝으로 기어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개미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행동을 할까요?   답은 개미 자신은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미는 단지 자신의 뇌(?)에 기생한 기생충(란셋 풀르크)이 그 자신의 라이프 사이클의 필요에 따라 양의 뱃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기생충의 명령(?)에 자신을 희생하며(?)까지 충실히 따르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풀 잎파리의 끝에 있으면 양이 풀을 뜯어 먹을 때 양의 입으로 들어갈 확율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이슬람 자폭테러 분자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이런 데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모든 수입을 교회에 헌납한다는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의 교인에 대한 이야기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이 교인은 자기가 은퇴하게 되면 자신의 생활을 이 교회의 목사가 책임져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불란서에서의 대 부흥회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불란서제 향수와 함께 불란서제 매독(?)을 부인에게 선사하였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는 믿을 만한 소식통을 접했습니다.  이 순진한 양반의 헌금이 매독 치료차 떠난 이 목사 부부의 미국 방문비용으로 충당된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오늘 아침  산보중에 떠 올린 잡생각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