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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닷컴]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080718/8604412/1

박경리 선생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1>憎惡의 根源

입력 2008-07-18 09:11:00 수정 2009-09-24 15:48:52

 

<1> 憎惡의 根源

 

해방 후, 1950년 일본서 초판을 발행한

世界문예사전 동양 편을 보면

문예사조 항목에 무려 26페이지가 일본문학을 위해 할애되어 있고

중국문학이 12페이지, 인도문학이 약 5페이지,

아라비아 페르샤 남방아세아가 각각 1페이지 안팎,

다음은 일본주변문학으로 묶었는데

아이누, 유구, 대만 순으로,

그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조선 문학이라 하여 반 페이지를 쓰고 있다.

수록된 작품에서도 춘향전과 구운몽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지만

이퇴계의 이름 하나,

그들에게 협력했던 한국의 대표적 작가 이광수의 이름조차

눈에 띄질 않았다.

 

책장에서 우연히 뽑은 책 한권으로부터 비근한 예를 들어본 것이지만

사실 이같은 일쯤은 다반사요 사례로서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며

(일본에서는 대단치도 않는 일이다.)

우리 민족문화를 홀대하는 일본의 처사가 어제 오늘 시작된 것도 아니다.

신물 나게 겪어왔고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 거의가 불감증 상태다.

더러는 일본인 시각에 동조하여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는 듯싶다.  

 

사실 요즘 일본에 관하여 거론한다는 자체가

일부 참신한 지식인들 귀에는 사양의 만가(挽歌)쯤으로 들리는 모양이고

민족주의자의 촌스러운 몸짓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것은 과거 강자의 논리가 아직 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친일의 비난이 함축된 과거 강자의 논리운운을,

참신한 일부 지식인들은 당연히 부정할 것이다.

2차 대전 후 영토개념이 없어졌다는, 지극히 피상적 생각에 젖은 일부에서는

일본에 대한 우려를 한낱 노파심이라 하며 비웃을 수 있고

지구촌으로 이행되는 추세, 세계주의를 바라보는 시야에서는

민족주의 왜소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나

문제는 그러한 흐름에 편승하는 친일의 음흉함이며

일본에 대하여 그것이 선망이든 두려움의 기억이든

착각이나 환상일 수도 있고

혹은 일신의 처신을 위하여, 그 심리적 빛깔이 여하튼

이른바 새로운 친일인사에게

민족주의의 극복, 세계주의표방 같은 것은

빌려 입기에 그보다 지적이며 안성맞춤이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 일부 경향에 대한 얘기를 이 항에서 지금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문화를 홀대했다 하여 감정적으로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이라 해야할까 그것 때문에 붓을 들었고

미묘한 깨달음은

오랜 옛날 묻혀버린 시간의 수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어떤 깨달음이라 해야 할까, 아니, 깨달음이기보다

의혹의 연속이라 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진실의 확신)

오랜 옛날, 있음직한 사건들, 시간에 묻혀버린 시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내 마음 속에서 걸어 다니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요즘 젊은 세대는 일제와 우리의 내력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경험자로부터 전달되는 간접경험은

(오랜, 오랜 옛날 시간 속에 묻혀버린 일들)

그런 만큼 관념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우리가 당해왔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원한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고

의식 깊은 곳에 물려있는 증오의 가시는 여간하여 뽑아내기 어렵다는,

이것이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들 공통된 감정이며 인식이다.

한데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이

더 오래이며 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저들에게 피해 준 일이 없고, 값진 문화를 전수했으며

나라의 기틀을 잡아주었거늘,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문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잠재된 과거의 열등감이 우리 민족문화를 짓이기려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복자의 속성이라는 꽤 관대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집요함은

열등감의 발로나 정복자의 속성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한일회담의 주역들이 민족의 피 값으로 푼돈 얼마를 받아내어

역사적 치욕을 창출해 낸,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갔을까. 

일본수상 가이후가 파고다공원에 나타난 그날,

정신대에 대한 항의와 사과하라는 피켓을 들고 외치는 여성들 모습을

TV화면에서 본 일이 있다.

겨울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쓸쓸한 풍경이었다.

기왕지사 철판 깔고 온 가이후는 그렇다치고

입이 마르게 애국애족을 외쳐온 지도급 인사들은 그 풍경을

어떤 심회로 바라보았을까.

 

전국을 뒤흔들었던 성(性)고문사건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당시 투쟁했던 사람,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민들,

그 분들은 또 어떤 가슴으로 바라보았을까?

(펜을 들고 사는 소위 작가라는 내 자신은?)

한일합방을 늑대 이빨에 찢기는 양의 비극으로 비유한다면

수많은 이 강산의 딸들이 일본병사의 화장실 역할을 했던(부끄럽다.) 일은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는지,

침묵하는 이 땅 남성들에게 묻고 싶고

만일 저 아우슈비츠의 참혹보다는 났다고 자위하는 리얼리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임을 사양할 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한사람 책임지는 자 없고 벌 받은 자 없는 그들에게 푼돈 얻어낸,

청풍당상의 그야말로 더렵혀지지 않았던 양반들,

차라리 그것은 희극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 푼돈도 우리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자(尺)로는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가치도 있다.

그 가치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아무리 즉물적 세태라 해도 우리는 그 이상의 가치를 꿈꾸며 산다.

물질도 있어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지만

삶의 존귀함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심장이 있어야 인간의 존엄, 문화의 본질, 인간다운 연유이기도하다.

 

물질과 계산에 편중한 일본인들,

그들은 지난날을 잊는 듯 부담 없이 이 땅을 밟는다.

어디서든 흔히 마주치게 되는 일본인,

그러나 상투적인 그들 표면보다 내면에 숨겨졌을 서늘한 칼날이

왜 자꾸 가슴에 와 닿는 걸까.

일제 때 미신을 소탕한다 하여 무녀들을 잡아가두었던 그네들이

한편으론 조선의 맥을 끊겠다고

봉우리마다 쇠기둥을 박았던 섬뜩한 그 일이 연상되면서

어찌하여 그들은 그토록 광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 광란의 뿌리는 무엇일까?

하기는 모순에 대하여 갈등을 느끼지 않는 순발력이 강한 민족이긴 하지만.

문예사전의 경우도 결코 이성적이지는 못했다.(공평성을 잃고 있다.)

 

조선 문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전공한 사람도 없었다,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역사적 자료를 훑었는가,

철저하게 치밀하게 경의를 표할만큼.

식민지사관은 바로 그와 같은 그들 노력의 산물 아니었던가.

나는 결코 일본주변문학을 집필한 다케시다 가즈마(竹下數馬)라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설혹 출판사의 방침이었다 해도 그것엔 관심 없다.

모두 지엽적인 것이며

개인이나 출판사의 편견이기보다

일본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심어진 선험적인 것,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것,

바로 그것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요인이 없으면 부인이나 시인은 성립되지 않는다.

일본은 아이누, 유구, 대만에 대해서는 부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조상에 관한 한, 민족원류에 관해서는.

그들은 부인한다.

원류를 부인하면서 한국의 모든 것을 부인한다.

집요하게 광적으로. 

 

어떤 우연한 좌석에서 중앙대학교에 계시는 유인호 교수가 말씀하시기를

"옛날 지독한 反體制가 일본으로 건너갔나부다"

모두들 웃었지만 나는 내심 놀랬다.

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잔인무도한 그들 행적을 보며

한반도에서 추방된 흉악한 죄인들이 그들 조상인가보다 하고

뇌까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생각하기를

도대체 그 아득한 옛날 어떤 부류의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건너갔을까?

식민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자고로 넉넉한 사람이 내 땅 버리고 떠날리 없고 사연 없이 떠날리 없다.

하물며 거센 파도에 일엽편주를 띄우고,

영원한 이별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인종에 대하여 일본 사서에는 결론이 없다.

이노우에 키요시(井上 淸) 저 '日本의 역사'에서

인종에 관한 것을 발췌해보면 -

쇼오몬 시대, 일본인종의 원형이 형성되었을거로 보고 있고

후에 한국에서 높은 야요이(彌生) 문화가 들어와 지배했는데

신래인종이 조몬시대인을 멸망시켰는지 혼혈이 되어

인종적 특성이 말살되었는지

그러나 조몬시대인에게 흡수되었으리라는 것이

일본 인류학자들의 통설이라 한다.

그러면 조몬시대인과 구석기 시대인은 인종적으로 연속된 것인가,

그것은 의문으로 남겨놨고,

만약에 일본열도가 대륙의 일부였다면

조선해협이나 중국남부 어딘가에서

육교를 통하여 대륙과 연결이 되었을 것이며

일본어의 경우, 친족관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오직 한국어뿐,

친족으로 가정한다면 공통의 조어에서 갈라진 시기를

언어연대학으로 추정해서 조몬시대 중기이전일 것이다-

 

대강 이상인데 진보적 학자로 알고 있는 이노우에 씨에게서도

역사의 애매한 부분에 서둘러 의문표로 마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통의 조어에 관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해지면

야요이 시대(彌生時代)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 인종이 그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일본열도 역시 대륙에 연결된 것으로 가정한다면

지리적으로 한반도가 보다 가까운데 먼 중국남부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사실 요즘 분분한 역사적 확신을 일본은 애써 묵살하고 있다.

한낱 속설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은 도래인이라 표현하는 한족(韓族)이

그들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심정일 것이며

가능하다면 일본인종을 일본열도 고유의 인종이기를 바라는 것이

본심일 것이다.

사족 같은 얘기지만, 사족이기보다 필자의 감성적인 것이라 해야 옳고

이 방면에 연구가 깊은 분들께 다소 켕기는 구석이 없지도 않지만

가령 "구다라"(百濟)는 강하한다는 일본말의 "구다루"를 연상하게 되고

구다루는 그들의 아마노다까하라(天の高原)를 연상하게 한다.

아마노이와도(天岩戶)는 또 어디인가 환상의 섬 이어도를 연상하게 한다.

일본의 神樂動作에 아지메(阿知女)라는 말이 있다.  

 

유래는 아마데라스(天照)가

흉악한 동생 스사노오(素¤鳴)을 피하며 아마노 이와도(天岩戶)에 숨었을 때

아마노우즈메(天細女)가 아마데라스(天照)를 달래기 위해 춤을 춘데서

비롯된다.

과연 아지메는 춤동작의 명칭일까?

그보다 아마노우즈메(天細女)의 별칭으로 

그녀는 일행중 누군가의 아지메(淑母)일 수도 있고

성년여성 통칭인 아지메일 수도 있는 일 아닐까?

신대(神代)에 나오는 神들

이도 그렇다.

天照, 天細女, 天忍穗耳, 天若日子,

이밖에도 아마(天)가 붙은 이름이 수월찮게 있다.

이들은 다까아마하라(高天原)에서 내려왔다 한다.

 

그러면 신라에서 망명한 王子 아마노히호코(天日槍)는?

여기서 다까아마하라(高天原)가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의문이 생긴다.

얼핏 듣기로 어느 학자께서도 그런 見解를 말했다 하는데,

이밖에도 스사노오 (素¤鳴)이 신라를 내왕하며 선재(船材)를 구해놨다는 등

수염이 가슴팍까지 자라는 동안 모국을 그리워하며 통곡을 했다는 기록,

이런 역사의 파편들이 나를 사로잡고 그 당시의 풍경이 떠오른다.

무리를 짓고 바닷가를 우왕좌왕하는 추방자들의 모습,

바다를 바라보는 절망의 눈동자, 한숨과 눈물과 절규하는 모습들이

마치 영화의 한 씬처럼 클로즈업되어 다가온다.

망명자들, 소위 반체제의 지도자들이 절치부심,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응어리진 유민들을 규합하는 광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정은 다르지만 우리는 지금 남북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다.

해방 후 50년이 못되는 세월인데

동족이 상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6. 25 동란을 겪었다.

물론 쌍방간 힘의 구조에 길들여진 것이지만

동족 간에 패인 깊은 골, 강한 거부와 낯설음,

우리가 통일을 초조하게 성급하게 서두는 마음도

영원히 이별하고 타민족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우리와 일본이 동족 어쩌고 하는 것도 실은 진부한 얘기다.

역사연구의 영역일 뿐,

터럭만큼의 동질감도 없는 마당에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다.

서로 이해하게 되면 좋고,

다만 인류라는 자각으로 나를 다스려가며 앞으로 이글을 써 나갈 생각이다.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080718/8604410/1

박경리 선생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2>神國의 虛相

입력 2008-07-18 09:07:00 수정 2009-09-24 15:48:51

 
<2> 神國의 虛相(허상)

 

1890년대, '신국일본(神國日本)' '영(靈)의 일본(日本)' 등

일본에 관한 저술로 알려진 고이즈미 야구모는

희랍계 모친을 둔 영국인으로

그의 경력을 보면 신문기자, 번역가, 비평가, 그밖에

진화론 신봉자이며 불교연구도 하고.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고이즈미 세츠코(小泉節子)와 결혼하여 귀화했는데

여러 방면의 교양을 쌓은 지식인, 특히 진화론을 신봉했다는 사람이

신국(神國)이라는 제목 하에 글을 썼다면

역설적이거나 혹은 비판적인 내용으로 짐작하기 쉬울 것이다.  

 

내 자신 그 책을 읽지 못했으니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지만

처음 시마네(島根)현의 한 작은 도시의 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던 그는

13년간 체류하면서 동경제대와 와세다 대학의 초빙강사가 되었고

죽은 후에는 종사위(從四位)의 추서가 되었던 것을 보면

그의 저술이 일본에 유익했다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실은 학창시절

수필이었던 뭐 그런 그의 글을 읽은 것 같기도 하지만 희미하고

다만 야구모가 일본을 세계에 소개하고 선전한 서양인이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제치하에 있었던 시절이라 감정적으로 결코 유쾌해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야구모의 책자 제목을 인용할 것도 없이

신국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영어다.

생각해보면 일본만큼 하늘 天字와 영접할 神 字를 애용하는 나라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연표만 뒤적여도 그런 글자는 수두룩하다.

왕의 이름도 그렇고 일반인의 성씨 지명 등,

거룩하고 덩치 큰 글자를 푸짐하게 쓰고 있다.

神武 應神 崇神 神功皇后 天智 天武라는 왕, 왕후 이름에서부터

天田 天野 神山 神尾 神近라는 성씨,

지명으로 떠오르는 것에 神戶, 神田 天城 天草,

연호에도 天承 天治 天祿,

神兵에서 軍神 神風 神器,

도처에 神宮이 있고 神社가 있으며

하늘 天字를 쓰되 중국은 天子인데 비하여

일본은 天皇, 지상을 다스리기 보다는 하늘의 황제인 셈이다.

심지어 神字라는 말도 있는데 神代(신대)의 글자라는 뜻이겠지만

집고 넘어갈 일이긴 하나, 뭐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

 

江戶시대 후기, 국학자 사대인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히라다 아츠다네는

시인이기도 한 사람인데 그 당시 일본존중의 열풍이 대단했다.

그래 그랬겠지만 신대문자 (神代文字)라고 그가 들고 나온 것이

놀랍게도 우리 한글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신대문자로서 한국에까지 전달되어 언문이 되었노라,

배꼽 잡고 웃을 주장을 한 것이다.

그쪽 학자들도 지나치게 황당한 일이라 그랬을 테지만 부당한 설이라 했고

도리어 신자는 언문의 와전이거나 혹은

언문에 시사를 받은 위작일거라 하여 흐지부지되고

다시 거론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말에 관한 것도 한 가지,

메이지 말년에 가네자와 쇼우사부로(金澤匠三郞)라는 학자가

日韓兩國語同系論(일한양국어동계론)이란 책을 내놨다.

그는 琉球語와 일본어의 관계처럼

한국어도 일본어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했던 것이다.

물은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다.

문화도 물과 같아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다.

언어 또한 문화의 산물인데 어찌 역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영역까지 곁들여 책을 내놓은 金澤의 저의는 재론의 여지도 없이

세계를 향한 선전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을 꼴볼견으로 만든 사람이 金澤 혼자뿐일까 마는

그동안 세계에서 우리의 위상이 어떠했던가 한 번 돌아보자.

전갈의 독즙과도 같이 일본이 뿌려놓은

미개의 민족이다.

자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다.

옛날에는 우리의 속국이었고 후에는 중국의 속국이었다.

항변할 길조차 없이 일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업신여김과 소외를 견디며,

1차 대전후 민족의 자결권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며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왔다.

새삼스런 얘기, 그야말로 지겹게 새삼스런 얘기지만.

과거 일본의 역사학, 특히 국사학의 학자들은 황국사관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역사에 무수히 많은 땜질을 했고 또 많이 쏠아내고 했으며

한일 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도

다 아는 일이거니와

그러나 안다는 그 자체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사실이 이렇고 저렇고 해봐야 소용이 없고

학자의 양심 운운했다가는 바보가 된다.

쏠아내고 땜질하고 그 자체가 일본학자 그들에게는

진리요 진실이요 바로 그것이 지고선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개인의 사고를 그토록 붙들어 맨 일본의 국가권력은 놀랍다.

그것도 장구하게 유지해왔다는 것이 더울 놀랍고 유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기능과 세기가 우수하면서도 일본은 항상

남의 틀과 본을

훔쳐오거나 얻어 와서 갈고 닦고 할 밖에 없었다.

본과 틀이 없는 나라, 그들의 정치이념은

창조의 활력이 위축된 민족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날조된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피해 받은 국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있고

고래심줄같은 몰염치는 그것을 시정하지 않은 채 뻗치고 있는 것이다.

가늘은 시내처럼 이어져온 일본의 맑은 줄기,

선병질적이리만큼 맑은 양심의 인사, 학자들이 소리를 내어보지만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 반대로 높아져가고 있는 우익의 고함은

우리의 근심이며 공포다.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비극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 하고 분명한 것을 아니라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무서운 것이 차츰 부풀어 거대해질 때

우리가, 인류가, 누구보다 일본인 자신이 환란을 겪게 될 것이다.

 

씨가 마르게 사내들이 죽어간 2차대전,

일본의 악몽은 사람이 現人神으로 존재하는 거짓의 그 황도주의 때문이다.

가타비라(한겹의 일본옷)같이 속이 비어있는 神國사상에 매달려온

일본인의 역사의식

그것의 극복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으로,

야심 없는 이웃으로 마주보기 위하여,

그리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일본인들 사상의 원형과 그 근거를

한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대적 배경에 두어보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본글자 平假名(히라가나)와 片假名(가타가나)는

헤이안시대(平安朝) 초기, 한문에 토를 달기 위해 만들어진 거니까

최초의 문자는 한자인데 우리나라의 사정은 일본과 다르다. 

 

우리 민족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설을 일소에 붙인다 하더라도

뜻글, 다시 말하면 자연의 모방으로부터 시작된 글자는

샤머니즘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어떤 연대성을 느끼게 되고

어느 편에서, 누가 그것을 만들었던 간에,

또 한자의 성격상 일조일석에 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민족은 그 같은 과정과 더불어 있어 왔다는 점에서,

그 과정을 통하여 서서히 익숙해졌고

글자가 비록 지배층이나 특수층의 전용물이었다 하더라도

절도 있게 쓰여졌다는 점에서 일본과는 다르다.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정지가 미비했던 당시의 일본이

완성된 한자와 낯설게, 그리고 갑자기 마주했을 때

그 대응이 무절제하고 희화적 형태로 나타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아진다.

그러나 궤도 수정을 수없이 해야 하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섬이라는 국토의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궤도의 수정 없이 사다리꼴로 현재까지 진행된 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일본서기에는 스사노오(素盞鳴)가

아들과 함께 한일간을 내왕하며 한서(漢書)를 가져왔느니,

任那(임나)의 蘇那曷叱이, 또는

귀화한 신라의 왕자 아마노히호고(天日槍)이 가져왔느니,

그런 말들이 쓰여져 있는 모양인데

15대 왕 應神 때 백제의 阿直岐가 처음 경전을 가져간 것이 정설이고

그 후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가서

응신의 아들 우지노와끼이라쯔꼬(¤道稚郞子)를 가르쳤다 한다.

그러나 문자는 보급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30대왕 敏達 때, 고구려에서 보내오는 문서를 해독하는 사람은

오로지 王辰爾 한사람뿐이었다는 것이며

40대왕 天武에 이르러 비로소 고사기(古事記)를 쓰기 시작하여

43대왕 元明 무렵 완성했다는 기록이다.

대체로 이 무렵 한자가 정착되지 않았나 싶은데

그러나 앞서 말한바와 같이 한자 구사가 허황하고,

물론 후세의 수정 가필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서 예를 하나 들어보면

天照의 5대손이며 姑王神武의 부친 이름이

히꼬나기사다케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도(彦波激武¤¤草葺不合尊),

이 한없이 긴 이름은

마치 난장이가 땅이 꺼지게 큰 투구를 쓰고 시합하는 것 같아

다소는 익살스럽고 기이한 느낌이다.

 

본시 이름이 그렇게 길었는지 실재 인물인지 의심스러우나

음에다가 뜻 없이 한자를 끼워맞춘 본보기는 될 것이다.

하필이면 왜 그런 것을 예로 들었는가, 비웃기나 하자고 한 짓은 결코 아니다.

그 이름에서 오늘의 일본인 모습과 의식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平田篤胤와 金澤庄三郞,

한사람은 국학의 대가요 다른 한사람은 대학의 교수로서

이른바 지성의 정상적 인물임에도

우리는 그들 모습에서 허황함과 왜말로 곡케이(滑稽)를 느끼기 때문이다.

한자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야기(神話)의 내용도 그렇다.

몸통에 비하여 투구가 크다는 점에서 같다.  

 

일본신도의 한 분파에서는 일본을 만국의 종주국이라 했고

富士山은 地球의 鎭守 라 하는 과대망상,

그런 망상은 후일 세계 정복을 꿈꾸는 망상으로 발전했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이 유가 아니다.

고사기도 예외는 아니다.

황도사상의 골수라 할 수 있는 신대편(神代篇)에는

도처에 그 모순이 노정되어 있다.

국토의 기원과 황실의 유래, 민족의 내력 등의 기록이지만

소재는 그 당시의 사람(神)과 사건, 이것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는 구전이다.

그 구전은 태반이 이주자가 지니고 온 것이 분명하다.

고사기의 선록자(撰錄者)는 오오노야스마스로(太安万侶)지만

암송자는 阿¤라는 여자로,

다까아마히리(高天原)에서 내려온 아마노우즈메(天細女)의 후예라는 점에서

그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셋째는 한문에 실리어 온 설화나 고사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왕권확립을 위한 사업으로 도마에 올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어떻게 요리되었는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天武王은 애초부터 舊記의 削定을 의도하여 시작한 일이었고

말로는 제가(諸家)에 전해지는 ¤記(口傳인 듯 싶다)에 허위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반대였을 것이다.

 

왕권확립을 위하여 왕실미화는 필수조건이며

따라서 날조와 삭제 표절은 불가피한 일이다.

신화란 어느 곳에서든

세월 따라서 삭제되고 날조하고 표절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해서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은

이야기는 거짓말이요 노래는 참말이라 했던 것이다.

어떤 민족이든 그 기원에 신화 없는 민족은 없다.  

 

우리에게도 난생설화가 있고

(백두산) 천지를 돌바늘로 기웠다는 전설이 있지만

초인적 초자연적 이야기를 믿고 나라의 기틀로 삼아 면면히 이어온 나라는

아마 없을 것이다.

 

신대편(神代篇)의 현란한 드라마는 다음 회로 넘긴다.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080718/8604411/1

박경리 선생 유고 ‘일본산고(日本散考)’<3>동경까마귀

입력 2008-07-18 09:08:00 수정 2009-09-24 15:48:5


<3> 동경까마귀

 

여유작작하다/

사람사는 언저리 아니면 못사는 주제에/

사람의 눈치쯤 아랑곳 없이/

정거장 둘레를 어슬렁거리다가도/

지갑을 줍듯 먹어만 보면/

스윽 달아난다.

 

章湖 시인의 詩集 <동경까마귀> 속의 시 한구절이다.

 

일본에는 까마귀가 많다고 한다.

소설이나 시(俳句)에도 까마귀는 곧잘 나타난다.

유행가, 동요, 심지어 자장가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처럼 혐오감으로 그새를 대하지 않는 모양이고

그들 정서 속에 녹아들어 있는 듯 보인다.

우리민족의 정서를 은근과 멋이라고들 하는데

자연스럽고 그윽하고 점잖은 것으로 은근을 풀이하며

멋은 덴디즘의 외형, 형식과는 다르게

정신적인 사치스러움과 해학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싶은데

따라서 여유가 있고 낙천적이며 공간지향 동적인데 비하여

쓸쓸하고 상심의 뜻을 가진 와비(¤)와

쓸쓸하고 한적한 뜻의 사비(寂),

숙명적이며 허무한 모노노아와래(物の哀れ),

語意의 설명이 미흡하겠지만 대체로 그렇게 집약되는 일본인들의 정서에는

짙은 우수와 허무주의가 깔려있다.

그리고 감상주의의 소지이기도 하며 정적이요 평면, 그러니까

지상 지향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어둡다.

해서 枯天에 앉은 겨울까마귀는 그들 정서의 근사치며

우리의 경쾌한 새타령이 주는 느낌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림장이 이중섭은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

민둥산 붉은 흙을 비행기에서 내다보고서/

눈물이 나더라고 말했지만/ (중략)

부산 영주동 까치집이 내다보이는 우리집에 와서도 그랬고/

정릉 골짜기 까치집이 있는 하숙집에서도 그랬듯이/

까치만 쳐다보면 늘 그는 입을 반푼이처럼 헤벌레하고 있었겄다.

('까마귀에 쫓겨온 이중섭')

 

까마귀와 까치의 대비는

민족과 민족간의 숨막히게 다른 뉴앙스를 느끼게 하지만

화가 이중섭의 개인적 고뇌, 민족적 슬픔,

내 강산에 대한 짙고 애틋한 애정이 느껴져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일제하에서 살아본 사람이면

내 자신의 눈물 내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게 되는 구절이다.  

 

조국을 잃었다는 것은, 孤兒가 된것과 다를게 없다.

내 幼年時節 떼지어 다니던 걸인들의 비참한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倭人들에게 농토를 빼았기고 고향에서 쫓겨난 農民들의 行路가

걸인이었던 것이다.

부둣가에는 팔장 낀 지개꾼들이 그야말로 그리운 님 기다리듯

짐실은 배가 들어올 항구를 바라보고 서있던 풍경도 눈앞에 선하다.

다만 따뜻하게 되살아나는 것은

그 시절, 웬만하면 거지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던 人心이다.

우리 모두가 헐벗은 것 같은 기분, 굶주린 것 같은 허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 바람벽에 서 있는 것 같은 세월이었다.

그것은 바로 고아의 세계다. 

 

옛날 서울 정릉에 살았을 때의 일이다.

산동네여서 일꾼들을 불러다가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은 일이 있었다.

노가다로 이골이 난 그들은

목도질도 장단을 맞춰 흥얼거려가며 슬렁슬렁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일이 오달지고 뒷마무리도 튼튼했다.

일하면서 주고받는 그들 대화를 듣자니까

징용 가다가 도망친 얘기였다.

장정들이 모인 경찰서 마당에서 허술한 틈을 타 튀었다는 것이다.

조선인 순사가 쫓아오는 신작로를 죽으라고 뛰는데

마침 길가에 서 있던 약국집 주인이

우연인척 순사의 다리를 걸었고 순사는 나자빠지더라는 것이다.

그 새 뛰어든 곳이 공교롭게도 막다른 골목이어서

엉겁결에 담을 뛰어넘었는데

괜찮게 사는 집의 뒷뜰이었으며

그집 식솔들이 숨겨주어 하루 밤을 지새고 보니

일본은 항복을 했더라는 것이다.

'왜놈들 그때 손 안 들었으면 사람 많이 다쳤을끼라.'

 

약국주인과 숨었던 집의 식솔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다른 일꾼들은 징용에 갔다 왔는지

목검이 아프다, 아니 총대가 더 아프다 또 뭐, 뭐가 더 무섭다 하면서

살점이 문적문적 묻어난다 뼈가 바스라진다는둥 험악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증오와 원한이 없었다.

때론 웃고 익살스런 몸짓을 하며 일하는 것처럼 슬렁슬렁하는 말투가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었다.

돈 받고 대신 매를 맞은 흥부며

매를 맞으면서 일일이 사또한테 대거리하는 春香을 생각했다.

절박한 상황의 春香이야 모질고 독한 女子였지만

남정네들은 흥부나 일꾼들이나 턱없이 느슨하다.

樂天이랄까 해학이랄까 그런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을 것이며

또 바로 그런 낙천적 해학이 갖는 여유 때문에

끝내는 회생하여

이 민족이 망하지 않고 긴 세월 존속돼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