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강남개발의 주역이었던 손정목(86)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회고다. 손 명예교수는 1968년 건설부 산하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을 시작으로 1970년대 서울시 기획관리관·도시계획국장·내무국장 등을 지내며 강남 개발을 진두지휘한 강남개발사(史)의 산 증인이다. 그의 회고 가운데 경기고등학교의 강남이전 비화를 발췌하여 옮깁니다. --------------
(전략 ) -처음부터 고급 단지로 조성했으니 부자들이 너도나도 강남에 입주했겠다. “아니다. 다들 강남에 안 오려고 해서 고생했다. 오죽했으면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를 지어 공무원이라도 이주시키려 했겠나. 강남을 개발해 사람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 1972년에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이 학군 이동 아이디어를 냈다.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 등 5개 공립 학교와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 5대 사립이 당시 명문이다. 여학교로는 경기·이화·숙명·창덕·진명·정신을 알아줬고. 모두 종로구나 중구에 있었다. 이 학교들을 모두 강남으로 이동하는 구상이었다. 그러면 인구가 이동하며 강남이 빨리 개발될 거로 봤다.”
-저항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여론주도층이 모두 동문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지배층의 추억과 향수가 배어있지 않나. 그들 부인도 다들 그곳 출신이었다. 한국의 동문과 재학생은 물론 재외동문까지 나서 반대했다. 엄청난 파워더라. 경기고의 저항이 가장 심했는데 결국 화동(이전 전 위치)의 교사(校舍)는 허물지 않고 말끔하게 개수해 도서관으로 쓰고 교정도 단장해 도서관 뜰로 남긴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1972년 10월 삼성동 이전을 발표했다. 당시 경기고 땅은 1만1000평이었는데 이걸 3만2250평으로 보상해주고 새 건물을 지어준다는 조건도 추가했다. 아마 유신시절 중앙정부의 유일한 패배였을 거다.”(중략)
-강남 개발로 돈 번 사람이 많다. (당신도) 온갖 정보를 쥐고 있었으니 수백억원은 벌었을 것 같다. “전혀. 늘 남보다 1년 정도 빨리 개발 정보를 알았다. 돈가방을 싸들고 와서 알려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직접 땅을 사지도, 정보를 돈 받고 팔지도 않았다. 돈벼락 맞으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강남의 대표적 땅부자인 김형목 (영동백화점과 영동고 설립자)이나 조봉구(가수 조덕배 삼촌, 전 삼호건설 회장)도 그렇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김형목은 자식 문제로 속을 썩였고, 조봉구도 삼호 파산 뒤 미국의 작은 원룸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하더라. 인생이 그런 거다.” (후략)) -1월 22일자 중앙일보 별지 특집- 출처: 경기고56회 김일두님의 글을 옮겨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