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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오승원

1955년, 수송초등학교 5학년 때.
변소에만 가면 만나는 얼굴 동그란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쉬지 않고 변소 안을 이리 저리 쏠쏠거리고 돌아다니다가,
가끔씩 화안한 앞마당을 내다보고는 “까무라!” “까무라!”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얘야, 너는 왜 맨 날 변소에 살고 있으며, 뭐라고 소리 지르는 거냐 ?”
‘아, 우리 담임이 나를 미워해서 영구 변소청소 당번으로 임명했어.
그래서 담임 지나갈 때마다 까무라 소리치는 거지.’
“까무라가 뭔데 ?”
‘응, X 까먹어라의 준 말이야.’
우리 수송 동창들 대부분은 이제야 ‘까무라의 유래’를 알았으리라.
그래서 오재경선생님 (전 청와대 경제수석 구본영의 외숙. 구수석도 올 초 타계했다고 들었다.)은 본명을 잃고 오로지 ‘까무라’로서 수송 재직을 마쳤다.

오승원은 머리가 좋았다.
한번 보고 들은 일은 잊는 일이 없었고, 사물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언제나 바로 정곡을 찔렀다.
시원시원한 글씨로 글을 쓰면 간결하면서도 하고자하는 말을 다 펼쳤으며,
사물에 대해 날카로운 면도칼을 슬그머니 돌려 그었다.
바둑도 잘 두어서 중학 초년 한국기원에서 미래의 국수 김 인과 기력을 겨루었다.
독일 괴팅겐과 파리 솔본느에서 수학했으며 일본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몸이 빨라 운동도 잘 했다.
탁구를 잘 쳤고, 복싱도 잘 했다.
당구는 영원한 프로였다.

오승원은 나기를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섭렵한 수백 권의 도서도 영혼의 자양분은 됐을지언정, 모태는 될 수 없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속박을 거부했다.
‘자유’와 ‘제도’의 충돌은 끊임없는 ‘기행’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때는 달랐다.
1974년.
오승원이 파리에서 일시 귀국했을 때였다.
지금까지의 ‘기행’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장르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 눈에는.
정신과 의사 박경우 (61회. 타계)를 ‘신장안 당구장’으로 불러 관찰시켰다.
한나절 동안 오승원의 행패를 지켜본 박경우는 ‘저 정도면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입원했을 것’
이라며 빨리 입원치료 시키란다.
승원의 형 오무영(재무부 국장, BC 카드, 롯데카드 사장, 함경북도 지사 역임)을 찾아갔다.
‘승원이가 나랑 가깝니, 너랑 가깝니 ? 네가 알아서 해라.’
승원 어머님을 뵈웠다.
내 말씀을 들으신 어머님은 표정이 굳더니 ‘기호야, 나는 한 번도 너를 내 아들 친구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나는 늘 너를 친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네가 친구를 모함하는
모습을 보니 섭섭하기 그지없구나.’
나는 하릴없이 북창동 승원이 집을 나섰다.

며칠 후 승원이 새파란 얼굴로 나타나 싸늘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나는 너와 정식으로 절연한다. 너는 나의 친구가 아니다.’
그리고 오승원은 서둘러 파리로 돌아갔다.

1977년 가을, 나는 가족을 데리고 카이로 귀임 길에 파리를 들르기로 했다.
승원에게 편지를 썼다.
“비록 우리가 절연했지만 나는 너를 친구로 갖고 싶다. 혹시 복연할 생각이 있으면
호텔 예약 해 놓고 오를리로 나와라.”
“과연 그 고집쟁이가 나왔을까 ?” 가슴 졸이며 출국장을 나서자,
홈스펀 콤비의 오승원이 조그맣게 서 있는 것 아닌가 !
그날 밤 우리는 파리의 뒷골목에서 홍합탕에 흑맥주를 마시며 다시 친구가 됐다.

오승원의 일생은 구속으로부터의 탈출로 점철돼 있다.
제도와 속박을 부술 수 없음에 그는 늘 도피를 택했다.
여의도 성모병원에 ‘구속’돼 있을 때였다.
피부병에 걸렸는데, 당시 여의도 성모에는 피부과가 없어서 명동 본원에 치료받으러 갔다.
환자 몇 명을 인턴 의사가 인솔해 갔다.
병원 복도에서 인턴이 동기생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절호의 찬스’를 놓칠 오승원인가 ?!
그대로 달아 빼, 비상구를 나와 내달렸다.
당시 명동 성모병원과 동쪽 길 건너 저동 사이에는 육교가 있었다.
육교 가운데를 철망으로 막아, 북쪽은 일반인이 명동에서 저동으로 넘어 다녔고,
남쪽 반은 성모병원과 건너편 산재병원과의 연결통로였는데,
승원은 요행 이 길로 접어든 것이다.
승원은 철망을 타고 넘어, 중앙극장 쪽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행길 쪽으로 입구가 난 지하다방으로 쏜살같이 튀어 들어갔다.
맨 구석에 자리 잡고 한 숨을 놓은 승원의 눈에, 카운터 위에 전광으로 빛나는 다방 이름이
들어와 박혔다.
“빠삐용.”    

오승원은 마침내 그 지겨운 구속에서 벗어났다.
육체의 속박도 벗어던졌다.
‘자유로운 영혼’ 오승원은 온 지구 덩어리를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독일로, 파리로, 일본으로, 칼리포니아 주정상 황성근네 갔다가, 뉴욕의 까꾸를 보고,
브라질의 백의명한테도 들렸겠지.
그리고 우리가 잠든 사이 얼굴을 바싹 대, 그 의뭉스런 미소를 뿌리고 갔겠지.

승원아,
나는 네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네 빈소가 차려지던 7월 6일 새벽, 변소엘 가려고 일어섰던 나는 그대로 쓰러져,
119로 서울대 분당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
2주일 간 말 그대로 ‘혈투’를 벌였다.
내일이면 나도 ‘구속’이 풀려 집으로 돌아간다.
몸 추스르는 대로 네 무덤을 찾아가마.
거기서, 이제는 너나 나나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땅에 부어,
이승에서 작별하자꾸나.

‘자유로운 영혼’ 승원아,
사랑한다.

2009년 7월 19일.
서울대 분당병원에서 한기호.

  • 김치순 2009.07.21 10:42
    모두 얼마 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겠지만 나이들을 먹었는지 여기저기 이상이 오고 있는가 보다. 하루 빨리 완쾌하여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높은데 계신 양반께도 빌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