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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에 따른 피난생활을 생각하면서 ---

 

   1951 1·4 후퇴 때 할아버지는 어머니, 어린 손자들 다섯을 데리고 경기도 화성군 마도면으로 피난을 하였다. 이 때 나는 6살이었다. 기차를 타고 수원에서 내려서 걸어서 마도면까지 갔다. 토지개혁 전 할아버지는 이 곳 지주이셨다.

   1950년에 한국전쟁은 우연히 내 생일에 발발하였다. 물론 이 날 내 생일잔치는 없었다. 내가 커서도 내 생일잔치는 음력 생일날 마련되었다. 우리 동네에서 유력 인사들(민복기, 홍진기, 이재학, 장후영, ---)은 모두 피난을 하였으나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것을 모르고 동네에 남아 있었다. 동네에 주둔한 북한 인민군 한 사람이 나를 무척 귀여워하였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나보다 10살 위인 큰형만은 할아버지 고향인 파주로 가서 숨어 있었다.

   우리는 마도면 부면장댁 문칸방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어린 나는 마도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물론 1학년 생활은 한 적이 없다. 나물도 캐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어린 나는 즐거운 한 학기를 보냈다. 물론 공부도 잘 하였다. 동네가 해변가에 있어서 신나게 개펄에서 놀다가 수로에 빠져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이 때 수영을 잘 하는 둘째형이 나를 구출하여 주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는 갑자기 전신마비가 되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누워 있다가 업혀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얼마나 놀라셨을까? 이 때부터 어머니는 가족들의 눈을 피하면서  음식 면에서 나를 특별 대우하기 시작하셨다.

   만일 공산군이 마도면에 진입하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민재판이 벌어졌겠지 ---.

   마도면에는 여전히 우리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다. 마도면은 내 고향처럼 느끼고 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혼자 다시 마도면을 방문하였다. 남양에서 피난처까지의 십리길이 너무 가까워 지나쳤다. 마도초등학교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 형제들이 함께 방문한 적도 있었다. 10여년전에,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제자의 요청에 응하여 이충구(59회) 사장 소개차, 현대자동차연구소를 방문한 후 마도면을 들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때 마늘 한 접을 싸주신 분 생각이 난다.

  올해에는 마도면을 다시 방문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