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시에 대해)
1934년 <문학>지(誌) 2월호에 발표하였다.
<우리 길을 가고 또 갈까> <자살풍경(自殺風景) 스케치>와 함께 발표되었고, 1939년에 간행한 시집 <망향(望鄕)>에 수록하였는데 3연(聯)으로 된 자유시이다.
밝고 낙천적인 여유가 엿보이며, 의미의 함축성과 표현의 간결성, 그리고 탄력성을 지닌 시로서, 특히 마지막 연의 "왜 사냐건/웃지요"에서는 선인(仙人)의 경지를 연상하게 하는 담담한 심정이 표출되어 있다.
이 시인의 대표작으로서 흔히 인용되는, 소위 전원시(田園詩)의 백미로 꼽힌다.
<출처: 두산백과. 일부 내용 올린 이 첨가>
(시인에 대해)
호 월파(月坡). 경기 연천(漣川) 출생.
1917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 2년 후 보성고보로 전학하여 1921년에 졸업하였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이화여전 교수가 되었다.
일제 말엽 영문학 강의가 폐지되자 1943년 이화여전을 사임하였다.
8·15광복 후 군정하에서 강원도 도지사에 임명되었으나 며칠 만에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귀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고 1949년에 돌아 왔다.
1930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무상(無常)>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한편 E. A. 포와 J. 키츠의 작품 등을 번역하였다.
그의 시가 평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5년 <시원(詩苑)>에 <나>·<무제>·<마음의 조각>등 몇 편의 시작(詩作)을 발표하고 나서부터이다.
1939년 문장사(文章社)에서 간행한 첫 시집 <망향(望鄕)>에 유명한 <남으로 창을 내겠소>·<서글픈 꿈>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인생을 관조하며 살아가는 담담한 심정이 동양적 허무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시세계를 지녔다.
1950년 나온 수필집으로 <무하선생방랑기>가 있는데 사회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담고 있다.
또한, 영문학자로서 포(Poe, E. A.)의 <애너벨리>, 키츠(Keats, J.)의 <희랍고옹부>, 램(Lamb, C.)의 <낯익던 얼굴>, 데이비스(Davies, W. H.)의 <무제>등을 번역하여 해외문학의 소개에도 이바지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일부 오자 올린 이 수정>
(사족)
내가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곳은
남쪽땅 高興이다.
고흥은 남한땅 둘러 본 곳 중에
제일 따뜻한 곳이다.
기온이 높아서가 아니고,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도해 절경을 품고 있음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바로 이웃에
김마을 완도.
그 옆 보길도 세연정에선 孤山에게 약주도 한 잔 권할 수 있다.
여수 오동도가 지척이고
강진 다산초당, 두륜산 대흥사도 마실가듯 찾을 수 있다.
풍광 좋은 남해와 고성, 거제가 엎어지면 코가 닿고
지리산 무등산 조계산 월출산으로는 뒷등에 병풍을 쳤다.
고흥 땅 양지바른 자리에서
'남으로 창을 내어'
햇볕이나 방안에 가득 들면 족하리라.
굳이 바다야 한뼘이나 보일락 말락하면 그만.
유자나무 두어 그루 제멋대로 자라게 두고
'새 노래 공으로 들으며'
때 되어 유자 거두거든
대추 밤 석이를 곱게 채썰어 넣고
향 좋은 유자청 절여 내어
먼길 찾아온 벗, 자식 손주 입에 한술한술 떠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