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2177 추천 수 57 댓글 0
친구들에게,


아래의 글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경기동창회보 제57호(1996. 10. 10)"에 실었던 글을, 사진과 관련 문구를 제외하고, 옮겼습니다. 내 대학원생들이 내 말을 듣고 흔쾌히 타자를 하여주어 전재가 가능하였습니다. 이 글을 쓴 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났습니다.

좋은 추억을 회상하기를 바라면서 ---


白江


[추신] 능지리 글에 대하여 달은글(No. 117)도 안본 분은 보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花洞心法 開花期의 꿈돌이들



부탁을 받으면 좀처럼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두번 "京畿同窓會報"에 글을 써달라는 것을 나는 쓸 수가 없었다. 세번째로 花洞 학창시절을 회고하는 글을 써 줄 것을 요청 받고는 더 미룰 수가 없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운도 따라서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을 때 입시를 담당하셨던 曹在浩 교장선생님(京畿16회)께서 평소 사용하셨던 원고지도 입수하게 되어, 그 원고지에 추억을 되살리며 이 글을 쓰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하다.

교장선생님의 막내둥이가 萬人의 벗인 59회 曹三鉉군(一又株式會社 代表理事)이니, 59회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남자들인가!

우리 59회 전신은 지금은 없어진 경기중학교의 9회 이다. 엄동설한, 어린 마음에 떨며 花洞竹林이 있는 中等敎育發祥之地에서 입학시험을 보고 단기 4290년 4월 1일부로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꿈돌이들 420명이 이의 주류인 것이다. 꿈돌이들 대부분이 9회로 졸업하고 다시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서기 1963년 1월 27일 京畿 59회로 졸업할 수 있었다. 막상 중학교에 입학하니 이미 金元圭선생님으로 교장이 교체되어 있었다 우리는, 曹在浩 교장선생님께서 제정하신 교훈 "씩씩하자(勇)“, "참되자(知)", 사랑하자(仁)" 아래, 즐겁게, 자랑스럽게 또한 열심히 중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曹교장선생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셔서 4289년에 배포하신 花洞心法(사진 참조)에 따라 우리가 자라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의 학창시절은 花洞心法의 開化期를 지나, 開花期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또한 얼마나 다행한일인가! 물론 화동심법에는 2회 유급하면 퇴학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무서운 조항도 있어서 어린 마음을 괴롭힌 사례도 상당히 있었다.

중학교 1학년시절에 체육 숙제의 하나로 아령연습이 주어졌다. 나와 같이 알통이 작은 사람에게는 큰 곤욕이었다. 겨울에는 체육시간에 간혹 三淸公園에서 스케이팅을 즐겼는데 나와 같이 스케이트도 없고 체육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응원 하면서 구경만 하였다. 이 덕분에 아이스하키 계에서 많은 친구들이 경기 이름을 드높이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학교 교지인 "京畿"는 중학교 2학년시절, 즉 개교 58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창간되었다. 이때 週刊京畿는 지령 100호에 이르게 되었고 "The Kyunggj Youth"라는 영어신문도본 궤도에 진입하고 있었다. 물론 교지 "京畿"가 창간되기 전에도 靑搭, 望洋 등의 이름으로 교지가 있었기 때문에 京畿 제1호는 교지통권 42호이다. 시대 조류에 부응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으나, 이름을 바꾸면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교지 개명이 이루어진 것인지 ‥‥, 이 창간호에는 趙重行(在美 의사) 군의 "어느 따분한 일요일", 鄭弘溶(東部그룹 전무) 군의 "만추의 향수-고향에 계신 K형께 드림". 金然培(제일증권 전무)의 "C형에게", 呂運昇(한양大 교수) 군의 "우산" 이라는 제하의 수필들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마지막 수필에 시대상을 반영하는 글이 실려 있다. 새로 산 국산 검은 우산을 쓰고 비속을 걸은 친구의 어깨 언저리에 검정 물이 들었다는 것이다. 종이로 만든 지우산 애호가였던 呂運昇 군이 여전히 국산 지우산을 좋아하고 쓰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국산보다 비싼 외국산 우산이 여전히 국산보다 좋은지도 궁금하다. 呂運昇 군이 다시 국산 지우산을 들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도록 쾌유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이 기회에 띄운다.

4293년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3년 동안 내 담임선생님은 沈驥燮(1학년), 申鉉益(2학년), 高甲柱, 崔承祚(3학년) 선생님이셨다. 교장은 근무기간이 짧아 새로이 李宗林, 다시 金元圭선생님께서 부임하셔서, 결국 우리는 입학식과 졸업식에서만은 같은 교장선생님을 모시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중학교 시절에는 京畿 선배님을 교장선생님으로 모실 기회는 없었다.

서기 1960년에 마음을 졸이면서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한 우리 420명은 李漢隆(동의대 교수) 군을 비룻한 다른 중학교 출신의 수재 60명과 함께, 京畿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花洞心法에 의거, 自由人, 文化人, 平和人이 되도록 우리는 교육을 받아 어린 꿈돌이들의 탈바꿈이 시작되었다. 완전히 단기에서 서기로 해가 바뀌고 교훈은 한글에서 한문만으로도 쓸 수 있는 글귀로 바뀌고 키가 컸던 친구가 키 크기를 멈추어 키가 상대적으로 작아진 친구 외에는 모두 키가 커져서, 우리는 종교와 사랑, 그리고 클럽활동 등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는 지금의 고등학생들처럼 가정교사, 학원에 매달렸던 친구들은 드물었다. 나 자신도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절, 교회, 성당에 다니는 빈도가 잦아졌고 花洞고개에서 등하교시간 즉, 아침 저녁으로 마주치게 되는 빵떡 모자를 쓴 예쁜 아가씨들에게 관심을 쏟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에도 빠져들지 못한 것이 나에게는 회한으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에 徐丙瑆(18회), 다음 해인 1961년 2월에 趙炳旭(21-1회)선생님께서 교장으로, 4개월 후 韓寬淑(27)선생님께서 교장 직무대리로, 한달 후에 梁在暉 선생님께서 교장으로 취임하셨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고등학교에서도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선배님을 교장선생님으로 모시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기하지 않았던 교장 교체를 빈번히 겪어 우리는 보다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하튼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에는 중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빈부차이는 많아도 우리는 서로 다정하게 우정을 계속하여 돈독하게 하는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과의 학교 내에서 차이는 반장, 부반장의 표시가 배지에서 완장으로 바뀌었고 지방 사투리의 억양을 친구들 대화 중에 간간이 감지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었을 뿐이었다. 경기 2호가 개교 60주년 기념으로 1960년 10월3일 발간되었는데 趙重行 군의 수필 "寫眞", 그리고 李相億(서울大 교수) 군의 시 "默祈禱", 朴賢洙(영남大 교수) 군의 시 "植物性"이 실려 있다. 친구들 글이 중학시절 창간호에서는 한글 제목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하여 2호에서는 제목이 한문으로 전부 바뀐 것은 우리가 그만큼 지식의 성장을 가져왔다는, 즉 문화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우리는 정말 고등학교 학생다운 학창시절을 2년 동안 보냈으나 사회적으로는 4·19, 5·16을 연차적으로 겪은 격변의 2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진학을 목전에 둔 매우 중요한 해이다. 우리는 키가 커져서 등교시간에 교문을 굳게 지키며 늠름하게 서 있었던 金海剛 (신화물산 부사장), 李宗元(KIST 책임연구원), 鄭弘翼(서울大 교수) 군 등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3학년으로 진입한 직후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의 후신을 주도한 元正一(고검장) 군 팀이 이끌던 학생회장단이 張虎一(在 미국) 군 팀으로 바뀌는 격변을 겪었다. 이는 새롭게 시도되려는 학사행정에 앞의 팀이 반기를 들은 데에 연유한다. 이러한 와중에 결정적인 학생대의원 회의중에 金義源(在 캐나다) 군과 내가 자의로 퇴장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여전히 일부 친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自由人, 平和人에 가까워져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라면‥‥‥ 물론 이러한 말은 불필요하겠지만. 이 사건으로 우리가 고둥학교 전통에 먹칠을 할 59회라는 뜻의 말씀을 하신 선생님도 계셨다. 우리 59회 친구들 중에는 고등학교 3개년 우등상을 받은 사람은 없었지만 학력고사 성적분포와 대학교 진학상황을 보더라도 충체적으로는 59회가 京畿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은 없다. 내 담임선생님은 李泳澤(1학년), 宋吉相(2·3학년: 43회, 전 모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이 기회에 우리를 따스하게 보살피고 일깨워 주신 모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선생님들께서 항시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 하시기를 기원한다. 이 당시 선생님들은 지금과 달리 학생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다시 말해 받기보다는 주는 분들이었으며 열성껏 우리를 가르쳐 주셨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덧 40년 가까이 지나갔다. 8·15광복, 즉 세계제2차대전 종료를 전후로 태어나서, 6·25를 겪은 우리는 화동심법에 의거 화동에서 전인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의 젊은이들보다 꿈이 많았고 꿈을 실현시킬 능력이 보다 많이 배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봉사를 당연시하는 시대에 공부를 하였는데, 이제는 이를 점수화하여 우리와 달리 입시지옥을 겪는 고등학생들이 더욱 갈팡질팡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친구들과 자진하여 국립묘지를 청소하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는 꿈돌이였다가 어느 틈에 흰돌이로 변모되고있다. 지면제한으로 내 外叔 朴喜璡께서 쓰신 "詩人아 너는 先知者되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京畿의 도약을 기원하며 글을 끝마치겠다.
  

다시 사랑과 희망의 샘이 솟게
시인아 너는 겨레의 혼을
불러 일으켜라! 정통의 대로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횃불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