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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프린스턴 2006 (마지막)


10월 26일 (목)    버지니아로의 여행 계획

내가 머물고 있는 프린스턴은 조그마한 도시이다.   한달여를 있다보니 또 좀이 쑤신다.   그래서 일탈을 꿈꾸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사돈댁이 버지니아의 샤롯빌에 별채가 있어 그 집에 가서 열흘간  묵기로 한 것이다.   버지니아는 1607년에 영국인이 미대륙에 최초로 이민온 곳으로  식민지 문화가 풍부하고, 1770년경에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의 역사와   미 건국의 “대통령의 산실”이기도 하며, 1860년경에는 남북전쟁의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은 남군이 항복해 미국이 하나로 통일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프린스턴에서 샤롯빌까지는 장장 600키로의 먼 거리이다.   콧김내어 달릴게 아니라 중간에 느긋하게 쉬고 가자하여, 워싱톤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보니 주중에는 150불하는 별 3개짜리 호텔이 주말에는 60불밖에 하지 않는단다.   주말이 되면 워싱톤과 같은 대도시에는 출장 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돌아 가기에 호텔의 방이 여유가 있는 반면, 지방의 숙소는 주말에 오히려 비싸게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두말 않고 예약을 해 두었다.


10월 27일 (금)     아름다운 도시 발티모어와 미국의 수도 워싱톤

아침 7시 반에 프린스턴 집을 나와 시원히 뚫린 고속도로를 타고 뉴저지 남쪽 경계를 넘어, 델라웨어를 통과하니  메릴랜드다.   드디어 10시반에 볼티모어에 도착했다.   한때 미국 제2의 도시로 번성했던 무역도시로 미국국가(The Star- Spangled Banner- 성조기여 영원하라) 가  탄생된 곳으로, 관광명소가 Inner Harbor 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피라미드 모양의 “국립 수족관”과 세척의 군함을 주축으로 하는 “해양박물관”과 현대식 서점과 방송국그리고 고급식당가로 개조된 옛 “발전소” 건물이 특이했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위에는 “페더럴 힐”이 있어 영국과의 전쟁중 볼티모어를 사수한 곳으로 유명하고, 그 곳에는 미국 국가의 원조격인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곳은 꽃게가 유명하여 미국에서 알아주는 꽃게찜 식당이 몇군데 있고, 야구왕 베이브 루스와 탐정소설가 에드가 알렌 포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내에는 볼티모아 오리올즈의 구장과 근처에는 존스홉킨스대학이 있었다.

오후 2시반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워싱톤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The Mall”을 걸어서 한바퀴 돌기로 했다.   올 봄 벚꽃이 너무나 예뻤다는 타이들 베이슨 연못을 기점으로, 국회의사당과 그 앞의 풀을 지나 스미소니언 박물관들이 줄지어 있는 곳을 따라 걷다가 200미터 높이의 워싱톤 기념탑을 올려다 보니 비가 얼굴을 젖신다.   다시 걷기 시작하여 최근에 완공된 2차대전 기념비와 풀장을 돌고 그리고  포토맥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링컨기념관을 찾았다.  

마지막 나오는 길에 비옷을 걸친 무장한 군인들 20여명이 비옷을 입고 서 있길래 다가 가 보니 조각상이었고 그 앞에는 한국전 참전기념비라 되어 있어 감회가 깊었는데, 그 구석에 우리나라 국방장관의 조화가 비를 맞고 떨고 서 있다.   근래 한국 정부 일각에서 벌어지는 반미좌파 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것 같아 가슴이 시렸다.

3시간을 이슬비 속을 걸으며 워싱톤의 중심은 훑었지만, 마지막 본 그 참전비에 씌어진 문구로 인해 착찹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 미국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와 우리가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존경합니다”  3만명이나 되는 미국의 숭고한 목숨이 그들이 모르던 한국을 지키기 위해 뿌려졌다니.    작금의 한국에서의  반미 상황이 그들을 얼마나 실망시키고 좌절케 하는지 눈에 선하게 밟혀 온다.

그 기분이 이어져선가.   어두어져서 워싱톤 구경을 끝내고 호텔로 가기 위해 66번 도로를 탄다는 것이 그만 잘못 타서 다시 돌아 오기 위해 좌회전하는데 그 자리에 “싸이드카”가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수신호로 들어오지 말란다.   그래 그 순간 유턴을 잽싸게 하여 내리 달리는데 가다 보니 내차만 달리고 있는게 아닌가.    싸이드카 두대가 사이렌 굉음을 내고 라이트를 번쩍이며 내 차뒤에 붙은 것과 내 차앞에 교통차단 콘이 보인게 동시였다.     차를 세우고 속으로 생각했다.   야, 오늘 제대로 걸렸다.   딱지가 아니라 집에도 못가고 유치장 신세지게 됐구나, 으악.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교통이 “아임쏘리” 와 “아임 코리언”를 연발해도 분이 차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는 “ 아! 형씨, 그쪽 나라도 교통 경찰 사이렌 신호는 똑같지 않느냐?   왜 맘대로 아무 길이나 달려.   이 길은 폐쇄됐단 말이야, 으이씨”    그러면서도 다행스럽게도  퇴근길이라 차들이 몰려서인지 교통소통 모드로 들어 가며 반대편 차선의 차들을 막고 통행금지 콘을 치워주며 “Go! Go!”하며 얼른 싸라지란다.   싸이카가 따라와 교통차단 콘을 치워주지 않으면 나는 언제까지 고향을 그리워 하며 콘앞에 서 있어냐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교통이 고맙기도 하여 간단한 목례를 하고 그 자리를 잽싸게 빠져 나왔다.



10월 28일 (토)     쉐난도 공원의 단풍길

어제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햇살은 유난히  밝고 빛났다.   그게 다 인생 역정인 모양이다.  좋은 호텔에서 푹 쉬고 아침부페를 잘 먹고, 버지니아를 향하여 길을 나섰다.   쉐난도 단풍을 구경하기에 앞서 미국을 대표하는 쉐난도밸리의 “루레이 동굴”을 갔다.    

4억년이나 되었다는 이 동굴에는 100년에 1센치 밖에 자라지 않는다는 종유석 석순 석주들이 장대한 폭포를 이루다가  신비한 조형물을 각양각색으로 만들어 보여준다.   특히 천정이 완벽히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연못과 12층 빌딩규모의 대성전 내부에서 석순을 이용해서 내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드디어 미국 제일의 단풍의 절경이라는 쉐난도 공원의 능선도로인 “스카이라인 드라이브”를 탔다.      하늘의 파란색외에는 눈에 보이는 천지사방이 모두 색색가지 단풍숲의 연속이다.    보아도 보아도 지치지 않는   빨주노초파남보 단풍길을 장장 4시간을 달렸다.   그런데 아뿔싸!   한참 무아지경으로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불을 번쩍이며 싸이렌 굉음을 내는  순찰차가 따라 붙는다.

또 무조건 아이임 쏘리다.   35마일의 길을 55마일로 달렸다고 뒷차에서 신고가 들어 왔다나 뭐라나, 참.    그래 몇번 추월한 걸 가지고 신고까지 할게 뭐람.   이번에는 티켓이겠지 하고 기다리는데 이번에도 그냥가란다.   워닝이라나.   어두워지면 이 길에 노루가 나오니 조심해 가라는 당부도 함께 하면서.   이렇게 해서 또 미국 경찰의 신세를 졌다.



10월 29일 (일)    샤롯빌의 하루

샤롯빌은 미국에서도 살기 좋은 곳 최상위에 드는 교육도시이다.   버지니아 대학이 있고, 이 대학의 설립자이자 독립선언서 저자이며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의 고향이다.    다운타운에는 우리의 명동과 같은 “The Downtown Mall”이라는 거리가 있어 늘 사람들로 복잡된다.   가게도 식당도 영화관도 그리고 시청도 여기에 몰려있다.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이 거리가 시끌버끌하다.    우리도 사람 줄이 길게 늘어 선 식당(신기하게도 걸린 4개의 국기중 하나가 태극기인) York Place에서 먹고 나왔다.

시청 앞에는 세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들은 이 지역 출신 대통령들로서, 3대 토마스 제퍼슨 4대 제임스 메디슨 5대 제임스 몬로였다.    독립전쟁을 이끈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톤까지 포함하면 독립후 미국을 이끈 지도자는 모두 버지니아에서 나온 셈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1775년 영국의 조세정책에 반기를 든 미동부 13개주가 영국의 정규군과 전투를 시작하여 그후 8년간 줄기차게 저항을 한끝에 드디어 1783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사건이다.        

오늘부터 “썸머타임”이 해제되어 한시간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다.   집근처의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보고 나니 누구인가  반가이 달려와 손을 내민다.   가만히 보니  고교동창 인 “김용일”군이다.   40여년만에 처음 보는데도  쉽게 알아 보겠다.   버지니아대학의 교수로서 이 교회에서 시무 장로로 교회에 열심인 것이 보기 좋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동창을 만나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였다.



10월 30일 (월)     남쪽으로 린츠버그와 애퍼매턱스를 향하여

지방도로인 29번 국도에 단풍이 볼만하다하여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들고 나섰다.   차로 1시간 거리의 “린츠버그”는 역사를 간직한 우아한 도시로, 남북전쟁에서 남부군편에 섰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줄지어 선 “모뉴먼트 테라스”가 인상적이었다.   기념비 가운데는 한국전쟁때 희생된 청년들 것도 있었는데, 그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War never ends war”

이 근방의 “애퍼매턱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장으로 남부군이 북부군에게 항복을 했던 이곳 사람들에겐 아픈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1865년 4월 9일 남부군 대장 “리”장군이 치열한 전쟁 끝에 드디어 북부군의 “그랜트”장군에게 항복하고 뒤돌아 서서 울며 떠났고 그의 애마 “트래블러”도 그의 장병들도 울며 떠남으로 4년에 걸친 남북전쟁을 종결시킨 비운의 곳이란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몬티첼로”는 토마스 제퍼슨의 웅장한 저택이다.   언덕위 넓은 대지위에 세워진 프랑스양식의 건축물로 저택 곳곳에 그의 독창성과 혁신성이 드러난다.   요일이 나오는 시계, 한번에 열리는 겹문, 회전식 음식 시중문등 그가 고안 한 것들이었다.   6백만평의 농지에 60여명의 노예를 소유한 그가 “만민의 평등”을 주장했다는 대목에서는 그의 복잡한 과거사를 엿 볼 수 있었다.



10월 31일 (화)    서쪽으로 스톤턴과 렉싱턴을 향하여

오늘은 서쪽으로 1시간 반을 달려 스톤턴 북쪽의 “침니 공원”으로 갔다.   거대한 굴뚝 모양의 바위 일곱개가 우뚝 솓아 있는 곳이다.  참으로 희안하여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5억년전에 바다 밑이 융기하여 풍화에 의해 생성된 석회암이란다.  

아까 지나쳤던 스톤턴으로 들어 갔다.   가파른 언덕에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그림같은 동네다.    28대 대통령을 지낸 우드로 윌슨의 탄생지와 그를 기리는 “도서관”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 도시의 특성은 어느 곳에서나  훌륭한 대학 캠퍼스가 있는 것이다.    여기도 예외없이 “메리 볼드윈 대학”이 이 도시를 대표한다.   예술적으로도 쉐익스피어극만 공연하는 전용극장이 있고 옛극장인 “딕시 극장”에는 그 입구에 죤웨인의 커다란 포스터가 웃으며 반겨 맞는듯 했다.

다시 1시간을 남으로 달려 렉싱턴을 거쳐 “내추럴 브릿지”로 갔다.   60미터 높이의 천연 아치가 뚤려진 그 위로 다리가 형성되어 두 바위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가 된다.   지금도 차가 다니는 이 천연다리는 조지 워싱턴이 보이스카우트중에 발견했다고 한다.     밤에는 이 다리바위로 레이저를 쏘면서 클라식 음악을 튼다하니 장관임에는 틀림없겠다.

렉싱턴은 대학도시로 몇해전 보았던 미국영화 “G. I. Jane” 에서 “데미무어”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던 “버지니아 사관학교(VMI) ”가 바로 이 곳에 있다.   마샬플랜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샬원수도 이 학교 출신이다.     또한 “워싱톤 & 리” 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데, 구내의 “리”성당에는 리장군과 그의 애마 트래블러가 묻혀있다 한다.    

오늘은 “할로윈 데이”이다.   귀신을 쫒는 날로 귀신 복장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그 집에서는 준비된 사탕을 준다는 것이다.   오후 4시가 되니 온 거리가 무섭고 괴상한 복장을 한 아이들과 따라나온 어른들(이들도 덩달아 야릇한 복장을 하고)로 북새통이다.   가게마다 캔디와 초코렛을 준비해 지나가는 아이들 바켓트에 넣어 주는 재미있는 광경이다.   미국의 모든 절기가 성경적인데 반하여, 이 축제만은 비성경적이라 일부 교회에서는 “Holy Win”축제를 별도로 연다 한다.



11월 1일 (수)    동쪽으로 리치몬드와 피터스버그를 향하여

1시간을 넘겨 동쪽으로 드라이브를 하니 버지니아의 주도인 리치몬드에 도착했다.   영국의 첫 식민지 수도는 1619년에 제임스타운, 1699년에 윌리암스버그였으나, 독립전쟁이 일어난 1780년에 드디어 리치몬드가 주도가 되었다.   “캐피톨 스퀘어”에의 중심에는 토마스 제퍼슨이 로마신전을 본따 설계한  주의회의사당이 있고 그 주위로 시청과 주지사 관저및 관청들이 모여 있다.

제임스강변을 끼고  2.4키로 길이의 운하산책로가 있고, 곳곳에 남북전쟁의 흔적들이 있는데 끈어진 철교에는 패퇴하는 남부군의 애절한 사연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도 예외없이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전사자 명단에 뒤이어 “아이젠하워 장군”의 경귀가 새겨져 있다.   “전쟁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라도 승리하지 않으면 않된다”    

높은 다리 밑으로 줄을 걸어 현수교를 매달아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만든 브릿지를 통하여  “벨 아일 섬”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이곳은 세찬 물줄기를 따라 섬을 일주하는 산책코스로 개발한 것이다.   또한 시내 서쪽 가로에는 “동상 거리”가 있어 12키로에 걸쳐 남부군 영웅 5인과 최근에 논란 끝에 추가된 테니스 스타 “아서 애쉬”의 동상이 일정 간격으로 우뚝 서 있었다.

리치몬드 남쪽 30분 거리에는 남북전쟁 최후의 대격전이 벌어졌던  피터스버그가 있다.   북부군이 리치몬드를 장악하고 전쟁을 끝내기위해서는 남부군의 주보급로인 피터스버그를 함락하는 일이었다.   10개월간의 포위와 1865년 4월 최후의 결전으로 북군의 승리로 4년간의 남북전쟁은 끝이 난 것이다.   피터즈버그 국립전투지가 그 처절한 전투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승리의 기쁨도 잠시, 링컨대통령은 닷새후 워싱톤의 포드극장에서 남부출신 연극배우의 흉탄에 암살된 것이다.



11월 2일 (목)    버지니아대학교(UVA)

대학도시인 샤롯빌에는 버지니아대학이 우뚝 서 있다.   토마스 제퍼슨이 설립한 이 대학은 로마 신전을 본 뜬 장엄한 로툰다를 중심으로 우수 학생의 기숙사인 “Academic Village” 가 죽 둘러있는 것이 특징이다.   넓은 대지위에 수많은 캠퍼스 빌딩이 있고, 특히 법과대학 의과대학 그리고 MBA대학인 Darden School이 손꼽을만 하단다.   여러 개의 도서관이 학생들을 면학 분위기를 돕고, 미술관에는 좋은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버지니아대학 캠퍼스를 걷다 보면은 유난히 어여쁜 여학생들이 많아 눈이 자주 머문다.   모두 여배우들 같다고 하니 아내도 흔쾌히 동의한다.   영국의 첫 이주자들이 들어와 순혈을 지켜서 그런가?   아니면 양반동네가 물좋고 공기좋고 인심이 좋아서 미인들을 만들어 내나?     연구 과제가 또 하나 늘은 것 같다.

오후에는 또 다시 단풍 풍광을 감상하러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쉐난도의 남쪽 능선 연장로인 “블루리지 파크웨이”를 따라 남하하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나뭇잎에서 붉은 광채가 난다.    내려다 보이는 온 산이 불타는 듯하다.    가는 도중에 등산로가 있다 하여 오랜만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Humpback Rocks” 이라는 곳이었는데 산을 1시간 오르니 낙타등과 같이 생긴 기암괴석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11월 3일 (금)     샤롯빌 주변을 돌아보며 여유있는 하루를 보내다

우리가 묵고 있는 집은 대지가 3000여평에 3층 벽돌집으로 지은지 100년이 되었다는 저택에 속한다.     마치 옛날  귀족이 살던 집인양 싶다.    넓은 마당에는 오색의 단풍이 물들어 있고  다람쥐들이 쏜살같이 내달린다.   집앞에는 수영장이 있고 각종 조각품들이 구석구석 서 있다.   별도로 드나드는  커다란 응접실이 특이했으며, 평소에 비어 둔 집이지만 실내 가구들은 살아있는듯 잘 정돈되어 있었다.

늦은 아침을 들고 우리는 근처의 “와이너리”인 “킹패밀리 빈야드”로 나갔다.   쉐난도 산 바로 밑의 단풍 경치가 일품이다.   간단한 와인시음도 하고 포도밭도 둘러 보았다.   또한 근처 버지니아대학 소유의 “Bird wood Golf Club”에 나가 학생들이 재잘대며 골프 연습을 하는 것을 보면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니 짐짓 여유로운 시간이 되었다.  

오후에는 버지니아대학 교수인 김용일의 실험실과 사무실을 구경하며 그가 연구한 근육과 신경 전기 관련 설명을 들으니 근육무력증의 치료가 가까와졌음을 느끼며 그의 업적에 커다란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11월 4일 (토)    또다시 떠난 곳으로 돌아 오기

새벽 6시 교회에서의 새벽모임을 가진후 8시에 샤롯빌을 출발하여 일로일로 북상하였다.    여행의 묘미상 왔던 길로 다시 올라 가서는 재미가 없는 것을 아는 우리는 이번에는 중부를 관통하여 올라 가기로 했다.    버지니아 경계를 넘고 매릴랜드 경계도 넘어 펜실바니아로 들어 갔다.   시간은 다소 많이 걸리지만은 또 다른 경치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남북전쟁중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이 바로 게티스버그이며 또한 링컨대통령의 연설로도 유명한 곳이다.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7월의 3일간의 전투에서 양측이 무려 51,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지였다.    이 무지막지한 사상자를 묻기 위한 묘소가 건설되었고 그 봉헌식이 1863년 11월 9일에 이 곳에서 열렸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행한 2분짜리 연설 (272자로 구성)이 바로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이 된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의 명연설로 세계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아미시촌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5명의 여학생이 총에 맞아 죽고 12명이 다친 비극이 일어났다.   범행을 저지른 백인 청년은 자살하였고.     미국이 충격에 빠졌고, 아미시에 대한 동정과, 그러나 피해자인 아미시들이 그 범행청년을 용서하는 아름다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 났다.   그 아미시들이 살고 있는 곳이 랭카스타 근처의 인터코스(아마도 교차로라는 뜻이겠지)촌이다.   프린스턴으로 돌아 가는 마지막 코스로 아미시촌을 찾은 것은  우리도 위로의 기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모국인 스위스에서 박해받던 재침례교 일파들이 1700년 초부터 펜실바니아의 랭카스터 주변에 정착하였고,  어둡고 간소한 복장과 자동차나 전기등 문명의 이기를 이용않는 검소한 생활을 하며 농사일을 하는 착한 민족이다.   그들이 왜 이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우리는 수공예품 몇점을 집어들고 잠시 그들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저녁 6시에 프린스턴 집에 도착하였으니 장장 10시간이 걸린 셈이다.   중간의 로스타임을 빼도 족히 8시간은 걸린 셈이니 많이 돌아 온 것 같다.   그래도 숨이 좀 트인다.   내일은 또 내일이라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겠지.


11월 9일 (금)     가을의 마지막 자락에서

올 가을은 단풍구경을 눈알에 적조현상이 일어나리 만큼  하고 또 했다.   거대한 산맥의 온통 타오르는듯한 불바다에서부터 주택가의 영롱한  빨강 노랑색갈 가로수에까지.   그러나 모든 일에는 앞뒤가 있는 법이다.   나무에 달려있던 단풍잎이 떨어지면 낙엽이 되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이 집관리에 애를 먹는 부분이 바로 잔디깎기와 낙엽치우기란다.    

정아네 동네에서도 집집마다 난리다.   다음주에 낙엽치우는 차가 낙엽을 걷어 가기 위해 온다기에 집앞뒤마당의 수북히 쌓인 낙엽을 치워 집앞 길가로 내놓는 전쟁을 하고 있다.     여기 부부는 직장인이라 결국은  집에 남아있는 우리가 팔을 걷어 부칠 수 밖에 없다.   인과응보라 했던가 아니면 결자해지라 했던가?   단풍구경을 쩔도록 했으니, 낙엽청소로 쩔어봐라 이건가?   그래서 우리 부부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루종일 입에 단내나도록 Blower로 낙엽을 굴리고 갈구리로 모으고 자루에 담아 리어카에 싣고 길가에 쌓는 단순작업을 수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1에이커 (1300평) 에 달하는 마당을 원망하면서 말이다.

낙엽이 넓은 마당에 엄청나게 쌓여 있다.   푸짐한 팔뚝으로 한짐지어 푸대에 담기를 여러번 반복하다 피식 웃음이 난다.   오장동 어는 냉면집에서는 돈을 이렇게 푸대자루에 담아낼 정도로 장사가 잘 된다지.    만원짜리 지폐를 이렇게 푸대에 쓸어 담는 착각에 잠시 혼미해지기도 한다.    

옆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낙엽을 쓸어 담는  아내에게 묻는다.   “여보, 올 가을 우리가  본 단풍이 많은 것 같아, 아니면 우리가 치우는 낙엽이 많은 것 같아?”   “아이 참, 비교가 않되지.   단풍이 훨얼씬 많았지!”   그래서 나는 이 짙어가는 가을의 자락에서 잠시 생각했다.   “아아 그렇지, 우리도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많은 은혜를 하늘로 부터 받았으면서도, 땅에서의 우리 행위가 너무 미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11월 13일 (월 )      손주날 껄 그랫나 봐

우리가 손주보러 온 것도 어언간 2달이 돼어 간다.   처음에 왔을때는 겨우겨우 걷던 진아가 이제는 뜀박질을 한다.       Shopping Mall 에 데리고 나가면 뒤쫒아 뛰느라고 어른들이 정신없다.   어린 아가는 특히 아침에 자고 나면 더욱 이쁘다.   발가스런 볼에 생생한 눈망울을 하고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건네면 그만 간장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키울때는 어떠했는가 떠올리려고 노력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손주는 더없이 이쁘다.   깨물어도 베물어도 예쁘기 기양 없다.   내가 이럴진대 아내는 더욱 나간다.   그러면서 아내가 나즉막히 중얼거린다.   “이렇게 이쁠줄 알았으면 자식말고 손주날껄 그랬나 봐”   그래서 그랬나,   얼마전 늦둥이 꿈을 꾸었던 것이.

내일이면 여길 떠난다.   사랑하는 딸과 손녀를 두고.   허전한 마음은 매양 같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정아가 내년 3월이면 떡두꺼비같은 손자를 안겨줄테니깐.   그럼 그때까지 내 아이야 잘 있거라.                                    (여기는 프린스턴 2006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