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2649 추천 수 75 댓글 0
(오슈 전시여행은 하고픈 얘기가 많은 특별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회보는 지면제약이 커 그림얘기에 집중하고, 자잘한 여행얘기는 자유로이 여기 홈페이지에 따로 싣는다.)

오슈는 삐레네산맥에 가까이 내려 붙은 시골이다. 빠리 몽빠르나스역에서 떼제베(TGV)를 타고 보르도를 거쳐 아쟝(Agen)에서 내려서 한 시간쯤 기다려 버스(autocar)로 갈아탄다. 온갖 동네 다 들러 손님 태우고 내리며 한 시간쯤 더 가면 드디어 오슈에 닿는다. 모두 6시간 반, 지상으론 제일 빠른 길이다. 빠리에서 비행기로 뚤루스(Toulouse)로, 거기서 버스로 오슈에 가면 비용이나 시간에서 모두 득이다. 그러나 땅맛도 보고 여행의 낭만도 즐기려면 비행기보단 역시 육로여행이다.
오슈 비에날레 참여작가 모두에게 도착일 5월 1일부터 출발일 15일까지의 숙박과 하루 세끼 식사가 무료 제공되었는데, 그 중 8명의 작가가 현지 시민 집에 머물기로 되었다. 이른 바 홈스테이. 나도 아내와 함께 현지 주민 집에 묵기로 되어 있었다.
버스는 오슈 기차역 앞에 종착했다. 전시기획자 부부, 현지 미술협회 회장, 우리 부부가 묵을 집 주인 할머니 쟈닉과 그의 딸 알리스가 다른 작가일행과 떨어져 따로 도착한 우리 부부를 마중 나와 주었다.

전시장소는 시내중심에 화동시절 우리학교 강당이나 체육관정도 크기의 대리석건물 메종 데 가스꼰(Maison de Gascogne: 이 de를 데로 발음하고 있었다). 시 최대 전시장이다.
도착 다음날인 2일엔 작품을 걸고 3일부터 개관. 개관식은 5일로, 대성황. 넓은 실내가 꽉 들어찼다. 오슈 시장 부시장이 참석했고, 마침 한불 수교 120주년 행사의 하나로 편입되어 주불 한국문화원장도 내려왔고-대사는 늦게 12일 따로 내려 왔다- 빠리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물방울화가 김창렬도 내려왔다.
2주일의 전시기간 중 한국작가와 현지작가를 위한 행사가 빡빡하게 진행됐다.
두 차례의 한국미술 세미나, 김창렬 특별회견, 누드스케치 2회, 현지 미술아카데미 방문환담 등 미술관련 행사가 이어졌다.
시내중심 시청 앞 로타리엔 우리 전시를 알리는 전광판이 기간 내내 떠있고 현지 신문들은 자주 우리 기사로 도배하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한 노부부는 지나는 우리를 붙잡고 유창한 영어로 이런 저런 말을 붙인다. 한 눈에 한국작가로 알아 보았다고 했다.

6일, 문화예술담당 부시장이 오슈 구시가 관광을 안내했다.
이곳 프랑스 서남부 지역은 중부의 드넓은 평야지대와 달리 삐레네산맥이 그 여력으로 물결치듯 일렁여 놓은 구릉지대다. 이 중세의 도시 오슈도 급경사의 언덕에 달라 붙듯 세워진 도시다. 삼총사의 주인공 달따냥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엔 그의 실물대 동상이 언덕 중턱에 서있고, 언덕정수리 가장 돋보이는 자리엔 빠리의 노뜨르담 대성당을 닮은 거구의 쎙뜨마리 대성당(Cathedrale Sainte Marie)이 우뚝 솟았다. 15,6세기 200년에 걸쳐 지었다 했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달리 화려하고 밝고 맑은 색을 쏘아내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했다. 부시장은 남부지방에선 셍뜨마리, 북부지방에선 노뜨르담으로 부른다고 귀띔한다.

꼴롬바쥬(colombage: 나무골격과 흙벽으로 된 프랑스 전통가옥)들은 어느 집이든 내 눈을 사로잡고는 다시 놓아주려 하질 않는다. 나무골격이 우리 것은 일정한 형식을 갖춘 기능적 구조이지만 꼴롬바쥬의 나무얼개는 훨씬 자유스럽고 회화적이어서, 나무골격의 선과 벽면의 구성 그리고 단순한 색 대비는 그것 그대로 구조주의 추상화다. 프랑스 사람들의 미적 재능은 이렇게 생활의 구석구석까지도 미술작품으로 요리해내고 있었다.
16세기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가 한때 교사로 일했던 학교도 옛 그대로라 한다. 그는 뒷날 아쟝에서 대흑사병 때 처와 자식을 모두 잃고 예언자로 변신한다.
오슈는 보행자 천국이다. 건널목이든 무단횡단이든 보행자가 건널 낌새만 보여도 아예 차가 정지하고는 사람이 다 건너길 기다려준다. 미안해서 차더러 먼저 지나가라 손짓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오히려 먼저 건너라고 손짓해온다.

10일엔 오슈에서 차로 한 시간 가웃 떨어진 대도시 뚤루스와 바로 그 옆 알비(Albi)의 미술관을 찾았다. 뚤루스의 벰베르그 미술관(Fondation Bemberg)은 색채의 마술사 보나르(Pierre Bonnard)의 작품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책으로만 봐오던 원화 앞에 직접 마주하고 서면 그림에서 느끼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나의 평소 여행도 늘 대화가의 족적을 더듬거나 미술관을 좇아 순례하는 것이지만, 이번에도 보나르 자화상(1945년作) 앞에서 번개에 맞은 듯 얼어 붙어 버렸다. 알비의 뚤루스-로뜨렉(Henri de Toulouse-Lautrec) 미술관은 이 불행한 천재 귀족화가의 고향답게 그의 유족이 기부한 천 여 점의 작품-포스터 31점 전부와, 스케치 소품에서 미완성 유화 대작에 이르기까지-을 전시하고 있었다.
            
다음날 11일, 오슈 주변의 손바닥만한 마을 구경에 나선다.
렉뚜르(Lectoure) 마을은 언덕꼭대기 높이 둥지틀고 앉았는데, 대성당 뒤뜰에선 멀리 삐레네산맥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서 지평선을 슬쩍 치켜올려 놓았다. 대성당 넓은 지하실에선 제르스지방의 구석기 로마 중세에 이르는 출토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유물의 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다. 언덕 밑 외곽의 블뢰 드 렉뚜르(Bleu de Lectoure)는 大靑풀(Isatis tinctoria)에서 남색(indigo) 천연안료와 염료를 추출해내는 프랑스에 하나뿐인 공장이다. 우리도 쪽(Persicaria tinctoria)에서 쪽물을 내어 천연의 남색을 얻지만, 아직도 염색업자의 일관 가내수공업에 머물러있고, 쪽 천연안료도 아직 생산하지 않고 있는 것이 참 아쉽다. 염료는 염색용, 안료는 칠(페인트)용 착색재료다. 안료의 입자는 염료입자보다 굵어 바탕재료의 조직에 스며들지 못하고 표면에 남아, 바르는 이의 의도대로 색을 내게 된다.

라르셍글르(Larressingle) 마을은 온 마을을 통째로 높은 성벽으로 감쌌는데, 성벽 밖으로는 해자를 둘렀고 하나뿐인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성당 안으로 들게 된다. 무작정 들어왔다간 그대로 성당 안에 갇힌 꼴이 된다. 성당 안 회당 천장 위 한 구석엔 게릴라 부대를 감춰둘 수 있는 비밀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마을 주거지는 성벽을 외벽으로 하여 성안쪽으로 긴 행랑채 짓듯 빙 둘러 세웠다. 렉뚜르보다 무척이나 작고 한갓진 이 마을에서 살아 보고픈 충동을 느끼고 있는데, 안내를 하던 마을 홍보담당자는 벌써 몇몇 영국 화가들이 집을 사서 입주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일러준다.

까쎄뉴(Cassaigne) 마을의 샤또 드 까쎄뉴(Chateau de Cassaigne)는 알마냑 양조장이다.
알마냑(armagnac)은 꼬냑과 마찬가지로 백포도주를 증류해서 오크통(oak cask) 속에서 짧게는 2년, 길면 10년 이상 숙성한 브랜디를 말한다. 이 샤또에선 최소 5년 최장 45년을 숙성한다고 했다. 알마냑은 제르스지방産을 말하고 꼬냑은 꼬냑지방에서 생산된 것이다. 기념으로 1946년산 한 병을 샀다. 40년간 숙성한 것이다. 내 출생을 따져 1945년산을 찾았지만 이 녀석이 제일 오래된 것이라 내 의도는 살짝 빗나갔다.  

플라랑(Flaran) 마을의 수도원-제르스 데빠뜨멍이 미술관으로 개조 사용한다-에선 이곳 안내양(docent)의 똑 떨어지는 설명이 하도 예뻐 그니 얼굴을 명함크기 메모지에 휙 그려 건네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우리 전시장에서 한 중년 사내가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자기 얼굴을 그려 달란다. 아마 같이 갔던 이곳 사람 누군가가 귀띔해줬나 보다. 준비된 재료가 없어 아무 이면지에 한 장 휘갈겨 그려주니 이 사람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10세기에서 12,3세기에 걸쳐 세워진 이곳 마을들은 천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인 역사의 숨결을 연금술 비법으로 제련해서 의식의 내면에 간직하고는 저리도 오래된 얼굴을 오늘의 표정으로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저들의 프라이드를 묵직한 설득력으로 우리의 뇌리에 깊숙이 꽂아 넣는다. (속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