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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에서 계속)
우리 부부가 묵은 집 주인 쟈닉은 이곳 교사 출신의 일흔 살 독신 할머니다. 전시장에서 3킬로쯤 올라간 외곽 전원지대 언덕 꼭대기에 백년 넘은 석조 단층집. 부유한 윤기는 흐르지 않지만 솜씨 좋게 꾸며낸 할머니의 감각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입구(portico)에 새로 덧붙여 지은 별채, 화실과 침실 목욕실을 모두 갖췄다. 우리가 묵을 곳이다. 넓은 정원은 아파트족 우리에겐 낙원. 온갖 기화요초와 야생 풀, 넝쿨과 교목 관목으로 한껏 연출했다. 작지만 금붕어 노는 연못도 팠다. 식당 앞 창문을 열면 이백 여 평 널찍한 잔디밭 너머 삐레네 연봉이 눈앞에 확 달려든다. 아내는 너무 좋아 콩콩 뛴다.

참여작가 모두 한 학교의 식당을 빌려 세 끼니를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아침을 할머니와 집에서 하기로 했다. 빵과 커피 그리고 과일, 간단해서 속이 편하다.
할머니가 아침 저녁으로 차로 데리고 다녀야 하는 수고도 덜어 드릴 겸 운동도 할 겸, 이내 길만 익히고는 걸어 다니기로 했다. 아침에 내려 오는 길은 30분, 저녁에 올라 갈 때 40분. 적당한 거리다. 전원주택 사이 시골길. 이처럼 아름다운 산보를 어디에서 또 즐길 수 있으랴. 들판엔 개양귀비(coquelicot. 영poppy)가 지천으로 피어나 새마알간 주황꽃잎을 飛天衣 날듯 하늘에 터뜨려, 마치 모네(Claude Monet)의 그림 속을 걷고 있는 듯하다.

할머니는 일찍이 이혼하고 딸 셋을 입양했는데 첫째가 프랑스인, 둘째는 월남사람, 이 셋째가 한국인 알리스다. 알리스의 이목구비엔 백인의 모습이 스쳤다. 알리스는 한국어는 물론 네 살 때 떠난 한국의 기억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왜 자기가 입양되어야만 했느냐며 서른을 넘긴 지금도 서운한 속내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알리스가 성질이 불 같다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나는 한국인은 다 그렇다 하니, 알리스가 옆에서 생긋 웃는데 내 대답이 싫지 않은 표정이다.
할머니는 또 알리스가 대구 출생이라고 하면서 대구가 북한 땅이냐고 묻는다. 어려서 그가 북한 노래만 부르는 것을 보니, 북한사람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북한노래는 이곳 TV에 자주 방송되었었노라고 했다. 조목조목 따져가며 바로 고쳐는 주었지만, 이 한 장면은 이곳에 비쳐진 한국 위상의 실상이다. 그 동안 우리가 해온 일의 현재이다. 할머니는 아시아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그 내용도 중국 일본 그리고 월남 라오스 티벳이 전부다. 할머니 집안 곳곳을 빼곡이 장식한 민예품들은 모두 이들 나라 것이었다. 한국 것이라야 알리스에 신겨 보낸 꽃신 그리고 내가 선물로 가져간 작은 자개제품. 이 둘도 굴러들어 온 것.

개관식 날 저녁, 행사가 모두 끝나고 할머니의 절친한 친구 엘리자베뜨가 느닷없이 할머니와 우리 부부를 시내 스페인식당으로 초청했다. 내가 끼를 부려 식당 여종업원 스페인 아가씨-글래머였다-와 식탁 사이 통로에서 한바탕 춤추며 놀았더니 좌중이 한껏 흥겨워 한다. 엘리자베뜨는 다음날 우리를 이웃 마을의 자기집에 점심 초대했다. 거위간을 가정에서 만든 것이라며-공장생산품보다 더 귀하게 친다-내어 놓았고, 메인 요리만도 세 가지나 상에 올렸다. 12시에 시작한 점심이 네시 반에야 끝났다. 그것도 우리 할머니 쟈닉이 우리 모두를 이날 자기집 저녁에 초대한 터라 저녁 준비하러 서둘러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뜨의 남편 쟈끄는 두 번이나 심장수술을 받은 심근경색 환자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대접한다고 포도주 잔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간호사 경력의 엘리자베뜨가 남편에게 눈을 부라려보지만 별 수 없다. 쟈끄가 씽긋 웃으며 술잔을 또다시 입으로 가져가면 맞웃음과 맞잔으로 화답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는 그에게 술 따르는 법도를 엄히 가르쳐주었다. 절대로 자기 잔에 자기가 술 따르는 법이 아니라는 것을.

8일은 월요일이었지만 전승기념일이어서 공휴다. 알리스와 할머니 쟈닉, 엘리자베뜨 부부, 우리 부부는 차 두대로 대서양 연안의 명승지 생 쟝 드 뤼즈(St. Jean de Luz)와 비야리쯔(Biarritz)를 관광했다. 삐레네산맥이 이 지점에서 대서양으로 숨어 들며 명승을 낳았다. 오슈에서는 250킬로 밖이다. 바스끄(Basque) 지역이지만 스페인에서와 달리 치안이 안정되어 있다 했다. 생 쟝 드 뤼즈 거리에는 바스끄 복장을 한 바스끄 남자들의 연주와 춤과 노래로 가득한데 그들의 춤과 노래엔 강렬한 남성 에너지와 카리스마가 넘쳐 난다.
비야리쯔는 숨막히는 절경이다. 대서양 거친 파도가 거침없이 밀려와 부딪쳐 해안 암벽을 깎아내고 신의 손으로 조각해놓은 곳. 그리고 인간이 예술로 조심스레 흰옷을 입혔다.

쟈닉과 엘리자베뜨 부부는 브르따뉴(Bretagne)지방 출신인 브르똥(Breton)이라고 했다. 갈색눈동자와 검은 머리의 이 지방사람 가스꼰(Gascogne)과 달리 이들은 금발에 푸른 눈이다. 타지방 사람인 것이다. 많은 브르똥이 이 나라 각지로 흘러 들어 질기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쟈닉 할머니, 알리스 부부, 엘리자베뜨 부부, 우리 부부 이렇게 네 가족은 함께 어울리며 전시기간 내내 만남을 즐겼다. 받으면 갚아야 하는 법. 때마다 우리도 그들을 식당으로 초대했다. 주머니가 예상외로 빨리 가벼워졌다. 혹시나 해서 넉넉히 준비해 간 여벌의 선물들도 모두 갈 곳을 찾았다.
알리스와 쟈닉 할머니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기적의 성지 루르드(Lourdes, Lurdes)에 다녀 오자며 이끈다. 전시도록을 통해 내 건강상태를 알고 그러자는 것 같다. 눈물겹게 고맙지만 너무 신세지우는 것도 미안하고 전시 끝머리라 할 일도 많아 물릴 수 밖에 없었다.
알리스 엘리자베뜨와는 간단한 영어로 소통이 됐지만, 한 두 마디 겨우 하는 우리 할머니 쟈닉과 전혀 통하지 못하는 쟈끄와는 부득불 만국어 그리고 집마다 준비해두고 있는 두툼한 불영영불사전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 이해가 안된 것은 단지 1 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작품을 내린 14일, 오슈 마지막 밤. 우리와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저들의 자랑 고급 거위간-거위간은 품질 차이가 극심하다-이 듬뿍 상에 올랐고, 이 시골에서 어떻게 구해왔는지 귀한 한국산 라면도 모두가 맛볼 만큼 끓여냈다. 저들의 성의가 이렇듯 살가웠다. 플록(floc: 알마냑 포도주 과일주스를 섞어 만든 감미주)과 포도주가 끊임없이 돌려졌다. 그리고 노래 판. 모두가 어깨 겯고 번갈아 노래 불렀다.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하고 그리고 정에 취했다. 마지막 노래는 조용필의 “친구”, 한국팀이 응답한 피날레였다. 이번 비에날레의 주제처럼 한국과 프랑스가 만남-Rencontres artistiques et culturelles Gers/Coree-을 확인하고 모두 섞여 한판이 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