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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미술관 이중섭 백년의 신화

 

올해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

작고 6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립미술관 역사상 최초로

이중섭의 개인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중섭은 명실상부한

‘국민작가’로 1970년대 이후

가히 ‘붐’이라고 할만큼

폭발적인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나 연구자들이

원작(原作)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을 소장하고 있는

뉴욕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총 60개 소장처로부터 200여점의 작품,

100여점의 자료를 대여해 선보이고 있다.

 
<황소>, <욕지도 풍경>, <길 떠나는 가족> 등

그의 대표적인 유화 60여점 외에

드로잉, 은지화, 엽서화, 편지화, 유품 및

자료 등이 총망라되여 있습니다.

  

덕수궁미술관

이중섭 백년의 신화

 

 

이중섭은 1938년 자유미술가협회의

제2회 공모전에 출품해 수상을 하고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미술가협회는

당시에 가장 전위적인 미술 단체로

일본 추상미술의 중심 그룹이었다.

 

한국인으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박생광, 송혜수, 문학수 등이 참여했으며,

추상을 표방한 단체였지만

표현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등

새로운 예술사조도 수용하고 있었다.

이중섭은 표현주의적인 경향으로

소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그는 1941년 일본에 유학한 미술가들이

결성한 조선신미술가협회의 회우로 추대되어

민족적 미의식의 실현을 도모했다.

 

1943년에는 제7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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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궁핍했으나

죽어서는 신화가 된 화가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흰소> <달과 까마귀> 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가족들과 이별한 채 살아야 했지만

평생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향년 41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림에 대한 열정뿐아니라

화가의 개성; uniqueness,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사랑

꿈과 순수함이 녹아있음을 봅니다.

열악한 환경을 넘어선..

그래서 그를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혹자의 평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보아온 그림뿐아니라 처음 대하는 그림도 있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가족에게 보낸 정감있는 편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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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아내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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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1943년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원산에 머물렀다.

 

1945년 문화학원 재학 중

일본인 후배이며 애인이었던

야마모토 마사코()가

홀로 현해탄을 건너와

그해 5월 원산에서 결혼했다.

 

마사코는

이남덕()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신사실파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월남 이후에는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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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종이 그림이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팔린 그림 값을 떼이는 등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큰 실의에 빠졌다.

 

그는 일본에 보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유랑 생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깊은 좌절과

자괴감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져

조현병(정신분열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다가

 그해 9월 6일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이후 1956년 만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통영, 진주, 서울, 대구, 왜관 등지를

전전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말년에는 가족과 재회할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을 앓으며,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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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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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서양회화의 기초 위에

동양의 미학을 실현시킨 화가였다고 할까요.


해부학적 이해와 엄밀한 데생

실력을 연마한 기초 위에

우리나라 고유의 미의식을 담아내고자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서예와 같은 일필휘지의 필력이

유화의 붓 자국에 드러나고,

분청사기와 같은 겹쳐진 재료의

은은한 효과가 작품의 표면에 묻어 나옵니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은

장난스러운 해학이 있는가 하면

자유롭고 유려한 선조(線彫)의

아름다움에서 일종의 격조가 풍겨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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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그림은 1930년대부터

이중섭의 작품에 등장하는데,

흰 소를 자주 그린 것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킨 두 마리 소의 대결에서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준다.

 

또한 그에게 소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갈등과 고통, 절망, 분노를 표현하고,

때로는 희망과 의지, 힘을 상징한다.

 

또한 소와 아이가 어울려 노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적인 웃음과

인간적인 정감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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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평탄치 않았던 생애로 인해

‘비운의 화가’로 전설처럼 기억되고 있다.

 

그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독과

절망을 그림으로 해소하려는 듯

격렬한 터치로 소를 그렸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도원과 같은 환상적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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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에서

대지주 집안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스승인 임용련을 만나

서구의 새로운 예술에

일찍 눈을 뜨는 한편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일본 문화학원 미술학부(양화과)로 옮겼다.

당시 문화학원은

문부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상류층 자제들이 많이 다녔다.

 

김병기, 문학수, 유영국, 안기풍, 이정규 등이

문화학원에 먼저 들어와 있어 이들과 교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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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昰 2016.07.31 11:14
    우천,
    그림 많이 실었네.
    전시회에 빠진 것까지도 여기엔 걸었군.
    전시장에선 사진을 찍지 못하니
    아쉬움이 많았었는데,
    몇 장은 내려받아 저장했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