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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이 떠난 지 82년, 그를 기려 시 한 줄을 올린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서해성


국치 당하던 밤과 밤 사이


을사년과 경술년 사이


눈발 퍼붓는데


열 정승 낸 삼한 땅 으뜸 갑족甲族 이회영


마흔 또 예순 식구 솔가하여


열두 마차에 나누어 타고


광무황제 잠들지 못하는 새벽을 틈 타


얼어붙고 있는 열수 압록을 건너


서간도 벌판 내달려


조선 5백년을 서슴없이 횡단하여


영광보다 굴욕을 섬겨


나라 잃은 자 욕되게 사는 게 무엇인지


붓을 벼리어내고 칼로 세웠나니


신흥무관학교라.


잃어버린 왕조에게 배고픔과 욕됨 말고는 얻은 게 없건만


목숨 하나 무기 삼아 모여든 겨레붙이들과


한솥밥 지어먹으며


잃은 것 되찾아 옛날로 살고자 한 게 아니라 새로 세상을 열고자 하였더라.


삼한갑족 재산 다 털어


몸에 익은 모든 봉건 인습까지 다 바쳐


주인이 없어야 종이 없다 외치고 싸우며,


해방은 왜놈으로부터 해방만이 아니라 마침내 자유 공평 세상일라


그 길로 내달려갔나니,


우당 이회영과 6형제.


건석철회시호.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떼어서 읽을 수 없는 6형제들 이름


건석철회시호.


이레에 세 끼 먹는 주린 연경燕京의 밤,


홀로 부는 젓대가락에 얼었던 호야등은 펄럭이는데


붓을 높이 들어 난를 쳤다.


김정희가 여기 청국淸國 스승을 기려 완당이었던가.


붓을 세 번 꼬아 제 이파리 끝으로 가는 난잎에 이슬 맺혀


저 끝에 조국 있어라. 


그 제자 이하응, 흥선이라 대원군 볼모로 끌려와 난을 쳤던가.


릴지언정 붓을 꺾지 않으리니


5백년 묵은 눈물로 먹을 갈아


이씨 조선 마지막 붓끝으로 그려 올린 난을 내다 팔아 칼을 얻었더라.


난잎 한 줄기에서 혁명과 시가 함께 번져 나와


삼천리를 화선지로 삼았음이여.


백년 뒤, 지나는 사람 있어,


그 난잎에 베어 푸른 피가 도는 까닭에 따라 읽노니


난잎으로 칼을 얻다.


.........................................................................................


* 연경燕京 : 베이징

* 이회영은 망명시절 배고픈 밤에 피리(대금, 퉁소, 젓대)를 불곤 했고 묵란墨蘭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 2014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는 “우당 이회영과 6형제 -난잎으로 칼을 얻다” 전시회가 열린다. 

  (2015년 3.1절까지) 




[시론/서해성] 우당 이회영... 난잎으로 칼을 얻다


고문 끝에 떠나신 11월17일.. 다시 꿈꾸는 해방




‘을씨년스러운’ 존재들과 그에 맞선 민중


11월 17일은 망국일이다.

8월 29일과 더불어 조선은 두 개의 망국일 또는 국치일을 가지고 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덕수궁 중명전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신하들을 집요하게 겁박하여

조약문에 강제 서명케 했다.

조선 백성들은 이 날을 잊지 않고자 날이 흐리고도 처연하면 을사년스럽다고들 불렀다.

이 말이 이윽고 을씨년스럽다가 된 것이다.

일제와 친일파가 남긴 유산은 이 말 한 마디에 씻을 수 없이 응축되어 있다.

그들은 한낱 을씨년스러운 존재들일 뿐인 것이다.

이에 맞서 일어난 건 나랏님에게 구름 낀 볕늬도 쬔 적이 없는 민중들, 곧 의병이었다.


망국 축하 훈장받은 ‘76인’ 누구인가


두 번째 망국을 맞았을 때 서울 인사동 북쪽에 있던 충훈부에서는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남산 북쪽 기슭 한국 통감관저에서 일한합방문서에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서명을 하였고

조선은 마침내 일본에 귀속되고 말았다.

일주일 뒤인 29일 조약 내용이 발표되니 경술국치다.

그 소문을 듣고 조선의 마지막 훈장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몰려

충훈부에서는 망국을 축하하는 훈장 만드는 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일제가 이를 계승한다는 내용이 이른바 합방문서 조항에 들어 있었다.

그에 따라 작위를 받은 자들은 자그마치 76명에 달했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이었다.


나라 팔아 먹은 76인.. 용서 못할 매국노들


친일파는 병탄 전에 친일한 자,

강점기 동안 친일한 자,

해방 뒤에도 친일한 자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단 한 치도 용서되지 않는 자들은 1910년 이전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다.

먼저 나서서 나라를 왜적에게 넘긴 자들이 바로 이 76명이다.


애국지사 우당 이회영.. 예술 팔아 투쟁 지원


이들과 전혀 다른 길을 간 이도 있다.

우당 이회영은 1910년 12월 세밑에 6형제가 모두 전재산을 팔아

서간도로 떠나 곧장 무장독립운동에 돌입했다.

이들이 세운 독립운동기지이자 학교가 신흥무관학교다.

이회영은 헤이그 외교독립운동을 기획한 사람이기도 하다.

신흥무관학교 등 무장독립운동에 모든 걸 다 털어넣은 뒤

베이징 망명시절 이회영은 불 넣지 못하는 방에서 하루에 점심 한 끼, 심한 경우에는

일주일에 세 끼를 먹어가면서도 항일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피리를 불곤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명문 사대부 출신인 그는 사군자 중 난초, 곧 묵란을 잘 쳤는데

이를 내다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얻곤 했다.

예술과 역사 또는 혁명이 만나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이 곧 행동이었던 것이다.


고문 끝에 떠나신 11월17일.. 다시 꿈꾸는 해방


베이징, 상하이에서 다물단, 흑색공포단 등 아나키스트 무장투쟁 조직을 운영, 지도하던 이회영은

만보산사건, 만주사변 이후 투쟁조건이 열악해져가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하여

상하이 황포강 나루를 떠나 다롄으로 향했다.

그의 행선지를 밀고한 자가 있었다.

그는 다롄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곳은 1910년 안중근 의사가, 몇 년 뒤 신채호 선생이 순국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당 이회영이 세상을 떠난 날 또한 11월 17일이었다.

날짜에 운명이 있다면 그는 죽는 날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11월 17일은 을사늑약을 강요 당한 날이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기일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