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조회 수 3661 추천 수 0 댓글 1
대장 부리바'와 우크라이나
  • 입력 : 2014.03.04 05:42
  •  
  • 지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침대 머리맡에 소설책이 놓여 있다면 러시아 작가 고골의 '타라스 불바'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 '대장 부리바'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됐던 이 소설의 배경이 현재 친(親)러시아와 친유럽 세력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우크라이나다. 타라스 불바는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동유럽 일대에서 용맹함과 잔학성으로 두려움을 안겼던 유목 민족인 카자크 기병대장의 이름이다.

    16세기 카자크 민족을 소재로 한 이 역사소설이 푸틴의 머리맡에 놓여 있을 법한 이유가 있다. 이 소설에서 타라스 불바의 카자크 기병대가 맞서 싸우는 상대가 러시아의 적수였던 폴란드인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13세기 이후 수백년간 우크라이나를 분할 지배했다. "폴란드가 행한 모든 악행에 복수하고, 카자크의 신앙과 명예에 대한 오욕을 씻어버리고자 했다"는 타라스 불바의 맹세는 러시아 민족주의 찬가(讚歌)인 동시에 폴란드에 대한 노골적 적개심의 표현이다. 카자크 기병대는 제정(帝政)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군의 선봉대 역할을 맡았던 러시아 민족주의의 군사적 상징이다.

    이 소설에서 타라스 불바는 폴란드인의 포로가 된 장남의 사형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서 적국의 수도인 바르샤바에 잠입한다. 하지만 폴란드 여인과 맺은 사랑 때문에 민족을 버린 차남의 심장에 총을 쏜 뒤에는 묻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타라스 불바는 남은 기병대를 이끌고 출전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패한 뒤 화형대에서 최후를 맞는다. 명예롭게 죽어가는 패장(敗將)의 모습에서 최근 친유럽 시위대에게 내몰려 실각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떠올릴 수도 있다.

    과거의 폴란드가 현재 유럽연합(EU)이나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점만이 차이일 뿐 친서방과 친러시아 세력의 충돌이라는 우크라이나의 갈등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중서부는 우크라이나어(語)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줄곧 친유럽계 정당에 투표했다. 동남부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러시아계 주민이 친러시아계 정당에 표를 몰아줬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내부 갈등이 서방과 러시아의 '신(新)냉전'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벌이며 무력시위에 나섰다. 미국과 EU는 연일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경고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푸틴이 '타라스 불바'처럼 전면적 개입을 택한다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무력 충돌이나 내전(內戰)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통일 대박'을 꿈꾸는 우리에게 독일 통일이 최상 모델이라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반드시 검토해야 하는 최악 시나리오다. 한반도를 '동북아의 교차로'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크라이나라는 국명도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국경 지대'라는 어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군사적·외교적으로 자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할 때 전략적 요충지는 언제든 강대국들이 격돌하는 '장기판'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성현 |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