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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의 자당이신 이기옥님께서 88세에 "나는 내 나이가 좋다"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발간하시고,

"꿈꾸는 인생"이라는 주제로 조선일보에 실린 좋은 기사가  있어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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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옥 할머니의 '꿈꾸는 인생'

2011.09.05 10:40,<조선일보>

 

67세 방송 데뷔, 70세 화단 입문, 88세 산문집… "늙는 재미가 참 좋아요"

열두 살, 그이의 꿈은 의사였다. 순백색 가운을 입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리라 다짐했다. 책으로 뒤덮인 부친의 서재에서는 더 큰 세계로의 비상(飛上)을 꿈꿨다. 야밤에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고모를 동경했다. 그런 딸에게 아버지는 금독령(禁讀令)을 내렸다.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했다. 대신 바느질과 살림을 배웠다. 태평양전쟁 한창이던 시절, 11남매 집안의 맏며느리로 출가해 대식구를 건사하는 동안 그이의 꿈과 이름 석 자는 까맣게 잊혀졌다.

 

사람들 몇은 이광수 소설 '흙'의 실제모델이었던 계몽운동가 이종준(李鍾駿)의 맏딸로 그이를 기억한다. 누구는 원효 연구로 일가를 이룬 이기영(李箕永)과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이부영(李符永)의 누이로 알고, 또 누구는 한국 알레르기학계의 명의로 이름을 날린 강석영(姜晳榮)의 아내로만 그이를 기억한다.

 

그렇게 영원히 잊혀질 뻔한 이름을 건져 올린 건, 이기옥(李箕玉) 자신이었다. 67세에 방송에 데뷔하고, 70세에 화단에 입문했다. 얼마 전엔 산문집을 펴냈다. '나는 내 나이가 좋다'(푸르메). 인생에 대한 통찰, 곰삭은 연민으로 가득한 문장들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무명 여인의 삶에서 길어올린 것이었다.

 

◆산이 되든, 바다가 되든

 

―산문집 제목이 '나는 내 나이가 좋다'입니다. 진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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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 종주길을 산책하는 어머니와 아들. 외아들 강홍빈(66) 서울역사박물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행정수도건설 계획에 참여했던 도시설계 전문가로 서울시 부시장을 지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나도 젊었을 땐 '노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지?' 궁금했다우. 한데 늙어보니 노인으로 사는 재미가 참 좋아요. 수능 시험 본다고 맘 졸이게 하는 자식 없고, 취직 안 되고 장가 못 간다고 걱정시키는 아들 없고요.(웃음) 건방지게도, 난 절대 추하게 늙지 않고 남들이 아깝다며 섭섭해할 때 세상 떠야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구십을 앞둔 왕 노인이 되니 사물의 이치가 보이고, 사람의 마음이 보여요. 욕심 다 내려놓은 홀가분한 평화가 있어 좋아요."

 

―그래도 여인이라, 책 곳곳에 육신의 노쇠에서 오는 절망감을 드러내셨습니다.

 

"가다가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사람 같지 않지요. 말려든 눈언저리, 갈퀴 같은 손…. 가느다란 손끝이 재간 있어 보인다던 섬세한 손이었는데,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받아들여요. '그래도 아직 눈이 보이잖아?' 하면서.(웃음)"

 

―이번이 첫 책이 아닙니다. 일본 작가 소노 아야코의 수필집 '계로록(戒老錄)'을 '아름답게 늙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셨지요.

 

"예순한 살 때예요. 남편 학회 일로 교토에 따라갔다가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지요. '나이 든 사람들이 조심하고 지켜야 할 사항'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데요. 세상에 내놓을 요량은 아니었고, 함께 늙어가는 딸과 며느리에게 선물로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우리말로 옮겨봤지요."

 

―그 번역서가 계기가 되어 KBS라디오 '언제나 청춘'이란 프로에 '데뷔'를 합니다. '이기옥의 5분 칼럼'을 3년 넘게 방송하셨지요.

 

"그거 할 땐 목에다가 메모지를 아예 걸고 다녔어요. 버스 간에서, 노인정에서 또래 노인들 관찰하고 이야기 동냥해서 밤낮으로 썼지요. 내 평생에 이름 석 자를 대고 하는 것이니 참 열심히 했나 봐요. 데이트하자는 남자도 있었으니깐.(웃음)"

 

―아름답게 늙는 지혜 한 가지만 일러주시지요.

 

"젊은이들에게 잔소리하지 않는 거요. 그들이 겪어보지 않은 얘기를 자꾸 할 이유가 없어요. 뒤는 산이 되든 바다가 되든, 저희들끼리 알아서 살게 놔두고,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양 열심을 다해 사는 거예요."

 

◆글쓰기의 즐거움

 

―글쓰기는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30대 중반이었나 봐요. 11남매의 맏며느리라는 굴레가 씌워졌는데 그에 걸맞은 넉넉함도, 처세도, 언변도 없으니 힘겨울 때마다 메모하듯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말로는 쏟아낼 수 없는 감정을 깨알같이 써내려가면 마음이 후련해졌어요."

 

―꿈을 이루지 못한 울분이었을까요?

 

"전문직 여성들에 대한 부러움이 늘 있었어요. 농촌계몽에 뛰어든 아버지의 그늘에서 평생을 노동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내 안에 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매사에 솜으로 싼 듯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일본식 교육이라 속엣것을 마음껏 분출하질 못했어요."

 

―소설습작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젊어서 쓴 건 강 박사(남편)가 다 찢어버렸어요. 하필 서랍에 숨겨놨던 신춘문예 습작을 들켰지요.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60이 훨씬 넘어서예요. 이호철 선생 문하에 들어가 소설작법 배웠죠. 강의 첫마디가 '소설은 거짓말이다'였어요. 참 솔직하지요? 글을 쓰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넓어지고 세밀해져요. 버스를 타도 승객들의 앉음새며 음성, 표정까지 세세히 살피게 되고요. 재미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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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에 맑게 번지는 그‘물맛’이 좋아 칠순에 붓을 잡았다.‘ 배우는 데 나이가 있나 뭐’하고 펼친 화판이었다. 젊은이들과 나란히 앉아 그림 작업에 한창인 이기옥 할머니의 모습이 아름답다.―신춘문예의 꿈은 아직 갖고 계십니까.

 

"설마요.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문학장르를 내가 따라갈 리 만무하지요. 작품을 썼다면 '박완서'식으로 썼겠다 싶어요. 내가 보고 겪은 근현대사에 조금만 픽션을 가미하면 한권의 소설 충분히 되지요. 나 어릴 적 우리 집 사랑채엔 새벽이면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할아버지 혼자 그들을 맞았지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눈을 피해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거였어요. 할머니에게선 노상 동학 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피란길 행길에서 제 아버지를 낳으셨대요. 그런 이야기들…. 내가 쓰기는 글렀고, 누가 소설로 써보겠다면 그 이야기 들려 드릴 용의는 있어요.(웃음)"

 

◆이광수의 '흙'

 

이기옥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조양의숙을 세워 농촌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섰던 황해도 봉산의 지주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부친인 이종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형 출판사인 한성도서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성도서는 심훈의 '상록수',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김동환의 '국경의 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등 당대 문학가들의 저서를 출간했다.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낙향한 뒤에는 봉산농사학교를 세워 여생을 농촌계몽에 헌신했다. 이광수 소설 '흙'에 등장하는 주인공 허숭의 실제모델이 이종준이다.

 

―이광수의 소설 '흙'의 모티브가 부친인 이종준 선생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나중에 고모들이 알려줬지, 소설 읽을 땐 몰랐어요. 애정관계가 복잡해서 뭐 이런 소설이 있어, 외려 불평을 했지요.(웃음) 난 심훈의 '상록수'가 훨씬 좋았어요."

 

―당대의 문인들도 만나보셨나요.

 

"한성도서가 서울에 있어 문인들은 못 봤어요. 오히려 당숙(설초 이종우 화백) 덕분에 봉산 집에 놀러 오신 화가들을 간혹 뵈었지요. 청전 이상범 선생(한국 근대화단을 대표하는 동양화가)이 가끔 오셨는데, 철없던 내가 어디서 부채를 세 개 구해 와서는 여기다 그림 하나씩 그려달라고 졸랐대요. 부챗살에 참새 한 마리 그려주시면 좋아라 했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 이종준은 어떤 분이었나요.

 

"만날 작업복만 입고 사셨어요. 다른 친구분들처럼 반듯한 양복 한벌 갖춰 입은 모습 못 봤지요. 여성이 눈을 떠야 우리나라가 발전한다며, 봉산 내려와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글 가르친 거예요. 전국에서 우리 마을이 문맹률 가장 낮았지요. 한성도서 일도 열심이셨지만 도통 수익이 나질 않아서 할아버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그놈의 회사는 올해도 달력이랑 책만 보내는 거냐? 금년에도 또 땅을 팔아야 하는 거냐?'(웃음)"

 

―이광수 선생의 친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컸는데 이종준 선생은 어떤 입장이셨나요.

 

"그때는 이미 봉산에 내려와 농사교육에 전념하실 때라 특별한 언급은 안 하신 걸로 알아요. 다만 화재로 쑥대밭이 된 한성도서를 다시 일으키려면 베스트셀러인 '흙'을 다시 찍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창립멤버들이 반대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미국 고모 이선행

 

―계몽운동, 개화운동에 앞장서신 분이 딸의 출세를 막으신 건 의외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처럼 될까 봐. 자기 딸들은 남편 보필하고 가정 잘 다스리는 현모양처로 살길 바라셨어요."

 

―가부장이셨군요.

 

"밥 먹을 때 오빠는 할아버지와 겸상을 하고, 남동생은 할머니와 겸상을 해요. 어머니와 딸들은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고 그 가운데 아버지가 앉으시고. 곁눈질해 보면 오빠 상에는 장조림, 굴비 같은 반찬들이 올라 있어요. '삼국유사'도 오빠에게만 가르쳐주시니 서러웠지요.(웃음)"

 

―그 오빠라는 분이 원효 연구에 일가를 이루셨다는 이기영 박사인가요?

 

"우리 집안의 둘도 없는 대들보지요. 늦게 본 아들이라 집안에서 왕이었고, 공부까지 잘하니 고모들도 오빠를 떠받들었어요. 불란서 유학 중 불교에 심취한 뒤로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와 갈등이 많았어요. 96년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 예배와 불공이 번갈아가며 이뤄졌을 정도였으니까."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 이선행을 동경하셨죠.

 

"담이 큰 고모가 혼수비용 미리 받아내서 큰일을 도모한 거죠. 미국 가서는 군관학교 다니던 최윤호 박사 만나 결혼했고 이승만, 조병옥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단발머리에 야무진 표정의 고모 사진을 자주 들여다봤어요.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고모를 돌아보지 않으셨대요. 최윤호 박사는 항일운동하시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옥사하셨고 소생이 없던 고모는 혼자 사셨고요. 소련군, 나중엔 인민군 눈을 피하려고 촌부 행색을 하셨는데 워낙 세련된 자태라 고모는 그게 잘 안됐어요. (웃음)"

 

―신여성이었던 어머님이 마음고생을 좀 하셨겠어요.

 

"아버지를 도와 눈만 뜨면 치맛자락에 불이 나도록 일만 하셨으니까요. 미국 고모와 동기동창이라 열등감 같은 게 있었을 거예요. 그래도 나중엔 고모가 엄마를 부러워했어요. 인생이 그래요."

 

―책에 미국인 선교사를 집에서 맞이한 장면이 나옵니다.

 

"노란 머리에 원피스 차림의 서양 할머니가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오는데 가슴이 쿵쿵 뛰더라고요. 서양 사람은 그림에서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도 그 무렵 한 것 같아요. 하지만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맏딸이었고, 동생들을 보듬어야 했고. 그러고 보면 내가 참 외로운 사람이에요.(웃음)"

 

―아버님이 결국은 시집간 맏딸의 집에서 짧은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일본 패망 후 소련군이 진주해 들어오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됐지요. 출산하러 친정에 가 있던 나는 갓난아기를 둘러업고 38선 꽝꽝 언 갯벌을 버선발로 넘어왔고, 소련군들에게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여동생들은 머리를 박박 깎아 남장을 하고 다녔어요. 아버지의 충격이 제일 컸지요. 소련군이 아버지가 애써 지은 학교 강당을 통째로 허물어서 그 목재로 모닥불을 피웠거든요. 그 무렵 서울의 한성도서는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타 없어져 아버지의 일생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린 거예요.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셨지요. 비운의 역사 한가운데 계셨어요."

 

◆名醫 남편 강석영

 

―의사가 되지 못하고, 의사와 결혼했습니다.

 

"의사는 학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대서 부모님이 두 딸을 의사에게 시집 보냈어요. (태평양) 전쟁의 와중이라 식도 못 올리고 몸뻬 차림으로 기차를 탔지요. 스무 명 넘는 식구들 우글대는 시댁으로 들어서는데, '아, 내가 잘못 왔구나' 싶더라고요.(웃음)"

 

―6·25 전쟁은 무사히 넘기셨나요.

 

"한강다리가 끊겨 피란을 못 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고지식한 남편은 (서울대학)병원으로 다시 일하러 갔는데, 그 양반이야말로 전쟁을 호되게 치렀어요. 처음엔 국군 부상병을 치료했겠지요. 하지만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병상의 국군들이 사살되는 장면, 동료 교수들이 빨간 완장을 차고 다니는 모습. 부상당한 인민군을 치료하는데 죄다 앳된 소년들이더래요.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됐을 땐 하수도관으로 숨어 병원을 탈출했어요. 거기 남아 있으면 납북될 게 빤하니까."

 

―인민재판도 보셨나요?

 

"내가 칸나꽃을 싫어해요. 섬뜩해요. 인민재판한 그 자리에 핏빛으로 붉은 칸나꽃이 피어 있었어요. 어떤 아들은 아버지를 살려내는 조건으로 자기가 의용군에 자원해 갔지요. 아버지는 살았지만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리 손주들에겐 대물림되어서는 안 될 역사의 비극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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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옥 할머니가 수채로 그린 정물화. / 20여년가까이 그린 작품들을 그는 얼마 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갔다가 환도는 홀몸으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은 언제고 자기 연구가 우선인 사람이었어요. 피란시절 나라에서 일본 유학을 허락한다는 발표가 나자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애들과 나만 남겨두고 비행기를 탄 사람이에요. '우린 뭐 먹고 살아요' 하니까 아버님한테 맡긴 돈 있으니 그리로 가래요. 기가 막히지요. 서울로 왔더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어요. 눈물로 호소해서 겨우 돌려받았어요."

 

―서울대가 펴낸 '한국의학인물사'에 부군인 강석영 박사가 소개돼 있습니다.

 

"업적은 대단했던가 봐요. 엊그제도 사촌 시동생이랑 남편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도 형님이 환자는 잘 고치셨죠' 하대요. 온화한 듯 보여도 외골수에 불 같은 성격이라 제자들이 벌벌 떨었어요. 학문적으로는 만점이지요. 그런데 가정엔 도통 관심이 없어요. 자기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바쁘니까. 무거운 장바구니 한 번 받아준 적 없는 남자예요. 요즘 말로 이혼감이죠.(웃음) 그런데 나는 우리 애들보고 그래요. 남편한테 불만이 있더라도 힘으로 밀지 말고 꾀를 내어 도움을 받으라고요. 남자라는 동물과 생선은 거꾸로 서면 안 되거든요. 생선은 비늘이 떨어지고, 남자는 말을 절대 안 들어요. 언제고 매보다는 꾀가 낫지요."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60대이니 너무 빨리 갔지요. 작별인사도 못 하고 황망히 갔어요. 우리 남동생이 그래요. 매형이 누나를 너무 잡고 살아서 이젠 놓아줘야겠다 하시고 일찍 떠난 것 같대요.(웃음)"

 

◆늙어서 참 좋다

 

'인생은 강물 같은 것,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보듬고 망망한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 나는 그 강물 어디쯤에서 이 글을 쓰고 있을까?' ('나는 내 나이가 좋다' 중에서)

 

―그러고 보니 부군이 돌아가신 뒤 방송과 그림, 글쓰기를 본격화하셨네요.

 

"혼자서도 재미있게 살아요. 자립심이 강 박사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이지요.(웃음)"

 

―94년부터는 그림을 그립니다. 한국야외수채화회 회원으로 전시도 하셨고요. 왜 하필 수채화였나요?

 

"물맛이 좋아서요. 맑게 번지는 그 맛이 좋아요. 근데 마음대로 안돼요. 그림이 잘 되었다 싶으면 손을 딱 떼야 하는데, 더 잘할 욕심에 붓을 한 번 더 칠하게 되고, 그러면 떡칠이 되고 말지요. 인생사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20여년 그려온 작품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셨습니다.

 

"지나온 세월들 고스란히 담긴 추억의 그림 보따리예요. 누구는 개인전을 열라고 하지만 민폐지요. 다행히 내 그림을 받아주는 데가 있어서 고맙게 내놓은 거예요."

 

―어찌 보면 그 세대 다른 분들에 비해 풍족하고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그럼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축복받은 노인네지요. 아직 내 발로 걸어 장을 보러 가고, 아직 간을 맞출 수 있고, 아직 바느질할 줄 하니 그 또한 감사하고요. 다시 태어난다 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할머니로 사는 걸 택할지도 모르겠어요. 바보 같지요?(웃음)"

 

―소망은 무엇입니까.

 

"결코 현역이 될 수 없는 나이예요. 무대의 막은 내렸고, 휘장 뒤에서 조용히 내 몫을 해야 한다고 하루에도 몇번씩 다짐을 해요.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마음이 외로우면 또 외로운 대로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 또한 저 성성한 솔잎을 이고 몇백 년을 늙어가는 노송의 위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