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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12:34

나는 기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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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생명과 사랑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유한 즉 죽음의 한계를 돌파하여, 무한 즉 영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우주 만물의 생명은 사랑에서 싹 트고 자란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생명, 사랑,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그에 대한 "믿음"(사랑 속의 신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한다. 무한한 것 하나의 가치는 유한한 것 억개의 가치보다 크다. 미천한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영생할 존재라면, 유한한 세상의 모든 증권거래소, 재벌가의 재산총액, "황제"가 가진 모든 것보다 더 크다. 그러니, 그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의 생명도 그만큼 귀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가  좋다.


우리의 무의식 밑에는 딜레마와 불안이 있다. 기독교는 그 딜레마와 불안을 직시하여 해결책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그런 기독교가 나는 좋다. 우리는 풍요의 자궁을 떠나 태어나면서 자아를 갖게 된다. 자기 중심적 자아이다. 그 자아는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찾아 독립한다. 그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용기있는 선택, 자아의 성장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자기 중심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동시에, 그 것은 무한한 풍요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길, 따라서 죽음과 결핍의 세계로 운명지어진 길이기도 하다. 그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죽음과 결핍의 세계에 갇힌 우리는 불안하다.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결핍과 불안을 해결하고 싶다. 우리는 쉽게 탐욕에 빠진다. 경쟁과 성공, 명예와 권력의 무분별한 추구로 결핍을 채우려 하지만 더욱 목이 마를 뿐이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원죄"의 의미를 오늘의 우리 처지에 비추어 재해석 해 본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아담에게 허용한 "선택의 자유"(자유 의지)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 자유는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 뜻대로 조종된다면, 그는 로봇 인형에 불과할 것이다. 로봇 인형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강제가 없다. 오히려 에덴을 떠나가는 아담에게 따뜻한 가죽 옷을 입혀준다. 가죽 옷은 십자가를 예표한다. 거기에는 피흘림의 자기 희생과 용서가 있다. 아담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인류 전래의 DNA에 새겨진 기억이요 자각이다. 인류사는 우리 각자의 인생사에 축약된다. 우리 각자는 아담이다.

 

예수는 "잃어버린 아들"(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을 제시한다. 부자 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아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그는 가지고 나온 재산 모두를 허랑방탕으로 탕진하고 가난에 쪼들리다 못해 고향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무조건 기뻐하며 잔치를 벌인다. 이 둘째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풍요한 집에 다시 들어가려면 그를 아버지로 그냥 믿기만 하면 족하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도 같이 주어진다. 우리는 이런 대가없는 은혜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 회복에 무슨 위대한 성취, 선행과 자선, 도야된 인격이 필요하겠는가. 오직 믿음 즉 사랑 속의 신뢰가 있으면 된다. 관계가 회복되면 인격과 행위는 자연히 따라 온다.

 

오히려 모범과 공적을 내세워 아버지의 아들 자격을 사려는 첫째 아들의 교만이 문제이다. 아버지(하나님)와 맞먹겠다는 그의 교만에는, 동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멸시도 있다. 두 아들은 내 마음 속 두 개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는 허랑방탕보다도 교만이 더 큰, 아니 가장 큰 죄이다. 영적으로는 원죄의 핵심이다. 예수가 심하게 경고 질책한 바리새인은 모범적인 학자, 공적이 많은 지도자들이다. 당황스럽다. 그러나 나의 교만과 위선, 내 "마음 속의 바리새인"을 해결하기 위해 내 혼자 노력으로 할 일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우쭐거리는 나는 실상은 세상의 인정을 구걸하는 걸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나같은 걸인, 두 모습의 나까지도 "원죄와 죽음"의 수렁에서 구해 내려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렸다. 그럴 목적으로 그는 이 세상에 왔다.

 

나는 더 이상 죄 밑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 나는 은혜의 가죽 옷을 입은 걸인 아담, 두 모습의 아담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나의 이 흉한 모습 그대로 받아달라고 그의 집 문을 두드리면 된다. 그 때에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해 들었던 반기(반란의 깃발)와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회개"라고 부르는 이 일은 여지껏 달려가던 방향에서 180도 뒤로 돌아 서는 것이다. 믿음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집, 천국의 문은 회개와 믿음으로 열리는 문이다.


믿음은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구원자)에게 나를 맡기는 것이다. 그러라고 하나님이, 무한과 유한 사이 장막을 찢고, 사람 예수의 모습으로 지구에 왔다. 죄와 죽음에서 나룰 구하려고 이 땅에 온 것이다. 내 모습이 아무리 흉해도 상관 없다. 맡김은 포기이므로, 지저분한 자아라도 포기와 죽음이 두렵다. 두려움 속에서 일단 나를 맡기면 나머지 일은 예수가 할 것이다. 그는 나의 독립된 자기 중심적 자아, 못생긴 자아를, 그와 연합된 진정한 자아, 결핍 없는 온전한 자아로 바꾸어 갈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피 속에서 그의 인격에 연합할 때, 미천한 나는 그의 신격에도 동참하게 된다.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박힌 나의 옛 자아는, 그 곳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예수와 함께, 예수를 닮아가는 새로운 아담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흠 많은 나지만 하나님이 눈 감고 봐준 덕택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드디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내 마음의 밭, 무의식 속에 숨겨진 진짜 생명의 씨앗, 애초에 아담 안에 심겨졌던 그 씨앗을 찾을 수 있다. 그 씨앗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 내 마음 안에 천국이 세워질 것이다. 그 믿음의 문은, "여기서 지금", 이웃과의 사랑, 용서, 화해의 관계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는 문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몸이 죽은 후의 나를 다시 살려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 것은 유한한 자연을 넘어 무한한 영의 세계로 가는 문, 인간 진화의 최종 단계 관문이다. 나는 이제 무서워 떨며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된다. 평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가 좋다.

 

기독교의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이 학살 당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독교가 했다기보다는 기독교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도둑이 구달의 이름을 도용해서 도둑질 하였다고 구달이 도둑인 것은 아니다. 교회에 가짜 신도, 가짜 성직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가짜 교리, 가짜 주장도 많다. 어느 점에서는 나도 가짜일 수 있다. 가짜가 많다는 것은 진짜의 가치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가짜 로렉스 시계가 많은 것은 진짜 로렉스 시계에 높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교회가 부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썩은 사과가 있다고 사과를 안먹겠다면 진짜 맛있는 사과는 영영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신실한 기독교 평신도, 진리에 헌신하는 목회자와 교역자, 진짜 교회도 많다. 사람이나 사람이 만든 것은 완전할 수 없다. 이들도 그렇다. 그래서 사랑과 용서가 필요하다.

 

기독교인들은, 과거의 또 현재도 진행되는, 이러한 비극과 불행,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기독교 진리의 풍성함과 깊음을 겸손하게 계속 찾고 전파해야 할 책임이 있다. 신학(교리)은 지도와 같다. 지도는 목적지를 실제 가 보고 찾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 경험의 산물이다. 기독교 신학(교리)은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공통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둘 다 딱딱하고 감동이 없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곳, 내가 꿈꾸는 사리원의 고향 집을 찾아 가기 위해서는 황해도 지도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공통 신학(교리)은 성경의 깊고 풍성한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우리의 본향 천국을 길 잃지 않고 찾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나는 이슬람교나 이슬람교도(무슬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할 말이 없다. 불교에 대하여도 잘 모르지만 생명을 존중하는 자비(사랑)의 종교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가 신실한 진짜 불교도라면,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 부르는, 생명, 사랑, 진리의 근원, 우주 만물의 창조주, 모든 자연과 영의 세계의 절대자를 그도 만날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경로일지는 모르지만, 그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천국을 꿈꾸며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태어 났다. 성경을 펼치면 그  꿈과 소망이 사랑과 믿음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기쁜 소식이다. 그 꿈과 소망을 단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기독교가 나는 좋다.